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길들이 실체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기쁨에
제26구간 까치령∼남대령∼안장령∼동점령산∼동점령
이향지
까치령은 황토령이나 동점령에 비해 외지고 작은 고개다. 짐수레 두 대가 마주 비켜가기도 어려울 만큼 폭이 좁은 비포장도로. 통행인도 뜸하다. 그러나 국경지대 삼수·갑산 사람들이 동해안 자반 고등어라도 구경을 하려면 허천 땅 남대천 줄기를 거슬러 올라 이 고개를 넘어야 했으리. 동남쪽 기슭을 타고 내려가, 버스가 들어오는 도창까지 나가려면 어림잡아 17∼18km. 반대편 갑산 땅 양류리 삼거리까지도 6∼7km가 넘으니, 우리는 남으로도 북으로도 마을로는 내려가지 못하고, 소달구지나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고갯마루를 가로질러 남대령 찾아 넘어간다.
까치령과 남대령. 고갯마루와 고갯마루 사이에는 넘어야 할 산봉우리가 셋이나 된다. 빤히 쳐다보면서도 휘어 도는 길이라, 첫 번째 봉우리 오르는데 1시간을 들였다. 힘들게 정복한 봉우리에는 좀 더 머물고 싶다. 키 작은 풀 더미 위에 배낭 벗어 던져 놓고 북쪽 갑산 쪽을 향해 앉았다. 언제 심은 나무들인지 푸릇푸릇 살이 오른 초록 언덕 아래로 진동천 푸른 물굽이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내 목덜미를 끈끈하게 타 내리는 땀 줄기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저렇게 반짝일 것인가. 저 강물 따라 서쪽으로 50여 리를 가면 갑산(甲山)이라는 마을이 있다. 갑산에서 서북쪽으로 다시 100여 리를 가면 삼수(三水)라는 마을이 있다. 얼마나 외지고 궁벽한 곳이었기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란 속담이 생겨났을까? 여간 큰 결심을 않고는 내릴 수 없는 결정에 우리는 흔히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란 수식어를 앞에 붙인다. 성공과 평화와 안녕을 기약할 수 없는 불확실한 땅. 변경의 진지로 수자리 살러가던 장정들이나 생이별의 슬픔을 꼭꼭 누르며 찾아들었을 땅. 그토록 깊숙한 내륙에 솥 단지 걸어놓고, 사방을 콱 막은 산줄기 바라보며 한숨쉬며 지냈을 사람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그런 오지는 없다.
자동차란 괴물이 등장하면서부터 산허리도 잘리고 길도 넓어졌다. 흙먼지 풀풀 날리며 드나드는 바퀴자국에 길바닥은 갈수록 단단해지고, 그 단단해진 길을 따라 문명과 부의 먼지까지 덩달아 날아든다. 우리들 마음속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유배지처럼 여겨지던 삼수·갑산도 이제는 막다른 변경의 오지가 아닌 것이다. 등짐 지고 봇짐이고 다리 끌며 찾아가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흔들리는 트럭 짐칸이라도 얻어 타고 스쳐 가는 산천을 내다보며 축지법을 행하듯 찾아가는 마을이 되었다. 삼수·갑산은 물론이고, 삼수갑산을 거치지 않고는 도착할 수 없었던 압록강변. 국경마을 혜산은 오히려 번화해 졌다. 그러나 백두대간 이 기갈 찬 산줄기를 걸음걸음 걸어서 올라야하는 우리에겐 만나는 곳마다 오지다. 마을과 물을 먼 곳에 두고 걸을수록 목마름에 시달려야하는 고통이 출발선에서부터 우리를 지배하지만, 사람의 흔적이 뜸한 산줄기에서 오히려 싱싱해지는 것이 자연인들의 생리.
두 번째 봉우리는 곡선이 완만하고 살찐 언덕이다. 내 시선은 자연히 등 뒤쪽의 가파른 땅보다는, 완만하고 평화로운 구릉지대를 향한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환한 빛살을 쏟아 붓는다. 눈부셔라. 잠깐 쉬어가자고 드러누운 머리 위에서 흰 구름은 온갖 생(生)의 무늬를 다 그려 보인다. 가을이구나. 또 한번의 가을이 갖가지 무늬의 구름 떼를 몰고 와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흔들어놓고 있구나. 바람이 좀 더 빠르게 흐르는 날이었더면 관절마다 들쑤시는 피로의 몇 퍼센트라도 날려보낼 수 있으련만.
세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삼각점이 있다. 삼각점 위에 지도를 놓고 지도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고 가야할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은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앞산 모퉁이를 꿈틀거리며 돌아나간다. 보일 듯 말 듯 언덕을 내려가는 저 길. 저 가는 길 발치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오늘 저녁을 안장령 부근에서 묵을 수 있을 것이다.
'해와 달은 첩첩한 봉우리 사이로 밝은 빛을 감추었는데, 우레처럼 울리며 번개처럼 달리는 것, 몇 구비 여울이더냐, 조각 만한 하늘 몇 자[尺] 안 되는 땅위에 외로운 성이 있으니 맑은 술 누른 꽃으로 한번 얼굴을 폈노라(동국여지승람, 갑천도호부 편)' 하연(河演)이라는 사람은 삼수갑산 오지를 찾은 고독을 이처럼 노래했지만, 오늘 밤 우리가 머물 곳은 강물 소리도 지붕도 먼 곳에 있는 풀 더미 속일 것. 그러나 우리는 성안의 맑은 술이 안겨주는 포만한 취기나, 성곽 안 누런 꽃이 전하는 허약한 향기의 위로 따위엔 연연해 않는다. 상상 속의 길이 실체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기쁨에, 무수히 매료되어 보았으므로….
1,875m봉 안부로 내려서니 더 걸을 수가 없다. 열 이레 달빛 아래 풀빛 텐트를 세웠다. 밤이 깊을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낮에는 여름을 살고 밤에는 겨울을 산다. 저녁나절에 잠깐 가을을 스쳤을 뿐. 고개 젖혀 별을 헤아릴 여유도 낭만도 먼 곳에 있다. 내일 아침에 올라야 할 동점령산이 거대한 성곽처럼 앞을 가리고 있다. 산은 절대로 마중오지 않는다. 거대할수록 더더욱. 우리가 걸어서 저 산을 넘고 우리가 걸어서 저 산을 이별하리. 눈이 내리기 전에, 눈과 얼음이 우리의 길을 아주 덮어버리기 전에, 이 질기고 질긴 길의 끝을 보아야 하리. 걸어서 길 끝을 보아야하는 사람은 날개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솜바지에 우모복까지 겹쳐 입고 텐트 속에 웅크렸다. 밤이 되면 번데기처럼 길 위에 웅크렸다가, 아침이 오면 자벌레처럼 산줄기를 기어오르는 나날. 대지로부터 피어오르는 쌀쌀한 기운. 이 높은 곳까지 따라와서 쓸쓸쓸 울어대는 가을 풀벌레소리. 저 벌레들은 제 다리와 날개를 마주 부벼서 저처럼 소리를 낸다지. 삭정이를 마주 부벼 모닥불을 일구듯, 혼신을 다한 마찰음을 인간들은 단순히 "운다"는 말로 표현하지. 저 벌레들이 제 육신의 한 끝이 닳도록 울어, 긴 밤의 어둠을 밀어내며 제 존재를 증명하듯, 우리는 걸어서 우리의 길을 증명하려는 것. 거대한 산, 거침없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웅크려지고 왜소해지던 마음이, 작은 벌레들이 불일 듯 일구는 소리에 커다란 위로를 받고 기력을 회복했다.
안개 속으로 길이 간다. 다가가면 흩어지고, 뒷걸음치면서 다시 짙어지는 안개. 새벽길 한 가닥이 우리를 끌고 안개 속을 가고 있다. 안개는 부드럽고 우리는 터벅거린다. 안개 속에서 흐느끼듯 우는 고압선. 안개 속에서 나와서 안개를 흩어놓고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가기를 되풀이한다. 길이, 아니, 우리가. 고압선 그늘을 터벅터벅 두 번 가로질렀다. 안개가 차츰 엷어져서 건너편 길이 보일 때쯤 우리는 안장령 마루턱에 섰다. 안장령은 동점령산 비탈에 있다. 동점령산 비탈을 깎아 뚫어놓은 우마차길이다. 안장령도 남대령처럼 갑산땅 남대리와 연결된다. 안장령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1,899.3m봉이 대간 남쪽으로 삐죽 내밀고 앉아있어서 멀리서보면 말안장같이 보인다. 그래서 고개이름도 '안장령'으로 붙인 모양이지만, 안개 속을 뚫고 새벽산을 걸어온 우리에겐 느낌으로만 남았다.
동점령산 정상에 서니 오전 7시 20분. 아침 해먹기 꼭 좋은 시간이다. 해발 2000m가 넘는 큰산을 뒷산 오르듯 했다. 모든 땅이 골고루 높은 고원에서는 산의 높이 또한 평가절하 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동점령산은 정말 큰산이다. 오를수록 너그럽고 풍만해지는 산세는 내 걸음의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 느릿느릿 움직이고 느릿느릿 생각하자. 오늘은 동점령까지만 가기로 했으므로 엉뚱한 꿈을 잠깐 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둘러앉아 아침을 끓이고 먹는 사이에 풀밭에 햇살이 퍼진다. 햇살이 퍼지면서 이슬이 마른다. 수풀 속 텐트 속에서 웅크리고 잔 피로도 스르르 풀려간다. 이렇게 머뭇거리다 햇살처럼 퍼질라. 풀잎에 숟가락 닦아 넣고 다시 배낭을 진다.
'맑은 물 푸른 산 몇 만 겹이냐, 구름과 연기 가리고 서리어 있는 듯 없는 듯 한속이네, 백성들 다만 스스로 밭 갈고 우물 파는 것만 알아서 그 순박함은 의구하게 태고적 풍속일세. (동국여지승람)' 살찐 언덕을 내려가며 읊어보는 정흠지(鄭欽之)의 시는 겉보기엔 갑산 민초들의 삶을 평화롭게 껴안고 있는 듯 하지만, 스스로 밭 갈고 우물 파지 않으면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을 민초들의 절박한 삶에는 끈을 잇지 못하고 있다. 옛날 양반들 글줄께나 하던 선비들은 스스로 우물파고 밭갈이하지 않아도, 경치 좋은 정자에 앉아 붓방아만 찧어도, 때 맞춰 배부르고 유유자적 할 수 있었겠지만, 삼천리 강산을 헤매어도 제 땅 한 뙈기 없는 민초들은 스스로 우물 파고 밭 갈아도 언제나 허기에 지쳐 살았던 것을….
갑산이 궁벽한 산촌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벽처럼 둘러선 산 속에 다량의 구리가 묻혀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가 아닐까? 그 대표적인 것이 갑산동산이다. 갑산동산은 북한 최대의 구리광산(銅鑛山)으로, 황동석과 반동석이 주로 생산된다고 한다. 갑산동산을 처음 개발한 것은 조선조 고종 19년이던 서기 1872년 청나라 사람 강진광이라 한다.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닌 청나라 사람? 이 지역이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오랫동안 여진의 수하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갑산동산(甲山銅山)은 동점령 바로 서쪽 산을 말한다. 갑산동산의 어깻죽지를 파며 동점리로 이어지는 길이 바로 동점령인 것이다. 갑산동산에서 동점령을 넘어서면 허천군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큰 고개 하나만 있어도 벽촌과 해변의 물산을 교환하기가 훨씬 수월한 법. 이 고개를 넘어 얼마나 많은 옥수수 귀리 감자와 짐승 가죽이 해변으로 갔을까? 이 고개 넘어 얼마나 많은 건어물 해초들이 삼수갑산으로 갔을까?
동점령에 내려서니 오후 3시가 가깝다. 해발 2000m를 넘는 산에서 내가 본 것은 산이 아니라 드넓은 풀밭이었다. 나무들이 스스로 키를 낮추는 능선을 지나, 완만한 능선처럼 느릿느릿 걸어서 도착한 고갯길. 시간 속에 묻혀있던 청동거울이라도 찾은 듯 내 마음이 먼저 옛길을 본다.
[제26구간], 상상 속의 길들이 실체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기쁨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