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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문학사상],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일상의 지점, 그리고 넘어서는 길 혹은 꿈

-이향지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송기한(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자기 구원과 자연과의 교감에의 강한 의지

이향지 시인의 산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에 있는 수많은 산들의 이름을 보노라면 시인의 도저한 산행에 대한 깊고도 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대관절 무엇이, 어떠한 힘이 시인을, 그것도 험준한 산길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여시인을 산으로 불러들인 것일까? 이 시인은 왜 고된 산행길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그녀를 적당한 등산객으로 생각하기에는 이미 산과의 질긴 인연의 매듭을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산행을 하게 되기까지부터 산행중의 감상들, 나아가 산과의 교감으로서의 대화가 담겨 있는 그녀의 시집은 우리 국토에 있는 산의 일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웬만한 산들의 이름은 모두 수록되어 있다. 속리산이나 도봉산ㆍ북한산ㆍ설악산 등 우리에게 익숙한 곳뿐만 아니고 가지산ㆍ가리왕산ㆍ고루포기산ㆍ불곡산ㆍ좌구산 등 귀에 낯선 곳들, 나아가 금강산은 물론이고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쉼없는 여정에는 마치 무언가의 '부름'과 그 무엇엔가의 '들림'이 아니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시인은 서문(序文)에서 그녀의 산행의 계기가 되었던 것을 병마와의 싸움으로 말하고 있다. 숨이 꺼져들어가던 순간 불현듯이 걷고자 한 욕망이 생겼다고. 무작정 걷다가 죽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고 결국 느리고도 긴 걸음 끝에 산에 이르게 되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녀에게 걷는 것이란 곧 죽음과의 대결이자 생명의 확인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산이 그녀를 받아 주었을 때 산에 대한 그녀의 발걸음은 종교이자 구도(求道)의 과정이 되었다. 즉 산꾼들이 산행(山行)을 선행(仙行)이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걸음 하나하나, 숨결 하나하나에는 자기구원과 자연과의 교감에의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냥 가는 것이다/노고지리 한 마리 전령으로 띄우고/춤추듯 꿈꾸듯/그리로 가는 것이다//포메팅을 갓 끝낸 디스켓처럼/윤전기 앞에 놓여진 백지 다발처럼/설레임도 희망도 모르는 新生으로/그냥 가는 것이다//어둠이 소리 없이 빛에 섞이듯/햇살이 불평 없이 어둠에 섞이듯/무거움도 가벼움도 모르고/가는 것이다//한 때는 가장 따뜻한 집이었던 나의 몸이여/고통의 알들을 피부로 낳던 길의 기억이여/비와 허물을 가려주던 인연의 그늘이여/나무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여/서늘함이여
 `<수렴동詩>

그러나 그러한 예배 올림과도 같은 자신의 여정을 그녀는 '사람살이의 비명소리'라 한 바 있다. 어느 길이든 사람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곧 혹독한 곳이든 정감 깃든 곳이든 '나'의 내면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으며 울부짖음이든 허우적거림으로든 끊임없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그녀의 시선은 바로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 뻗어나가고 있다. 그녀의 시 가운데 <나뭇잎>은 그녀의 지향이 생겨나는 지점을 말해 준다. "나,  나뭇잎/나 있는 곳", 그곳은 '극장은 멀리 있으되', "정신병원과 양로원은 가까운 곳"이며 "버려진 집들이 한쪽 어깨가 기울어/우두커니 햇볕을 쬐는 곳/버려진 사람들이 우두커니 저녁밥을 기다리는 곳", 곧 "그리움이 삭는 곳"이다. 그녀가 도시 한복판의 화려함과 북적거림으로부터 눈을 돌렸을 때 그녀는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삶의 신산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신산함의 자락, 그 변두리의 끝에서 만난 것이 산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녀의 산행은 사람살이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곳이자 넘고 넘음을 되풀이한 곳이되, 그 아득한 곳은 '나'의 '이곳'에서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가히 경이롭다고까지 느껴지는 이향지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남한의 거의 대부분의 산을 두루 망라하며 나아가 한라산에서 지리산ㆍ태백산ㆍ설악산ㆍ금강산ㆍ두류산ㆍ아무산ㆍ백두산까지, 우리 국토의 백두대간을 이어야 한다고 소리 높게 외치는 시인의 기개에 주눅들어 외경스러움만을 느낀다면 그녀를 옳게 이해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산행은 위대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는 오히려 그 위대함의 위용을 볼 수 없는 근경에서 전해지는 것들이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ㆍ바람소리ㆍ물소리ㆍ죽순이 자라는 소리 등 시인은 이들 미세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섬세한 자세야말로 시인의 인간다움일 것이다. 작고 미약한 것의 생명 있는 소리를 들으려면 한없이 낮고 조용한 태도라야 한다.

봄은 봄. 1997년 3월 3일의 태양이, 대지의 털인 나뭇가지마다 봄을 파종하는 소리 들어 보라! 버들강아지 솜털이 반짝반짝 난다. 오리나무 수꽃들이 허공을 징검거리고, 황금 억새들은 꽃 없는 머리로 바람을 저어가며 새순의 때를 가늠한다. 쯔비! 쯔비! 우는 쑥새가 파아란 하늘을 끌고 소나무 가지로 날아든다. 쯔비! 쯔비! 꽁지깃을 들어올릴 때마다, 기억의 진달래가 화들짝! 화들짝! 솔잎 사이에서 핀다. 꽃 지고 꽃 피는 소리 사이로, 자갈들 두런거리는 길이 하나 돌아 나온다. 얼어붙었던 물방울들이 가뭇가뭇한 말문을 트며 등산화를 붙들고, 절개지의 흙 알갱이들이 사태진 길섶에 작은 가지산을 쌓고 있다.
`<쌀바위 가는 길>

 시인은 아주 작은 손길로 대지의 육체를 더듬고 있다. 미미한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세는 산 한가운데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가능하다. 소위 내면의 고요함 찾기일 터인데, 이것은 희생에 가까운 자기소거이자 비움의 행위에 해당된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변두리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인과 숲 한가운데 놓인 생명의 작은 소리를 듣는 시인은 결국 동일한 인간의 모습이며 또한 산을 오르면서 나를 지우는 행위는 도(道)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시인이 산행을 포기하지 못하는 힘도 여기에 있다. 작은 생명들의 큰 목소리들이 그에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열어보이는 생명의 소리는 그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서로를 향한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의 근거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안된다. "사람을 보아도 날아가지 않는 산새"는 그에게 신뢰를 가르쳐 준다. 완전한 믿음이 있지 않고는 그 미세한 것들은 시인에게 아무런 생명도 열어 주지 않았을 터, 그녀는 산을 걸으며 그것을 보았고 추상적이기만 하면서 실재의 힘이 된 그 믿음이 있었기에 한 발자국 더 계속해서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것을 넘어서` `!//들리는 것을 넘어서` `!"라고 외치는 것은 그야말로 "두근거리는 신뢰를 발견할 때까지"(<속리산>)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문답과도 같이 이렇게 말한다. "바위를 믿지 않고 어찌 바위를 넘으랴"(<운악산>)라고.

*2001년 5월호, 문학사상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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