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령 동쪽 기슭에는 조가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가구수라야 불과 13-15세대.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에서 유래한 이름 같다. 지금도 조씨들만 사는 지는 모르겠으나, 골짜기 이름조차 조가동골인 것을 보면 조씨들이 자리잡은 지 꽤 오래된 곳인 것 같고, '조가'라고 하대한 것으로 보아 양반 계급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산경표 같은 고문헌들에는 한결같이 '趙哥嶺'으로 나와 있는데, 조선총독부 제작 근세 지도에는 '曹哥嶺'로 표시되어 있다. '趙哥'가 '曹哥'로 바뀐 것이 붓대 든 사람의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백두대간 종주자에게 있어서 '조가령'이란 고개이름은, 혜산-무산 경계의 '최가령(崔哥嶺)'과 함께 별난 지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조가령에서 봉수봉으로 오르는 길은 울퉁불퉁하고 가파르다. 봉수봉이란 말 그대로 봉수대가 있던 곳.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먼 곳까지 신호를 보내려면, 높직하면서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그야말로 사방이 일망무제로 트이고 우뚝한 봉우리여야 했을 것.
조가령 일대는 영마루의 서쪽과 동쪽이 모두 풍산군에 속했으나, 분단 후 행정구역 개편 때 분리하여, 대간의 동쪽 지역은 함경남도 허천군, 서쪽 지역은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바뀌었다. 행정지명은 바뀌어도 산줄기는 그대로다. 이 땅의 이목구비가 완성될 때 함께 완성된 산줄기. 우리는 그 길 하나 믿고 이 길을 간다.
조가령 서쪽 계곡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봉수봉 비탈을 올라간다. 30분이면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1시간이 가깝도록 가파른 비탈은 고개 숙일 기미가 없고, 햇살은 어느새 정수리에 화덕을 올려놓는다. 갈수록 햇살은 뜨거워지고 땀은 흐르지만, 천천히 오를수록 정드는 게 산길이다. 길옆의 바위며 나무들이 전해주는 세월의 향기, 잊을만하면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 맡으며 느릿느릿 올라간다.
봉수제도는 전근대적인 통신수단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유는 왜구의 내습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 봉(烽)은 밤에 쓰는 횃불을 뜻하고, 수(燧)는 낮에 쓰는 연기를 뜻한다. 봉수도 아무렇게나 올리는 것이 아니라, 거화법(擧火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규정대로 올렸다. '무사할 때'는 1거(炬), '해안에서 적이 바다 위에 나타나면' 2거, '적이 해안에 접근'해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을 하면 4거, '우리 군사와 교전'을 하면 5거를 올렸다.
국토의 동서남북 최 말단에서 임금이 계시는 서울까지 릴레이식으로 전달되는 시간은 무려 12시간. 비상상태에 대비한 군사목적으로 설치된 봉수제였지만, 봉수군(烽燧軍)의 태만으로 아예 거화를 않거나 때를 놓쳐 시일이 오래 걸리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봉수꾼들에게 내리는 형벌도 무거웠다. '적이 나타났을 때 거화하지 않은 경우' 봉수군은 장(杖)80, 수령이나 진장(鎭將)은 70대를 맞았다. '적이 가까이 왔는데도 거화치 않으면' 봉수군은 장 100대를 때린 후 변방기지로 추방, 수령이나 진장은 역시 장 100에 파직을 당하고 다시 기용되지 못했다. '적과 접전했는 데도 거화하지 않으면' 봉수꾼도 수령도 진장도 모두 목을 베었고, '사변이 있는 데도 봉화를 못쓰게 만든 경우' 감고(監考)와 수령 모두 장 100대씩, '적이 침략했는데도 보고하지 않은 경우' 봉군과 색리(色吏) 모두 참수했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방법에 국방을 의탁하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우리나라 국방상태는 그런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봉수봉분기점에서 생각한다. 저 봉수봉 꼭대기에서 보초를 서던 봉수꾼들 중, 한눈 팔다 곤장 맞고 변방으로 쫓겨가거나 참수 당한 군졸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 또한 전근대적인 시대의 희생양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분들이 있었기에 이만한 터전이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 묵념이라도 올려 가여운 선조들의 명복을 빌었다.
1,362m봉에서는 부채살처럼 펼쳐지는 산세에 마음도 활짝 펼쳐진다. 1,390.3m봉까지 휘영청 휘어 도는 능선 남쪽은 암릉이 아름다운 곳. 조가동 쪽에서 올려다볼 때는 환상적이더니, 내려다보는 경치는 아찔하다. 1,390.3m봉 정상에서는 아는 길도 물어가자고 지도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고 지도 정치를 했다. 짧은 비탈을 내려서니 펑퍼짐한 언덕이 등허리를 내밀며 손짓한다. 능선 동쪽에서 삐죽거리는 암릉 아래는 절벽.
좌(左) 평원 우(右) 절벽 사이에 우리가 가야할 외줄기 길이 있다. 감자며 옥수수며 배추며 무, 식탁에서 자주 대하던 먹거리들이 햇볕 속에 키를 세우고 초록초록 흔들리는 모습에 취해, 몇 차례 마루금을 벗어났다.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 고도 1,500m가 넘는 고지대 산등성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구름은 희고 가볍다. 펑퍼짐한 육산들은 싱싱한 풀밭을 차려놓았다. 양들의 식사는 느리고 평화롭다. 솔갈덕, 조병덕, 노가덕, 푸장덕, 신흥덕…. 이 일대의 지명에서 '덕(德)'을 빼면 뼈다귀 같은 산 이름들만 발에 걸릴 것 같다. 거의 모든 곳이 '덕'과 인연을 맺고 있다. '德'이란 만주어(여진어)로 '산꼭대기가 평탄한 산' '언덕 닮은 산'의 뜻이다.
이 일대 산간지대는 고구려의 멸망으로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700여 년을 여진인들이 살던 곳이다. 전쟁과 평화의 와중에서 귀화한 사람도 많았다. 하나 하나 다 캘 수는 없지만, 이 일대의 지명들이 그들의 언어와 어찌 무관하겠나.
황토령(黃土嶺)으로 올라서는 순간, 나를 찾아온 말은 '산꼭대기 위의 운동장'이다. 어디가 정점인지, 뚜렷하지도 않다. 나무들은 산머리를 등지고 키를 낮추고, 풀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누웠다. '드넓다'는 말은 이런 곳을 묘사하기 위해 생긴 것이리라.
황토령 동쪽은 영성동(嶺城洞)인데, 영성동 비탈 갈림길목에는 '황토파(黃土坡)', 또는 '황토기보(黃土岐堡)'라 부르던 보루가 있었는데, 조선조 철종 때 영의정 정원용이 건의하여 없애버렸다 한다.
보(堡)는 토석(土石)으로 쌓은 '작은 성보' 즉 보루(堡壘)를 뜻하며, 주로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지대에 쌓았다. '기(岐)'는 갈림길에 있는 보(堡)에 붙던 글자, '파(坡)'는 땅이 경사진 모양, 또는 경사진 곳을 뜻한다. 그러므로 '황토기보(黃土岐堡)'란 '황토령 비탈 갈림길에 세워졌던 보루'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堡)에는 교두보(橋頭堡), 둔보(屯堡), 망보(望堡), 봉보(烽堡), 성보(城堡), 영보(營堡), 전보(戰堡), 초보(哨堡) 등이 있었는데, '황토기보'는 위치로 보아, 통행인이 잦은 길목에 세워졌던 둔보(屯堡)나 초보(哨堡)였을 것이다.
황토령 비탈에 세워졌던 '황토기보'를 없애버린 것이 철종 원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알길이 없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북로연혁고(北路沿革考)'를 보면 …마운령 동쪽에서 100여리를 가면 이른바 사발령이 있어 길주로 통한다. 고개 서쪽으로는 올족보(兀足堡)·쌍청보(雙靑堡)·황토파(黃土坡)·여동보(黎洞堡)·덕만동(德萬洞)등지가 사방 수백 리다. 여기가 바로 윤관이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다.'는 대목이 있으니, 여진과 강역을 다투던 고려 시대의 것이 아닐까.
저수지 둑방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 뛰어다닌 적도 있다. 황토령에서 까치령까지의 길이 바로 그렇게 생겼다. 높직하되 그 위를 걷고 있으면 고도를 알 수 없는 땅. 뚝방 위의 신작로. 저 아래 골짜기에서 우리가 걷는 능선을 올려다본다면 까마득한 고도일 것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 신흥덕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어제 걷던 길을 이어서 걸은 것밖에-.
흰새봉은 고도가 1,908.9m. 그러나 우리는 해발 200-300m 짜리 언덕 위에 올라선 느낌이다. 모든 지대가 다 같이 높은 땅에서 계속 걷다보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낮은 땅이 오히려 낯설어지지나 않을까. 까치령에 내려서니 까치가 운다. 저녁까치 산까치. 까치야, 우리는 아직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우리를 태우러 올 차는 동점령에서 기다리기로 했거든-.
[제25구간], 덕(德)! 보(堡)! 파(坡)! 기(岐)! 봉수(熢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