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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강좌],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향지의 시 -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바람에 허리 휘어 바람 끝에 섰을지라도
    제 의지로 서있는 것들은 저리도 아름답다.
    갈대는 바람을 꺾지 않는다.
    누군가의 옷자락에 쓸리며 꺾인
    변두리의 슬픔에 내 길이 닿았을 때
    겨울 갈대는 꽃으로 서있는 게 아니었다.
    먼지 속에서도 빛을 만나면 제 빛을 녹여
    겨울 갈대의 뿌리에 연둣빛 반란의 무리를 전하곤 하는
    차디찬 눈구렁에 섰을지라도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삶이 힘들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흔히 미움이나 원망의 감정에 빠져듭니다. 무언가 바깥의 요인에게 핑계를 대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통과 상실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시를 한 편 읽어봅니다.

이향지 시인은 50대 중반을 넘긴 시인입니다. 40대가 넘어서 시인이 되셨지요. 아주 재능있는 시인입니다. 일생동안 재능을 눌러놓고 사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러나 늦깎이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이향지 시인은 어느 젊은 시인 못지 않은 젊은 상상력과 지적인 시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빼어난 알피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산에 자주 가시는 분들은 이향지 시인이 쓴 산에 관한 글들을 많이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소개해드린 시는 늦게야 시쓰기에 입문한 중년의 여성시인이 느낄 법한 상실감과 소외감을 담담한 어조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겨울이란 계절이 상실감의 배경으로 잘 어울립니다. 또한 쓸쓸하고 텅빈 산기슭에서 만난 갈대밭이 그렇고요. 갈대는 그 색깔 때문에 일단 상실의 주제를 묘사하기에 적합해요. 모든 푸르름이 사라진 곳에서 팍팍함으로 피워올린 흰 빛. 그 색채는 아름답지만 처연하지요. 게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무력하게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꼭 인생살이 앞에서 힘겨워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보는 듯해요.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끝내 꿋꿋하게 서있는 갈대의 모습에 눈길을 주는군요. "제 의지로 서있는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러나 이 정도의 표현이라면 흔하디 흔한 아포리즘으로 머물렀을 거예요. 이 시인의 강점은 그만한 나이의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아포리즘의 유혹에 잘 빠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녀는 늘 아포리즘을 치고 앞으로 나옵니다. 다음 대목을 읽어봅시다. 이 대목이 중요해요.

    갈대는 바람을 꺾지 않는다.

자, "바람은 갈대를 꺾지 않는다"가 아니고, "갈대는 바람을 꺾지 않는다"입니다. 이 뒤집기는 중요합니다. 시인은 이 구절을 통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게 원망을 투사하지 않는 원숙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갈대는 소외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람과 갈대의 관계에 있어서, 시인이 바람의 편이 아니라 갈대의 편에 서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개는 바람의 편에 서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 시인이 외계를 대하는 태도가 그만큼 주체적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어법입니다.

시인이 "변두리의 슬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이 표현을 한번 볼까요?

    겨울 갈대는 꽃으로 서있는 게 아니었다.

가슴을 치는 구절입니다. 젊음은 꽃이지요. 시인은 자신이 이미 젊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꽃처럼 아름다움을 뽐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게다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낼 생각도 없습니다. 대신 "먼지 속에서도", 즉, 열악한 환경 안에서도, 빛을 만나면, 그 빛을 받아 뽐내는 대신, 자신이 지닌 빛마저도 겸손하게 녹여 다음 세대의 힘으로 전하겠다는군요. "겨울 갈대의 뿌리에 연둣빛 반란의 무리"를 전해 주겠답니다. 내년 봄엔 새로운 잎들이 피어날테니까요.

그러나 이 시의 압권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갈대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제 시인의 관심은 온전히 갈대에게만 쏟아집니다, 그녀는 바람에게도, 이따금 찾아오는 빛에게도, 갈대가 시린 발을 딛고 서있는 눈구렁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갈대만을 바라봅니다. 갈대는 갈대인 자신의 원리 안에서 꿋꿋합니다. 갈대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 즉, 갈대는 자신의 소외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을 스스로에게서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갈대는 갈대의 원리에 의해 갈대라는 겁니다,

자신의 슬픔을 받아들임으로써 갈대는 갈대에 의한 갈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당당한 슬픔의 수납을 "적극적 체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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