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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이달의 시인], 해설 - 이향지의 시들
<해설>
집, 기억에서 현존으로
- 이향지의 시들
노혜경 (시인)
이향지의 신작시들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시간에 대한 인식을 되살펴 볼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제삼천년기의 도래를 바로 코앞에 둔 시점이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나 준비보다는 세기말이라는 음습함과 절망에 더 많이 몸바치는 것 같고, 시인들이 더 그러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간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시인들의 태도가 뜻밖에도 안이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시간의식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시간의식은 근대성에 대한 의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점은 여성시가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또 하나의 표지가 될 수도 있다.
여성시 운동이 한국문학의 시적 근대성 획득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때의 근대성이란 용어는 정치적 근대성이 담보하고 있는 민족주의적이고 중심집약적 근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탈근대의 이데올로기를 선취하는 인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이제는 웬만큼의 합의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시로 분류되기만 하면 무조건 근대성을 획득한 셈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80년대의 민중시가 시인 개개인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 반대의 지점에서, 시인적 자질로는 충분히 여성시인인 우리 모두는 언어적이고 미학적으로 근대의 어떤 국면을 돌파하는 도정을 시를 통해 제각기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여성시란 잡동사니 꽃다발인 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저나름의 향기와 빛깔과 모양을 다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여기에 또 문제가 있으니, 문학적 개체는 생물학적 개체와는 달라서 개체의 발생이 반드시 계통발생의 제단계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앞 사람이 끝난 지점에서 다시/달리 시작할 수 있는 어떤 신비로운 연속성이 있다고 나는 늘 주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학적 시련의 어떤 단계가 모든 여성시인들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거라면, 정치적 역사적 근대가 은밀히 기획하는 그 동일자적 세계와 무엇이 다른가. 반면에 그 걸어야 함이 강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개체가 제각기 같은 길을 가는 거라면, 도대체 왜 그러한가.
바로 이런 의문이 나로 하여금 생략불가능한 사건들에 관심을 두게 한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죽음과 재생이라는 모티브를 둘러싸고 있는 제의적 국면이다. 예컨대, 여성시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강은교가 <허무집>에서 보여주었고 김승희가 <태양미사>에서, 김정란이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 걸어간 바 있는 그 시작의 모티브, 그것도 그냥 시작이 아니라 늘 '다시' 시작하는 것의 모티브는 그 돌이킴의 주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아니 어쩌기 위해서 반드시 제의적이다. 이 제의의 성격은 기계적이고 선조적으로 흐르던 시간이 어떤 영적 에너지에 의해 되풀이될 수 있는 순환적 시간으로 바뀌는 도정이며, 우리, 또는 비인칭으로 수행되던 죽음의 연습이 이 시간의 구부러짐에 의해 '나'라는 존재를 얻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성시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어 갈수록 점점 더 개인적 의례의 성격을 지니게 되던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양상이다. 관습적으로 내게 주어진, 낡고 낡은 피동적 여성성을 벗어버리고 '나'라는 주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성시인들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자기의 죽음을 선언한다. 아니, 점점 더 강렬해지는 자의식으로 죽음을 언어를 통해 살아낸다. 죽음, 다시 말해 '존재의 불연속성'을, 언어를 통해 존재의 연속성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다.
이번 이향지의 신작시들을 읽으며 특히 마음이 쏠려가는 부분이 바로 그러한 점이다. 여기 이 시들은 이향지의 기왕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여행이라는 근본 모티브에 의존하고 있지만, <구절리>라든가 <땅끝> 같은 구체적 지명을 달고 나타나던 기존의 공간적 여행과는 달리 잠겨진 기억을 향한 시간여행이라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이향지가 획득하려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또 우리들 여성시의 얼굴에 어떤 표정을 하나 보태어줄까.
1. 할머니 집 나가시다
이번에 발표한 여덟 편의 시에서 이향지는 이미 말한 대로 기억속의 장소를 향한 여행의 도정을 보여준다.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이 왜 중요한가를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겠으나, 공간적이고 지리적인 여행이 '나'의 존재를 명확히 하지 않아도 되는 묘사적 국면을 포함하고 있다면 시간여행은 '나'의 표지가 드러나든 숨어있든 관계없이 바로 그 기억의 소유자인 '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여행이라는 점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성질 때문에 시간 여행은 대체로 과거로의 회귀를 통한 자아 탐색과 관련되며, 나아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제의적 성격을 수반하게 된다. 과거로의 회귀는, 일정 수준까지는 개인적 기억의 회상과 그에 따른 회복이라는 보상의 성격을 띠지만 그 속에서 반드시 직면해야만 하는 것들, '나'의 균열을 초래한 트라우마를 만나게 될 때 비로소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와 대면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던 것이 공적인 맥락을 얻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은, 여성시가 대체로 시간이라는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시간에 대한 인식은 소외되고 억압당한 자로서의 자기 정당성을 개인적 역사를 다시 씀으로써 획득하려는 욕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여덟 편의 시에 각별히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김정란이 <구절리 바람소리>의 해설에서 지적한 대로, 이 시인에게는 자신이 이미 늦어서 도착했다는 인식이 일종의 전제조항으로 깔려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자신의 자리를 늘 세계내 공간에서 찾으려는 몸짓으로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이향지는 한사코 산으로 산으로만 가는 자신의 지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일정한 선에서 외면하고 있었던 셈이다. 난 이미 늦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 단 한 방에 해야 돼. 그러나 이 시편들에서, 그녀는 공간적 이동의 축을 시간적 회귀의 축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이 아니라 기억속의 집을 찾아가는 도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변모의 의의는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일단 그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향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온 여자, 할머니라는 이름 위에 설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에는 화해로운 설정이 아니었다. 함께 발표된 다른 일곱 편의 시들과의 유기적이고 서사적인 관련 안에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할 때까지, 단순히 생물학적 표지로 국한시킨 할머니라는 상황이 이 시인에게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늦었어요, 섬섬옥수/몽당비 되도록 길을 쓸며 걸어왔더니, 무서리/다음엔 된서리/다음엔 눈꽃 핍디다//탄식할 틈도 없이, 별별 백발이 다 날아와 꽂히며/흰눈을 뜹디다 --<星星>
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여자, 그녀가 늦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섬섬옥수" 가 "몽당비"가 되도록 "길을 쓸며 걸어왔"기 때문인데, 아마도 자신을 위한 길쓸기는 아니었다는 것이 "탄식"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인 '할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흰머리가 "하얀" "새싹"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에 올라가 "칼바람"으로 자르고 와야겠다고 할 정도이다.
이 산오름이 다소간 제의적인 성격을 품고 있다는 것은, 칼바람에 머리를 잘리는 것은 밤이라는 시간이며( 銀河에 머리 감고 까마귀를 날리며/'아침' 산을 내려갑니다), 이 밤에 바로 산 정상에 올라 우주와의 소통을 이루고 흰머리가 검은머리가 되는 형태적 변화를 얻는다는 구도를 통해 쉽게 감지된다. 그러나 이 제의는, 엄밀히 말해 제의의 모사본이다. 시인에게 자신의 늙어있음을 인지하게 하는 것은 "거울"이며, 그 "거울"이 이미 그 백발은 알고보면 "새싹"이라고 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는 전형적인 제의의 장소인 산을 찾아가고, 거기서 백발을 "까마귀"와 바꾸고 내려오지만, 거울 안에서 자기에게 말건넨 어떤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싹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산오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인 <거울을 가두고>에서 이러한 정황은 더욱 명료해진다.
산에 간다. 글쓰는 나, 옷 벗는 나, 쳇바퀴 속의 나, 권태와 벌거벗고 싸우는 나,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는 나, 내 전신을 가두던 거울을 골방 속에 가두고
이 기묘한 진술은 꼼꼼히 풀어볼 필요가 있다. 이 '나'들은 일상에 함몰되어 있는 내 전부이다. "거울"은 그러한 '나'를 되비출 뿐 실제로는 '나'를 규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거울 속에 갇혀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거울에 갇혀 있다면 집을 나가 산으로 가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거울 속에 가둬진 것이 맞다면, 거울을 골방에 가두는 행위는 '나'를 나 자신이 유폐시키는 것은 아닌가? 계속 읽어보는 수밖에.
산에 간다. 골방 문을 활짝 열어 내가 내다보던 창 밖을 내다보게 하고, 벗어놓은 옷, 젖은 머리칼을 훔쳐주던 타월, 발 닦던 융단 조각, 내가 남긴 물기들이 흐릿하게 물안개를 만드는 골방에서, 권태의 구름에 휩싸이게 하고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죽은 시간들은 이파리 하나 피워내지 못하고, …창 밖이 캄캄해지도록 내가 오지 않아 더불어 캄캄해지는 제 몸 바라보게 하고,
'나'는 '나'를 유폐시켰나? 그렇지 않다. '나'는 처음부터 골방 속에 있었고, 그러니까 미리 유폐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보여지는 자, 거울 속에서 살림을 차린 자이다. 거울 밖의, 산에 가는 '내'가 도리어 '나의 반영, 곧 그림자'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 나'는 기묘하게도 '퍼소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몸인 나', 즉 '나'라는 실체를 오히려 거울 속에 가두고, 산이라는 유사 신전에 가서 유사 젊음을 덮어 쓰고 내려오고 싶어하는 세속적인 '나'이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나'는 당연히 힘이 세다. 진짜인 '나'는 그가 돌려 세우는 대로 돌아서 있고, 그가 보라는 대로 보고, 그가 기다리게 하는 대로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 비추이는 대로 고스란히 보아야만 하는 존재로서 골방 안에 있을 뿐이다.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시간은 오래 흘러가지만, 그러나 진짜 시간은 죽어 있다. '나'와 '나'사이의 분열, '나'와 '내 몸' 사이의 불화가 시간을 죽인 것이다.
이 불화가 어디서 기인하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전신", 즉 온몸을 거울속에 가두고, 그것도 모자라 그 거울을 또 "골방 속에 가두고" 집 밖으로 떠도는 것이 이향지의 현재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불화가 없었다면 그녀가 "늦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섬섬옥수/몽당비 되도록" 길을 쓸고 또 쓸며 왜 왔겠는가.
이제 거울은 "날아오른다!" 기실 '나'는, 거울이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나'의 퍼소나는 "투쟁에서" 패배했고, 그가 패배한 진짜 이유는 거울 속의 내가 "미소짓게 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부터인가 유폐되어 거울에 갇히고 골방에 갇힌 내 "전신"이 제 "발목 자르고" 싶도록 간절해졌기 때문이다. 자정을 넘은 시각에 '나'는 돌아오지만, 대신 거울은 집을 나갔다. 새떼와 더불어 날아올랐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심리적 싸움이다. 어쨌든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나'라는 세속적 존재를 악착같이 할머니로 보아내는, 몸의 감각에 훨씬 충실한 그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에 가둬진 채로, 거울을 끌고, 새처럼, 날아오르다니?
이 이상스런 비행의 의미는 그 다음 시인 <창없는 겨울이 지나간다>에서 밝혀진다.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방향으로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의 축을 거슬러, 기억의 창고 속으로.
그러니까 한라산 꼭대기에서 젊음을 얻어내기 위한 모조품 제사를 지내던 할머니는, 골방을 박차고 날아오른 다음 진짜 젊음이 기다리는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젊음은, 그러나 과히 행복한 젊음은 아니었나보다. "창 없는 겨울", 출구가 없는 "길고 어두운 동굴".
이 동굴을 이향지는 닫혀 있는 여성적 공간으로 쓰고 있다. 성도 속도 아닌 박쥐가 "똥싸고 푸득거리는" 곳. 버려야 마땅한 여성적 자질들의 집합소. "창--집의 눈--이 없는 겨울"이라는 이미지로 포착되는 그녀의 삭막하고 버림받은 젊은 시절은 남성적 원리에 의해 여성적 원리가 철저하게 굴복당하던 시간이었나보다. 어머니는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모은 토막초로 날더러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시고(그래서 남자처럼 되라 하시고) 아무리 쫓아도 안 쫓아지는 박쥐는 아버지의 법인 불로 "쫓아야겠는데 성냥불은 이내 꺼"지고.
오래고 오랜 겨울이 지나간 다음 그녀는 겨우 동굴밖으로 나온다. 물구나무 서서, 완벽한 항복자의 모습으로 발가락에는 불까지 지르고. 매화꽃 만발한, 비로소 봄인 비탈밭에는 그러나 재냄새가 난다. "아무도 없는데"? 이미 창없는 겨울은 "지나갔"고, 박쥐들은 동굴에 가둬버렸고. 겨울도 견디고 더러운 여성성의 동굴도 빠져나왔는데?
그런데 그녀가 태워버렸던 것, 그 재는 무엇의 재일까? 내 열 개의 발가락, 또는 초가 지붕 아래 다시 모셔온 엄마?
이렇게 무서운 의문을 풀기 위해 아무래도 시인은 더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풍경의 저쪽>으로.
2. 할머니 집이 없으시다
몸 바꿔 바라보는 사이에 다리를 건너왔다. 왼쪽 옆구리에 붙어있던 중랑천이 오른쪽 옆구리에 붙어있다. 왼쪽에서 중랑천을 읽고 있던 왜가리가 오른쪽 중랑천을 뒤적거리고 있다. 오랜 가뭄으로 얇아진 중랑천. 왜가리의 두 발이 뒤적뒤적 뒷장을 들어올릴 때마다, 타는 모래의 말들이 중얼중얼 떠올라 하류로 간다.
시인은 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런데 가는 방향이 중요하다. 오른쪽에서 출발하여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 방향의 상징주의는 맨 마지막 시에서도 한 번 더 나타나면서 이것이 단순한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오른 쪽이 표상하는 질서잡히고 위엄있는 세계, 우리가 간단히 아버지의 세계라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쉽게 거부해 버릴 수는 없는 그 세계로부터 왼쪽이 표상하는 바 이향지로서는 되돌아가기 쉽지 않은 어떤 고통스런 기억을 포함한 여성적 자질들의 세계로 이동중임을 드러내 준다. 과연 우리는 다리 위에서, 다리를 건너며, 이향지에게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종교적 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의 성경, 불의 아버지, 날개교의 순교자, 불새들의 비상 같은 이미지들은, 물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상징이라기 보다는 시인 자신의 말마따나 "몸바꿔" 바라본 비유에 불과하지만, 그 이미지들의 작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다리 건너감의 주제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종교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충분히 시사해 준다. 다리를 건너는 것은 곧 존재를 변화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집없는 기억>은, 다리를 건너 풍경의 저쪽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겉으로는 가난해서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이사다니던 기억이지만, 안으로는 안주할 곳을 얻지 못한 기억이 된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넓은 길은 좁아지고/
(중략)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한번 좁아진 길은 몇 번을 꺾어 돌아도/넓어지지 않고/
(중략)
장롱에 딸린 거울은 쓸데없이 커다란 하늘을 담고
이 구비구비 도는 모퉁이는 분명 "길고 어두운 동굴"(<창없는 겨울이 지나간다>)의 변형이며, "장롱에 딸린 거울"은 골방에 갇힌 거울의 갇히기 전의 모습이다. "축 늘어진" 아이를 업은 아줌마가 된 시인은 거울속에 가두어진 할머니와 동굴에 갇힌 어린 소녀를 리어카에 싣고 살 집을 찾아간다. 이 찾아감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씩 되풀이된다("일곱 번 리어카를 따라가니 조그만 기와집"). 일곱 번은, 실제로 리어카 일곱 대 분량밖에 안 되는 가난뱅이 살림을 뜻할 수도 있고 일곱 번씩 이사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실제가 어떠했건지간에, 일곱 번이라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다다른 조그만 기와집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제목은 <집없는 기억>이다. 집이 없는 이유는 이 집이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셋방살이니까 내 집이 아닌 것은 당연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에서, 시인은 자신에게 집이 없음을 '기억'해 낸다. 이 '기억', 말하자면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자의 운명을 이미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집을 나간 할머니는, 자신의 실존이 갇혀 있는 거울을 깨고자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지만, 만나는 것은 '집없음'이 이미 '기억'으로 새겨진 자신의 운명이다. 그러나 사람이 집 없이 살 수 있을까? 이번에는, 리어카라는 외적 레퍼런스가 아니라 마음 저 깊은 곳에 자리잡은 기호 하나가 '나'를 데리러 온다. "깊은 우물", 이 우물 곁에 있던 지은 지 88년이나 되는(말하자면 거의 태초부터 있던) 집,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란" 단감나무가 있던 집.
이 집에서 시인은 '할머니'로서의 자아의 원형인 "노파"를 만난다. 사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어머니인 '노파'는 소외된 존재이며(米壽에도 생일 상을 받지 못한 볍씨 한 톨), 낡은 기억 쪽으로만 창을 열어두는 퇴행적 존재이다(단감나무 자리에는 작은 창이 있는 방을 만들어/밤마다 불빛을 걸어둔다).
현실의 어머니와 거울에 갇힌 시인의 진정한 자아인 '할머니'는 시인의 마음속에서 뒤섞인다. 이제 왜 세속적인 '나', 나의 퍼소나가 '할머니'를 거울 속에 가두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의 어머니,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가족들이 버린 어머니.
깊은 우물이 말라간다/아무도 돌보지 않는 낡은 집이 기우뚱하다/수 십 년 된 요강을 방문 밖에 갖다놓고/돋보기와 틀니를 손닿는 곳에 두고/전화기를 바짝 당겨놓고 누웠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여성성의 원형으로서 바로 "깊은 우물"이 아닌가? 그리하여 바로 '내'가 찾아가려는 그 '집'이 아닌가? '노파'야말로 시인이 획득해야만 하는 진정한 여성적 자질의 소유자이며, 시인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이미 '깊은 우물'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 '노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나?
이것은 일종의 상처다. "창없는 겨울"의 계절에, '나'에게 토막촛불을 모아주던 어머니에겐, 그 자신의 세계수인 단감나무--문맥상으로 보아 세상을 떠버린 아들--가 이미 있다. 죽어버린 단감나무, 그러나 나에겐 "창"이 없는데, 이 단감나무에겐 "작은 창이 있는 방"이 주어진다. 어머니가 그 방을 만들어 "밤마다 불빛"까지 걸어둔다.
여성에 의해 여성이 거부당하는 기억--우리 모든 딸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러나 한 번도 기억 바깥으로 불러내 '현존'시키지 않은 이 거부의 경험이, 아들들처럼 그렇게 쉽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늙은 여자에 대한 상처가, "말라가"는 "깊은 우물"을 내버려두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 "낡은 집이 기우뚱"하도록 옆으로 밀어내게 된다. "방문 밖"의 오래된 "요강"처럼.
그러나 되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우물'이자 '요강'이 아닌가? 온갖 가부장들의 더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그 물을 길어 밥도 짓고 빨래도 하며 "가슴"만 "타"는? 모든 여성들의 한 그 자체인? 그랬군. 이제 시인은 마음이 바쁘다.
깊은 우물을 찾아간다
가도, 가도, 길이 멀다
<창없는 겨울>을 깨고 내가 빠져나올 때 남긴 재는 바로 내 어머니의 타버린 가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시인은 감추어진 기억을 더듬어 비로소 알게 된다. 늙은 어머니는, '노파'는, 말하자면 '할머니'는, 그 오래된 상처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비로소 시인 자신 속으로 불려들어온다. 아버지의 반듯한 "집"은 없지만, 대신에 어머니의 "깊은 우물"이 있지 않은가? 아니, 이미 할머니인 시인 자신이 바로 그 깊은 우물이 아닌가!
3. 할머니 없는 집에 계시다
이렇게 하여, 기억 저편에 감춰진 그 무언가를 불러내는 데 성공한 이향지에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거울 속에 '나'를 가둔 '또 다른 나'와의 화해이다. 아니, 화해 이전에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며, 그 존재와 만나는 일이다.
이러한 내적 사건을 우리는 어려운 말로 '타자와의 대면'이라고 쓴다. '타자'.
분명 '나'인데, 어떻게 그 '내'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지만, 이향지는 그 낯섦을 수납하기로 한다. 거울 속의 할머니, 그 할머니는 바로 잘 살고 싶어하는 사회적 자아인 내가 골방에 가두어 놓은 존재이고, 말라가도록 내버려둔 우물이며, 허물어져 가는 내 존재의 진정한 집이었던 거다. 그러니 집은 바깥에 있지 않다. 내 안에, 내 존재의 더그매, 그 좁디좁은 방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이향지는 <더그매>에서, 그를 "나의 천장. 천장 위의 천장"이라고 쓴다.
내 천장 위의 천장, 그의 속은 캄캄한 어둠. 그에게로 가는 길은 멀다. 24개의 계단을 올라간다.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좁은 통로를 따라간다. 딱딱한 외벽에 닿게 된다.
빗방울과 쥐 오줌이 얼룩을 만드는 얇은 천장 아래, 아기 기저귀를 가득 널어놓고 다른 냄새를 조금씩 알아가던 때―. 그때는 어렴풋하던, 내 머리 위의 심연.
'나'는 그를 본다. 아직 "그의 속은 캄캄한 어둠"이지만, 말하자면 깊어서 속이 안 들여다보이는 "깊은 우물"이지만, 이제 그 "심연"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다. "내 머리 위"에. 비록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처럼 보이지만, 나는 "좁은 통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계속 좁아지기만 하던 골목(<집없는 기억>)을 따라 집 아닌 집에 도달한다. "그"가 있는 곳에.
24개의 계단은 "24시간의 등불"이다. '그'와 '나' 사이엔 "몇 억 년의 시간"이 가로막고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내 일상의 시간 위에 그는 언제나 겹쳐서 흐르고 있다.
그가 내 등불을 들고 있다. 그가 내 24시간의 등불을 들고 있다. 그가 내 24시간의 등불을 고통스럽게 들고 있다. 어둡고 어지러운 線들은 모두 자신 안에 가둔 채, 깔끔한 천장과 빛은 모두 내 쪽에 둔다.
과연 그렇다. 그는 내 안의 타자, 내가 깔끔하고 밝은 쪽에서 살아가기 위해 골방에 처박은 그 불쌍한 여자다. <거울을 가두고>에서 '내'가 가두는 대로 갇혀 있던 이 타자는, <더그매>에 이르면 '나'를 위해 자발적으로 소외된 자로 나타난다. 이향지의 미덕은, 이 타자와 섣불리 하나가 되려 하지 않는 점이다. 마음이 그렇게 흐를 그때까지, 이 "그"가 사실은 "나"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이향지는 마지막까지 3인칭을 고수한다.
이것은 또 다른 소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 골방에 처박힌 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 "함께 어두워지는" 일이며 동시에 "위"를 향한 도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詩로 쓴다. 함께 어두워지기를 그는 얼마나 비는가!
<그림자의 언덕>은, 지금까지의 시간여행--다른 말로 하면 내면을 향한 도정--이 도달한 지점을 보여준다. 편의상 좀 길긴 하지만 시 전문을 인용해 보자.
지나간 것들―, 지나간 것들의 그림자―, 혹은
지금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그림자일 수도―,
언제였는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새벽에 내가 본
그림자 사람들, 그들이 침묵으로 오르고 있던 왼쪽이 더 높은 언덕
모자 달린 만티카 자락 발목까지 치렁거리며
언덕을 오르는 세 사람―, 앞사람은 잠깐 사이에
커다란 보퉁이였나 보다. 뒤에 선 사람은 잠깐 사이에
칭얼거리는 아기였나 보다, 가운데 선 사람은 잠깐 사이에
앞에 섰던 보퉁이를 이고 뒤에 섰던 아기를 업으려고 언덕에
쭈그려 앉았나 보다. 둥글고 환한 빛이 중세의 수도승 같은 사람들
그림자를 가두고 한쪽 측면만을 투명하게 비추다 이내 캄캄해지던 것
그리고 또 한사람―, 가장 나중에 오르던 사람―,
저 아래 쪽 숲에서부터 아주 밝은 랜턴을 들고, 줄기
위에서 쉬고 있는 빛깔 없는 구름들을 흔들흔들 비춰보며
구불텅거리는 숲길을 올라온 사람. 지나간 사람들을 찾으러
왔다고 생각되던 사람. 그 역시 수도승처럼 검고 긴 만티카 차림.
랜턴 빛으로 나를 잠깐 비추며, 무엇인가 묻던 사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언덕 쪽으로 돌아선 사람. 이내 희미해지고 숨죽이던 빛
그날 그 새벽 숲에서―, 어두운 새벽 숲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았다. 이 숲에선 내가 다만 바라보는 者라는 것도―,
나는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을 듣는 者라는 것도―,
이 종착지에서, 시인은 이 장소의 이름을 "그림자의 언덕"이라고 지어준다. 그림자라는 이미지는 처음부터 되풀이하여 등장하는 "거울" 이미지를 업고 볼 때 그 뜻이 선명해지는 이미지다. 거울에 비친 것, 아, 지금은 희미한 것, 그러나 언젠가는 뚜렷이 보일 그것. 그 장소가 그림자의 언덕인 것은, 이것이 시인의 내면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상에는 없는, 한라산도 금강산도 아닌 곳, 구절리도 토말리도 아닌 곳, 기억 속에만 있는 장소.
그런데, 이 '기억'은 어쩌면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기억일 수조차 있다. 그 때문에 시인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언제였는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어느 "새벽"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깊은 내적 단일성으로부터 길어올려지는 깊은 우물물의 기억은, 반드시 내가 체험하지 않아도 나의 내면을 충만하고 풍요롭게 해 주는 오래된 기억이다. 다만, 그 언덕에 가 닿기가 그토록 힘들 뿐.
이 시는 형태상으로도 대단히 암시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그들"--이 그들이 누구인지는 잠시 후에 알아보기로 하자--은 "왼쪽이 더 높은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독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며 읽게끔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의 내면적 자아가 이 언덕을 오르는 일의 의미를 인식해가는 과정을 시인의 현실적 자아 또한 의식화해 간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연에서 등장하는 세 사람--비록 그들이 모자 달린 만티카 자락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 누구인지 볼 길 없지만, 우리는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 맨 앞 사람은 "보퉁이", 단감나무 옆 작은 방에 매달린 단감 같은, 바로 그 "노파"의 변형이다. 맨 뒤의 "아기"는 <창없는 겨울>에서 "길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린 젊다 못해 어린 여자이다. 그리고 그 둘을 이고 업고 언덕에 쭈그려 앉은 가운데 사람은, 없는 집을 찾아 골목을 돌고 돌던 아줌마 시인이다. 셋이지만 한몸이 된 그들, 이들은 흡사 중세의 수도승 같은 이미지로 제시된다. 상처로 각인된 개인적 기억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보편적 기억의 제사에 등장인물이 된 것이다. 섬광 같은 둥근 빛 속에서 잠깐 '나'에게 계시되고 그들은 이내 "캄캄"해지지만, 3연에 이르면 마침내 "빛"을 든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아주 밝은" 빛을 이미 들고 있으므로 어둠 속에 있지 않다. 앞의 세 사람을 종합하며, '나'의 새로운 파트너로서 내 내면에 발생한 그 인물은 내게 말을 걸어오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나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가 있는 자리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날 그 새벽 숲에서―, 어두운 새벽 숲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았다. 이 숲에선 내가 다만 바라보는 者라는 것도―,
나는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을 듣는 者라는 것도―,
이렇게 해서 이 길고 긴 마음의 여행은 일단 끝이 났다. 할머니이자 젊은 여자이며 그 이상의 무엇, 오래된 어둠이기도 하던 여러 겹의 '나'는, 아무 곳에도 없지만 내 안에 있는 자아의 집인 새벽 숲에서 진정한 내 타자와 만나고 헤어진다. 행복한 결말.
이향지의 시간 여행은,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번은, '자아'라는 진짜 집을 얻기 위해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기억' 안으로 가는 길을, 그 방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돌아감이, 그리고 그 길을 보여주는 일이 왜 중요할까.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은폐되거나 위장되었던 '기억'은, 언어에 의해 드러나므로써 비로소 '존재'를 얻는다. 이향지 식으로 말하면 랜턴을 들고 비추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억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불완전하다고 나는 느낀다. 기억은, 그 기억을 불러내 지금 이 시간에 세우려는 언어적 노력 없이는, 아니 바로 그 '언어'가 없이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 '현존', '지금 여기' 있는 그것 없이는 우리 모두는 존재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제의적 여행이 다시 되풀이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이고 '내'가 불행할 때, 내 거울에 또다시 갇힌다고 느껴질 때, '다시' 새벽숲으로 돌아오리라. 그 돌아옴에의 예감을 담고, 시는 쉼표로 닫힌다. 그러니까 완전히는 닫히지 않는다.
시간을 축으로 한 여행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우리는 방금 이향지의 시를 함께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여성시인들이 이러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거듭 떠나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선 주제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덧붙이고 싶다. 그곳이 <이 완벽한 세계>이든, <별>이든, <그림자의 언덕, 또는 새벽 숲>이든, 시인들은 혼자 가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여행이 비록 우리가 방금 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 해도, 한 시인이 말길을 내어주면 따라가는 사람들은 훨씬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향지의 시가 우리에게 해 준 그 일이다.
(현대시·199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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