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흙·바람, 그리고 늙은 산맥에 대하여
제30구간 최가령∼1,928m봉∼백사봉∼북설령
이 향 지
늙은 산맥 위에서 늙은 나무가 걸어간다. 내 안의, 내 밖의, 물·불·흙·바람이 함께 꿈틀거린다. 빗방울이 먼저 내린 빗방울을 따라가듯이,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다. 백두대간은 산경표에 그 족보만 있을 뿐, 누구도 완주한 기록이 없다. 백두대간을 횡단하는 고갯길은 많지만, 백두대간 전 구간을 종주한 이는 없었다. 나도 이 길을 직접 걸을 때까지는 막연한 개념에만 사로잡혀있었다. 오늘 걷는 길도 마을이 멀고 사람의 발자국마저 희미하다. 따라서 내가 한 걸음을 옮겨놓으면 그 미답(未踏)의 신비가 한 꺼풀씩 벗겨진다. 바로 그 점에 내 소망의 전신을 걸었다.
새벽에는 비가 왔다. 백두대간 분수령 높직한 덕(德)땅을 베고 누워, 산이 강(江) 낳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얇디얇은 텐트 지붕을 파고들던 빗소리! 구름의 탯줄을 끊고 후두두둑 울면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던 굵은 빗소리! 또 한 세기의 종언을 예고하는 가을 빗소리! 우리의 희망을 무겁게 적셔놓고 추운 몸을 더욱 춥게 움츠러들게 했지만, 산은 강의 어머니. 그 빗소리야말로 새롭게 태어나는 강의 고고성이었다.
산맥은 산을 낳고 강을 낳는다. 강은 물.
강물은 흘러내리면서 산비탈을 높이고, 산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시작할 때는 미미하여 이름조차 없고, 큰 줄기를 이루어 콸콸 소리내며 흘러내리기 전에는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강은 비탈에 순응하며 끊임없이 재생하는 물방울들의 힘으로, 무수한 생명을 기르고 지상의 시간을 이어왔다.
백두대간을 따라가는 우리의 걸음도, 강물의 시작과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거슬러 올라야할 비탈은 피하지 않고 거슬러 오르는 점이 다를 뿐이다. 콸콸 소리내며 흘러내리는 존재의 강, 누구나 꿈꾸지만, 그 첫걸음은 험준한 산맥 위에서 고고성을 터트리는 강물의 그것과 같다. 강의 첫 물방울은 하늘의 구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강의 탯줄은 끊어지거나 가늘어진다. 그러나, 산은 스스로 제 몸에 감긴 탯줄을 끊지 않는다. 백두대간은 한반도 산들의 탯줄 중의 탯줄이다. 백두산은 하나의 큰 탯줄에 수만 가닥의 작은 탯줄을 한 손안에 엮어서 들고 있는 '태초의 어머니'와 같다. 우리 땅의 모든 산줄기, 그 강인한 탯줄의 굴곡 많고 높직한 등마루 위로 한 줄기 길이 가고 있다. 수많은 나무들을 데리고 산과 산을 이으며, 나도 백두산으로 간다.
산은 흙.
산은 땅속의 불덩어리가 지각을 뚫고 솟구치면서 남긴 것이다. 그 솟아오름, 그 뜨거운 땅의 울음은, 너무나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어서, 우리들의 귀는 그 고고성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산은 처음 솟구친 자리에서 무너질 때까지 서있는 힘으로, 무수한 생명의 집이 되고 역사의 터전이 되어왔다.
산은 가장 오래된 불의 저장고.
어둠이 내리면 베고 자고, 해가 뜨면 마루금을 따라서 걷는 이 늙은 산맥도 오래 전에는 활활 타오르는 화산이었다. 시간의 비가 그치지 않고 20억 년을 내려 그 화산을 식혔다. 몇 만 도의 열을 가진 쇄빙설에 뒤덮였을 때, 이 산등성이는 그대로 화옥(火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불 자신에게는 더 없는 천국(天國)이었을 것이다. 시간의 비가 그치지 않고 20억 년을 내려, 그 불길도 꺼졌다. 희나리 같은 불길은 바위로 굳고, 완전히 타버린 불길은 흙이 되어 무수한 나무와 풀들을 자라나게 했다. 그리고 우리를 불렀다. 오늘 새벽, 13인의 귀, 스물 여섯 개의 고막을 울리며, 늙은 산맥 위에서 태어나는 강의 고고성을 듣게 했다. 그 비마저 그친 산등성이에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렸다.
우리는 걷고 나뭇잎은 춤춘다. 새벽녘 빗속을 걸어왔을 나무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부르르 떨었을 나뭇잎들. 풀잎들. 축축하게 달라붙은 물기를 털어 내며 새로운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다. 골짜기가 가까운 산등성이엔 묽은 안개가 휘감고 있다. 어디선가 낯익은 산새소리 들린다. 우리가 걸을수록 산은 높아지고, 바람의 역사는 푸들푸들 되살아난다.
바람은 공기.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저보다 가벼운 물체를 들어올리거나 흔들리게 함으로써 잠깐 잠깐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지만, 바람이야말로 가장 욕심 없는 생명의 전령. 길 안에서 만난 작은 씨앗들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새로운 땅으로 옮겨놓는다. 바람은 궁극적으로 빈손을 지향하지만, 쉴새없이 움직여서 새로운 공기를 만든다. 바람의 씨앗들은 흙을 만나 싹트고, 물과 불의 도움으로 새로운 꽃들을 피워낸다.
1,616m봉 언덕을 내려와 작은 꽃 앞에 이르렀다. 깊은 강물처럼 꽃빛이 푸른 비로용담. 줄기는 낮고 가늘지만, 꽃은 등불을 닮았다. 우산도 없이 새벽비 속을 걸어왔을 작고 푸른 꽃. 추운 입술이 열릴 때 보니 벌 한 마리가 들어있다. 꽃 속의 벌은 불씨와도 같다. 제 가슴 안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꼭꼭 다물고 있었을 꽃의 입술이 파리하다. 손가락 끝으로 꽃을 건드리자 벌은 날아가 버렸다. 작은 꽃 속에서 잠을 자고 날아 가버린 커다란 불씨. 작은 날개로 파닥파닥 눈부신 빛을 저으며 태양 속으로 들어갔다. 잠깐 사이에 작은 벌을 삼켜버린 눈부신 빛. 태양은 불이다.
불은 생명을 전파하는 최초의 씨앗.
불은 아슬한 생명의 나무 우듬지에 자신의 존재를 걸어놓고 싶어한다. 불은 높고 먼 하늘이나 깊은 땅속, 날개 달린 수컷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앞의 나무·꽃·물고기·사슴·새·다람쥐·벌…, 에게도 불은 자신의 인자(因子)를 골고루 심어놓았다. 불은 지나친 억압이나, 마찰이 있을 때 활활 타오르며 뜨거운 존재를 드러낸다. 잘못 일어난 불은 모든 것을 소멸시킬 광포한 힘을 갖고 있지만, 사람은 필요할 때만 불씨를 당길 줄 아는 이성과 지혜로 불을 지배해왔다. 추울 때나, 배고플 때, 빛이 필요할 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때맞춰 불을 열고 잠그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은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를 노린다. 답답한 잠금 장치를 풀고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특히 이성(理性)의 지배를….
그러한 불씨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 나는 내 안의 불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는 없지만, 내 몸 속에 저장된 불을 조금씩 태워서 얻는 에너지로 전진하고 있다. 우리들의 몸은 불보다는 물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의 혼은 물이 아니라 불이어야 한다. 물과 불. 산다는 것은 이 상반된 입장의 솔기를 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은 불을 끄지만, 불은 물을 끓인다. "물과 불. 이 상반된 물질의 입장과 성향을 적절한 함량으로 통합하고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생명은 연장될 것이다. 그러나 내 혼은 태울수록 가볍고 드높아진다. 내가 이 늙은 산맥을 걷는 것은 내 의지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내 안과 내 밖의 물·불·흙·바람, 이 네 가지 생명의 원소 삶의 원소를 적절하게 내 혼에 통합하고, 내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행위이며 지고지순한 생명의 명령이기도 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너무나 힘들고 멀어 아무 바위 위에나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아무 강물이나 추적추적 따라 내려가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나 자신을 다시 일으키면서 들려주는 말이다. 내 안과 내 밖의 물·불·흙·바람, 그 모든 것들의 늙은 산맥이기도 한 나 자신을 넘어, 나는 계속 걸을 것이다. 내 발아래 길이 다하여, 드디어 백두산 머리에 서게 되는 날, 그때에는 모든 끈을 풀어서 바람 속에 두리라. 둘 수 있으리라.
늙은 산맥 위에서 늙은 산맥이 걸어간다. 1,671m봉에 오르니 오전 7시 03분. 백무고원의 수해(樹海)는 하룻밤 비에도 단풍색이 완연해졌다. 바람은 누리끼한 나뭇잎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다, 생각난 듯 되돌아와선 머리칼을 헝클곤 한다. 하늘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능청맞게도 푸르고 맑다. 무겁게 이고 다니던 비구름을 다 쏟아낸 뒤엔 사람의 머릿속도 저처럼 텅 비어 푸르고 아름다우리.
오늘은 8월의 마지막날, 우리들 마음 속엔 한여름 뙤약볕이 남아있지만, 고원의 아침은 춥다. 추운 산에 있으면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불기운이 모자란다. 우리는 어제 저녁 이후로 잠가두었던 불을 되살렸다. 덕땅 풀숲에 나직한 꽃등을 걸어놓고, 밥과 국이 끓고 있다. 차가운 물에서 김이 오르고, 손과 얼굴이 따뜻해진다. 내 안이 따뜻해지자, 내 발 밑의 산도 꿈틀 깨어나며 함께 따뜻해진다.
자연은 이처럼 다른 자연을 만나고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조금씩 모서리를 뭉그러뜨리며 같이 가고 같이 사는 법을 깨닫게 된다. 내 안의 불과, 내 안의 물이, 내 안의 흙과 바람이, 다른 불과 다른 물, 다른 흙과 바람을 만나고 숨쉬고 손과 얼굴을 씻고 등줄기를 타 내리며, '우리는 각각이지만,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산이 좋은 것은, 이 높직한 등마루, 백두대간이 좋은 것은, 무수한 빛과 형태의 자연을, 때묻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같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백사봉 안부에서 우리는 또 다시 불을 피웠다. 한낮에는 기온이 회복되었지만, 오후가 되자 다시 그림자가 길어졌다. 축축한 대기 속을 걸어온 피로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걷는 듯 했다. 노을은 어제보다 곱지만, 나는 노을은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제 저녁에도 얼마나 노을이 고왔던가. 예상하지 않았던 새벽 비는 우리 걸음을 더디게 했다. 그러나 그 느린 걸음 덕분에 산과 나의 영혼은 더 깊이 손을 잡게 되었다.
밤하늘엔 또다시 별이 뜨고, 가슴 한쪽이 움푹 파인 달이 돌아왔다. 이상년씨와 이도윤씨, 김종선 선생이 한 동씩 나누어 지고 온 젖은 텐트가 다시 풀숲에 펼쳐졌다. 이소희, 이은경, 최성순, 유남숙과 나, 다섯 여자는 가장 큰 텐트 안에 옆구리를 맞대고 누웠다. 우리 머리맡의, 우리 발 밑의, 자질구레한 짐들. 온종일 우리 어깨를 짓누르던 잡동사니들. 백두산 정상까지 우리 어깨를 짓누르며 따라갈 것들. 빈 손, 빈 몸, 빈 마음으로 걷고 싶지만, 그런 길은 꿈꾸는 것조차 죄가 되겠지. 늙은 산맥은 길고 백두산은 멀지만, 우리는 내일 걸어갈 길을 염려하지 않는다. 밤이 되면, 온종일 걸어온 산맥을 두르르 말아서 덮고 깔고 단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툭툭 털어서 도로 펼쳐놓는 일을 되풀이한다.
다시 아침이 왔다. 오전 5시 30분에 출발한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8월은 9월로 바뀌었다. 집에 있었으면 묵은 달력을 찢고, 새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을 시간. 백사봉(白沙峰·2,036.7m) 줄기를 거슬러 오르고 있다. 된 고비를 만나면 갈수록 숨이 차는 법. 내 안에서 잠자던 불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발목에 또 다시 모래주머니를 매단다. 30분쯤 씨름하자 고행은 끝났지만, 내 몸은 2,036.7m 산정에 털썩 주저앉았다. 백사봉 산정은 민대머리 같고, 나무들은 키가 작고 가지는 억세다.
바람막이 없는 산정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쳐들어온다. 신선한 바람이 폐부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나는 바람 앞에 주저 없이 내 몸 속의 모든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바람을 삼키고 뱉어내고 다시 삼킴으로써 자신의 생명 안에 새로운 허공을 만들어간다. 깊은 숨을 쉴수록 내 몸 속의 허공이 한없이 부푸는 걸 느낀다. 깊은 숨을 쉴수록 내 혼은 둥둥 떠올라, 드높은 허공 속을 날아다닌다. 이 시간 우리 집에 내가 없듯이 백사봉 산정에 주저앉은 내 안에도 이제 나는 없다. 내 안의, 내 밖의, 물·불·흙·바람이 허공 속에서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다. 아아, 이 늙은 산맥 위에 무겁게 주저앉아 내가 잃어버린 나는, 저 눈부신 빛 속, 저 가볍고 드높은 불길 안에서 함께 타오르고 있다.
[제30구간], 물·불·흙·바람, 그리고 늙은 산맥에 대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