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령에서 언덕 하나를 올라, 갸름하면서도 펑퍼짐한 덕(德)땅에 닿았다. 이 덕땅이 바로 장백정간 분기점이다. 동서의 폭은 좁고 남북으로는 길쭉한 이 덕땅 서쪽에는 조금 더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남설령 일대의 망대와도 같은 설령봉이다. 백두대간은 이 덕땅에서 설령봉 정상을 거쳐 백사봉으로 뻗어간다. 그러므로 이 덕땅, 백두대간과 장백정간의 분기점이 되는 이 갸름한 봉우리는 설령봉 동봉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설령봉 동봉의 동북쪽 자락을 언덕 아래로 살짝 끌어내리며 고두산 쪽으로 뻗어 가는 산줄기가 바로 장백정간이다. 장백정간의 시작은 오똑한 산줄기를 이루는 게 아니라, 백두대간에서 떨어져나가자마자 드넓은 평지를 이루며 풀썩 주저앉았다 고두산 자락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형국이다. 내 눈 아래 펼쳐진 백무고원, 저 펑퍼짐한 덕땅의 허리를 가로질러 고두산 정상을 힘겹게 넘어서면, 또다시 푹 퍼진 언덕이 되어 승지백암 쪽으로 고도를 낮출 것이다. 잠깐 드높다 주저앉고 마는가. 아니다. 저 산줄기 시작은 비록 미약했으나 괘상봉(2,139.2m) 투구봉(2,334.5m) 도정산(2,200.6m) 같은 거봉들을 일구며 천리를 이어간다. 천리를 가깝게 이어가서 동해에 발을 담근다. 아아, 사람인 나도 장백정간만 같아라.
가자, 가자, 재촉하는 일행들을 따라 설령봉 정상에 서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다 보인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다 보인다. 고두산 정상을 거친 장백정간이 승지백암 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도 보인다. 대각봉과 소대각봉이 쫑긋 솟은 두 귀처럼 남쪽 하늘을 가린 것도 보인다. 설령봉 허리를 감돌아 내리는 73번 도로와 승지백암 고샅을 파고드는 기찻길도 보인다. 가야할 길 안의 산줄기들은 아침 햇살 쪽으로 한꺼번에 가슴을 열었다. 아침 햇살 쪽으로 가슴을 활짝 연 산줄기들을 가득히 껴안고, 백사봉은 저 멀리에 솟아있어 뾰족한 산머리만 보인다. 오늘 우리는 저 백사봉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대한 저 산 가까이 가서 노숙을 할 것이다.
가자, 가자, 재촉하던 일행들은 어느새 1,781m봉을 넘어서고 있다. 김종선(청우산우회), 이상년(도깨비산우회), 유남숙(도깨비산우회), 최성순(도깨비산우회), 이은경(도깨비산우회), 이도윤(타이탄산악회), 백은식, 김봉관(진해산악회), 김홍경(크로니산악회), 위수현(한국요산회), 이창기(한국요산회), 이소희(청소년탐사단장), 김수현(클럽아프리카) 씨등, 나와 함께 백두대간 종주에 한번이라도 동행했던 산악인들이 이번 길에는 모두 참석해서 앞서 가고 있다. 남설령에서 허항령까지 이어가려면 장장 100km. 7일간의 대장정을 계획하고 나섰다. 도중에서 탈출하거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긴 구간이라 짐도 많고, 대부분 초면이지만, 산과 백두대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서울에서 남설령까지 오는 사이에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설령봉에 나를 두고 앞서 가는 일행들. 저 양반들은 예전부터 나를 잘 안다. 나는 혼자 두고 가야 딴전 피우지 않고 잘 따라 온다는 것을.
오늘도 그렇게 1,781m봉까지 따라 갔다. 1,781m봉이면 설악산 대청봉보다 73m가 높지만, 우리가 출발한 남설령 고도가 이미 1,762m나 되므로, 언덕이라기보다 평지와 마찬가지다. 내가 1,781m봉에 도착하니 일행들은 이미 채석장 부근을 돌아나가고 있다. 나도 밋밋한 언덕을 달려 내려간다. 대간 왼쪽에는 산정 호수를 끼고 있는 진펄(늪)이요, 오른쪽에는 채석장이다. 돌 깨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얀 돌가루가 바람을 타고 떠돈다. 산의 가슴은 수 만년 품어온 돌덩이를 잃어버리고 쩡쩡 소리내어 울면서 하얗게 파이고 메말라 간다. 산 속 바윗덩이를 캐내어 집을 지을 궁리를 맨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무튼 나는 무른 땅의 극치인 늪과 견고한 땅의 극치인 바위산 사이로 길을 내며 아슬아슬 걸어간다.
길 왼쪽의 진펄 가운데는 호수가 있는데, 제주도에 많은 '오름'처럼 산의 정수리가 함몰되어 물을 담고 있다. 저 산정호수의 물은 퇴로가 없어서 강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가지는 못하고 저렇게 고여서 혼자 출렁이다가 햇볕 아래 마르거나, 오늘 아침처럼 쌀쌀한 날에는 물안개가 되어 하늘로 오른다. 남설령 일대에는 저런 산정호수와 진펄들이 여러 군데 있다. 가장 큰 것이 장백정간 초입에 있는 '대택(大澤)'이라는 것이다. '大澤'은 백두산 천지(天池)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 같이 싣는 대동여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장백정간 대택 부근의 산은 옛 이름이 '장백산'이었다. 지금의 고두산(1,987.9m)일대를 조선조 말까지도 장백산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남설령 일대에 남아있는 진펄(습지)들은 백두산이 시뻘건 불덩이를 내뿜을 때 이 일대도 함께 뜨거운 용암을 뿜으며 땅의 모습을 바꾸었다는 얘기가 된다. 백두산을 하늘 가운데로 밀어 올리는 불기둥이 훨씬 크고 강렬했기 때문에 이 일대의 화산구들은 속앓이만 하다가 거품처럼 사그러졌던 것일 게다. 한때는 땅속의 불을 토하던 화산구(火山口)였으나, 천지처럼 커다란 호수를 이루지 못하고 질퍽질퍽한 늪으로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1,781m봉 서북쪽의 산정호수도 원래는 산이 있던 자리다. 저 호수가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백두대간은 저 호수 중심에 솟아있던 산등성이를 넘어 석개령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산은 없다. 백두대간은 물을 건너지 않아야 하므로, 저 산정호수 둘레의 언덕을 에돌아 이어지게 되었다. 1,781m봉에서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서 길이 있는 곳까지 왔다. 구름 한 덩이 머리 위에 드높이 띄우고 저 산정 호수에 번지는 아침 햇살 내려다보며 오래 앉아 있고 싶어도 일행들은 서두르고, 돌 깨는 소리가 뒤쫓는다. 남양동쪽에서 진펄 둘레를 돌아온 소로와 오십리촌 쪽에서 채석장을 돌아온 소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커피 향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도시엔 8월 하순, 여름이 남은 것을 보고 왔는데, 이 북쪽 고원의 산길엔 풀잎 위에 이슬들이 맺혔다. 풀잎에 맺힌 이슬에 햇살이 스밀 때 보면 보석처럼 곱다. 이따금 만나는 들쭉나무와 사스레나무 굽은 가지에 살랑이는 바람. 이슬이 남아있는 풀잎 틈에 두 다리를 파묻고 서서 마시는 이 커피 맛! 10분쯤 쉰 뒤에 다시 배낭을 진다. 세 아가씨와 이소희씨가 뒤로 처져서 나와 같이 걷겠다 한다. 남자들 바짓가랑이들이 풀잎에 맺힌 이슬들을 쓸고 지나가면 우리는 설렁설렁 뒤 따라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계속 된다는 것을 모르고 꾼 꿈이었다. 석개령 안부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길을 따라 왔으므로-.
김종선 선생이 같이 걸어주는 날은 나는 지도 들고 길 찾는 걱정을 버리고 느릿느릿 뒤에서 걷는다. 석개령 십자로 안부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10분전. 길도 좋았지만, 모두들 열심히 걸어온 덕분이다. 위수현씨와 이창기씨가 비탈을 내려가서 물을 떠오고 도깨비 산우회 세 아가씨가 둘러앉아 라면을 끓였다. 승지백암에서 새벽밥을 먹고 출발 할 때 비닐 봉지에 담아온 밥을 한 덩이씩 말아먹었다. 석개령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잠깐 힘들었을 뿐, 길은 또다시 덕땅 복판으로 들어섰다. 오른 쪽에 드넓은 숲을 끼고 걸었다. 석개령 정상에서는 삼각점을 확인하고 내친김에 백사봉까지 넘기로 하였다. 그러나 석개령산에서 내려설 때 마루금을 놓치고 잠깐 헤맬 때 기운이 다 빠져 버려서 1,925m봉에 주저앉아버렸다. 장거리 산행이니 체력을 안배합시다! 드러낸 주장은 그랬지만, 실은 내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려 드는 탓이다. '너는 나를 믿고 /나는 너를 믿으나 /령(嶺)은 높다 구름보다도 령은 높다//…(이용악, 嶺)' 달래고 구슬러서 내일 또 걸을 수밖에-.
1,925m봉에서는 바로 아래 늪이 있어서 먹는 물도 쉽게 구할 줄 알았는데, 백은식 김봉관 김수현 세 남자가 한참 만에야 돌아온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먼 곳에서야 물줄기가 통하는 모양이다. 산은 높고 마을은 멀지만 13인의 길꾼들이 함께 밤을 맞는다. 조선범도, 칡범도 두렵지 않지만, 밤이 되자 뚝뚝 떨어져 내리는 고원의 밤 기온은 뜨거운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덜덜 떨릴 정도다. 여름으로부터 갑자기 겨울로 이주해온 13인의 산꾼들이 석 동의 텐트에 분산해서 누웠다. 우리가 덜덜 떨며 잠든 사이에 달은 지고, 햇살은 다시 번지리니!
새벽잠 없는 이도윤씨와 김홍경씨, 이창기씨 세 남자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아침을 지어 놓았다. 이 높은 산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뜨거운 밥을 먹으며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번 산행은 출발부터 행복하다. 백사봉으로 오르는 길에 나는 또 다시 뒤로 쳐졌다. 혼자 걷는 재미를 혼자 걸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오늘도 나는 느릿느릿 걸어서 백사봉을 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꿈마저 첫 번째 된 고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오르막길에 약한 내 짐을 덜어주려고 이상년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치 불고 배낭을 맡기고 빈 등을 툭툭 치면서 올라간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 2,000m가 넘는 산이 몇 개나 되나? 백사봉 정상에 먼저 오른 일행들이 내기를 하며 웃고 있다. 몇 개나 되나? 마흔 개가 넘지. 백두대간 상에 솟아있는 이름 있는 봉우리만도 열 개가 넘는다. 2,000m가 넘는 고산들 중 가장 높은 것은 단연 백두산 장군봉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장군봉. 가자, 가자, 내리막길에서는 나도 앞장을 서 볼 수 있으니 좋다. 백사봉에서 황봉으로 건너가는 능선이 구부러지고 휘돌아 더 부지런히 걷는다. 우리가 걷고 있는 능선만 오똑할 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동쪽 땅은 평야를 방불케 한다. 이름만 듣던 백무고원이 여기 이렇게 편하고 넓은 길을 두고 그 험한 산길은 왜 가느냐 부르는 것 같다. 백두산의 '白'자와 무산의 '茂'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리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나뭇가지만 보여, 저 높은 곳에서 내 모습을 내려다보면 수해(樹海) 위를 달리는 쪽배 같으리라.
좌초한 군함보다야 잘 달리는 쪽배가 낫지. 황봉 오르막에서 푹푹 쉬다 걷다를 거듭하였다. 황봉을 넘어서 구름봉 쪽으로 가던 길이, 1,867m봉을 향해 방향을 바꿀 때, 내 다리는 또 다시 우뚝 서버렸다. 푹 퍼진 덕땅만 바라보던 눈에 피라밋처럼 뾰족한 봉우리가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럴 땐 마음을 먼저 보내고 몸이 따라가야지. 그러나 저 봉우리를 넘어가야 따뜻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1,867m봉을 넘어서 조금 내려가니 십자로 안부가 나왔다. 이처럼 된 비탈에도 밭을 만드는구나. 이처럼 된 비탈에서도 옥수수는 자라는구나.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옥수수 잎이 말라서 바람에 버석거린다. 버석버석 옥수수 잎새들의 불협화음을 들으며 라면을 먹는다. 라면이 한국등산사에 끼친 은공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면서 껄껄거리는 사이에 코펠 속의 라면은 국물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1,880m봉을 오를 때, 나는 내 속에서 퍼지고 있는 라면의 저력을 느낀다. 큰골령을 통과해서 아무산을 향해 올라간다. 길은 또다시 고원지대로 내려오고 내 숨결은 또 다시 평화를 회복한다. 가다, 가다, 물이 가까운 곳에서 다시 텐트를 치자. 장백정간을 동해로 보내고, 백무고원의 황혼에 빠져서, 좀 더 걷다.
[제28구간], 장백정간을 동해로 보내고, 백무고원에 빠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