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으므로 우리가 간다. 달구지가 지나가고 트럭이 지나가고 시외 버스가 붕붕거리며 동점령 고개를 넘어가고 흙먼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우리가 가로지른다. 우리의 길은 길 따라 가는 길이 아니다. 길을 버린 곳에서부터 산이 시작되는 법. 황철나무잎새들이 재잘거리는 바람 속으로 새 한 마리 훌쩍 밀어 올리듯, 가볍게 올라설 수 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동령까지 가서 주저앉아야 한다고 김봉관씨와 이도윤씨는 재촉하지만, 길이란 마음이 걷는 게 아니라 몸이 걸어야 줄어드는 법. 갑산동산 언덕배기에 천근같은 육신을 앉혀놓고 대답만 예! 예! 수십 번도 더했다.
내 엉덩이 아래 땅속에는 광맥을 찾아 뚫어놓은 터널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을 것인데, 오손도손 머리를 맞대고 물가에 둘러앉은 저 마을 풍경은 한없이 밝고 평화롭구나. 동점령산 일대는 동서남북이 모두 갑산 영역이다. 도·군 경계선이 백두대간과 무관하게 그어져있기 때문이다.
가자! 가자! 재촉하는 이도윤씨를 따라 갑산동산 뒷등을 내려왔다. 커다란 배낭 위에 내 배낭까지 얹어서 지고 앞장서는 이도윤씨. 저런 친구를 산이 아니면 어디서 만났을 것인가. 김봉관씨는 나 대신 지도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외지고 어려운 산길일수록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마음이 맞아야 한다. 잘 걷는 사람들은 뒤 처지는 사람의 고통을 모른다. 왜 빨리 못 오는가. 왜 저렇게 느리게 걸어 우리 걸음까지 늦게 만드는가 여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우리 팀엔 그런 사람은 없다. 못 걸으면 기다리고 앉은 김에 쉬어가자고 커피 한 잔이라도 끓일 줄 아는 정. 그것을 만끽하며 나는 걷고 있다.
2,003.2m봉을 오를 때 조금 머뭇거릴 뿐, 오늘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가 발목을 잡는다. 누구보다도 먼저 저 언덕을 오르고 누구보다 먼저 화동령을 찾아 달려 내려가고 싶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지 못한 탓이다. 단순하게 즐기면서 걷지 못하고 이것저것 캐면서 걷는 벌이겠지.
화동령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가깝다. 30분쯤 더 걸어서 텐트를 쳤다. 1,833.6m봉 서남쪽 기슭이다. 발아래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면 사금원이라는 마을이 있다. 거기 어느 집 부뚜막 앞에는 감자 삶고 옥수수 찌는 아낙이 있겠지. 햇볕에 탄 피부는 검게 반들거리고 젖먹이 는 등에서 칭얼거리다 잠들고, 감자 익고 옥수수 익는 구수한 향기에서 하루 낮 노동의 피로를 잊는 아낙이 있겠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한 아낙의 삶을, 그 아낙의 삶의 궤적 위에 내 삶 한끝을 살짝 걸쳐놓고, 그녀가 꿈꾸는 내일이 나의 내일이라고 생각해본다. 아궁이 앞에라도 앉은 듯 훈훈해 지는 기분. 마을의 연기와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텐트를 치면 이런 공상을 부추기는 재미가 있어서 좋다.
화동령 동쪽에 귀를 살짝 걸친 땅이 단천이다. 백두대간쪽에서 단천을 보면 귀를 살짝 걸친 정도로 좁은 땅이지만, 바다 쪽으로 내려갈수록 넓고 풍요로운 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촌과 바닷길을 잇는 길목마을이라 한 많은 이별도 많았던 모양이다. "공동묘지 간 낭군은 / 천당 그리워 가고 / 북평 청진 가신 낭군 / 돈 그리워 갔네 / 에헤야 어 널널 / 너리둥 널과 내로구나" 단천 땅에는 연정과 이별, 그리움을 노래하는 상사별곡류가 유난히 많다는데, "너리둥 널과 내로구나!" 후렴도 구성진 이 '애원성(哀怨聲)'은 어떤 한 많은 여자들이 불러서 남긴 것일까? 후렴도 유별나게 구성지다.
'애원성(哀怨聲)'이란 글자 그대로 슬픔과 원망에 차서 부르는 노래일 것인데, 저기 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산줄기 아래, 기다림과 한으로 지새다 죽어간 여자들이 그렇게 많았단 말인가. 단천에 얽힌 전설의 내용들 또한 그렇다. 복귀면 용연리라는 마을에는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아이 업은 여인 같은 바위가 하나 서 있다한다. 이름하여 <모자바위>. 전설인즉 옛날옛날 어느 구두쇠 영감과 착한 며느리가 살았는데(서방은 어디 갔을까?), 영감은 심술 사나운 구두쇠라서 벼락을 맞아서 날아갔고, 벼락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며느리는 아이를 업은 채 돌이 되어 굳어져 버렸다 한다. 못된 시아버지야 벼락을 맞아 죽거나 말거나 귀를 막고 앞만 보고 달아났더라면 아이와 자신은 살았을 것을, 소금기둥이 될지언정 가족의 불행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땅 여인네들이 지닌 아름다움. 흐르는 물을 앞에 놓고도 돌이 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던 여인네들의 세월이, 20세기말의 산등까지 치밀어 올라와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전설이란 때론 황당해 보이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힘없는 아이나 여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거나, 그들의 희생으로 행복한 결말을 보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단천 어느 해변에는 변방을 지키러간 남편을 10년이나 기다리다 광주리를 인 채로 돌이 된 여자가 있다는데, 이름하여 <광주리바위>. 힘없는 민초들이 가난을 감내하고 슬픔을 누르며 지켜온 땅에 우리가 가는 길이 걸쳐져 있으니, 내 몸이 비록 산에 있으나 빈 몸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처럼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단천 여자의 절개를 소재로 긴 시를 쓴 문장가도 있었다.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은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란 장편 서사시를 남겼는데, 단천 관기(官妓) 일선(逸仙)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지은 작품이라 한다. 당대의 사대부가 일개 천기를 위해 장시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단천 여자들이 그토록 지조가 굳지 않았더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작품 아닌가.
화동령을 움푹 파며 돌아나가는 76번 지방도로는 동점령을 거쳐서 올라온 길이다. 백두대간 발등에 깊고 긴 상채기를 내면서 윤종천을 따라 내려간다. 저 길을 따라가면 설령리가 있고, 서쪽으로 한참을 더 가면 혜산이 있다. 혜산은 원래 갑산도호부에 딸린 혜산진이었지만, 이제는 산골마을들보다 번화한 국경도시가 되었다. 나는 그 마을을 압록강 건너에서 바라보았다. 빨래하고 목욕하는 사람들 너머로 병풍처럼 둘러선 산줄기를 보았다. 지척에 있었으나 건너갈 수 없는 땅. 돌아와서 다시 펼친 지도 위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없다. 넘어가지 못할 산이 없다. 오늘 내가 걷고 있는 이 산줄기. 그날 내가 바라보았던 강 건너 산줄기 중 몇 번째 것이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 깊어간다. 어젯밤에 울던 풀벌레 소리가 한결 희미해졌다. 집을 먼 곳에 둔 사람들은 겨울의 발소리를 더 일찍 듣는다.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찬 기운은 낡은 육신을 더욱 웅크리게 했지만, 간밤엔 모처럼 단잠을 잤다. 쌓이고 쌓인 피로가 가장 따뜻한 솜이불이었다.
별빛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며 다시 걷는다. 어제 하루를 느슨하게 걷고 잠을 잘 잔 덕분인지 한결 몸이 가쁜하다. 1,985m봉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해뜰 무렵의 대지엔 설레임이 있어서 좋다. 산 속에선 더욱 그렇다. 바람도 없는데 모든 것이 움직인다. 새로운 빛을 향해 꿈틀거리는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다. 풀잎들도 눈을 뜨고, 새들도 지저거린다. 나무들도 잎새에 묻은 이슬들을 털고, 들리진 않지만 저 골짜기 안 냇물들도 도란도란 깨어나서 어둠을 밀어내고 있겠지.
1,985m봉은 '부전령산맥'과 '마천령산맥'이 만나는 지점이다. '소마대령' 동쪽 '청남·청북정맥분기점'에서부터 끈질기게 동북진하던 산줄기(부전령산맥)가 이 봉우리에 이르러 새로운 이름(마천령산맥)을 달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마천령산맥은 1985m봉 동남쪽에 웅거한 두류산을 거쳐 동해를 바라고 남진하고, 이제부터 우리가 타고 갈 북쪽 줄기는 백두산 정상을 향해 북북서진하게 된다.
큰 산맥을 몇 달 동안 걸어서 통과했고, 또 하나의 산맥위로 발을 올려놓는 기분.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더 많이 지배한다. 한줄기 백두대간에 이토록 많은 산맥 이름이 붙어야만 했던, 우리 국토와 민족의 과거사가 무거운 배낭끈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다.
1,985m봉에서 대각봉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고도도 높지만 길도 만만찮다. 모처럼 심산의 정취에 한껏 젖어본다. 드넓은 고원 풍경에 퍼져 있던 마음이 잘 끓인 시럽 방울처럼 둥글고 팽팽해졌다. 대각봉 고도는 2,121m. 해수면으로부터 2km 이상을 상승한 곳이다. 고지대사람들은 느릿느릿 걷는다. 천천히, 천천히, 쉬지 않고 걷기!
나무들은 높은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의 방향을 알고 그것을 비키고 적응하는 능력을 가졌다. 스스로 키를 낮추고 땅위를 기면서도 까만 열매를 익혀서 달고있는 들쭉나무. 그 작고 동그란 열매 한 알을 입에 따 넣는 기쁨.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하다.
백암령 비탈을 오르는 동안 내 눈길은 내내 승지백암 시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눈팔면서 오르는 길에 작은 봉우리를 만났다. 1,903m봉. 좀 이르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산속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쪽 하늘을 가리고 있는 우람한 봉우리는 소대각봉이다. 그 큰산 등지고 앉아 동쪽 마을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이 산 중턱에 있었다. 혜산을 거쳐온 '백두산임철선'이 지나가는지 기적소리가 산비탈을 흔들고 갔다.
1,941.7m봉에서는 삼각점을 확인하고 우리가 잘 못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흐믓했다. 1,941.7m봉에서 남설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뛰지 않고 고산지대의 주민들처럼 느릿느릿 걷기 때문에 갈림길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여력이 생긴 것이다. 남설령에 내려서니 다시 저녁이다. 해는 저물었으나 길은 남았다. 우리는 내일도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걸을 것이다. 눈이 오기 전에 백두산 정상에 서야 하므로―.
[제27구간], 해는 저물었으나 길은 아직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