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 붐이 구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이 땅의 산악인들이 백두대간 증후군에 걸린 것 같다. 국립지리원 지형도를 판매하는 업소에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지역의 지형도 목록을 갖춰놓았을 정도다. 백두대간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백두대간을 안내하는 산악회도 생겼고, 활자매체나 영상매체들도 심심찮게 백두대간을 거론한다. 월간<山>도 '실전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발간하여 충실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백두대간을 완주한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가고, 종주의 내용과 감회를 글로 써서 알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백두대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일반인들조차 '백두대간'이라는 단어에 낯설지 않을 만큼 되었다. 자신의 저력과 끈기도 시험하고, 역사와 풍속·지리적인 고찰까지 겸할 수 있는 현장으로써, 민족 정서와 정신의 저변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우리 중, 진실로 백두대간 전 구간을 완주한 사람은 누군가? 지리산 천왕봉으로부터 70여 일을 혼자 걸어왔건, 한 달에 두 번 정도 구간 종주를 하느라 2년여를 걸려서 도착을 했건, 남한쪽 백두대간은 진부령에서 끝난다.
백두대간은 하나다. 오직 한 줄기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자유롭게 답사할 수 있는 구간은 반쪽뿐이다. 백두대간을 완주했다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반쪽 백두대간을 주파한 것에 불과하다. 지리산과 백두산을 하나로 잇지 못하는 백두대간은 존재 의미가 없다. 가야할 길을 앞에 두고 되돌아서야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로하지만, 우리 앞의 현실은 더 이상의 북진을 거부한다.
그러나,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옛말이 있다. 백두대간 종주 붐은 누가 시키고 권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한 산꾼들이 땀과 끈기로 지펴 가는 불길이다. 솔가리들도 모여서 그치지 않고 타오르면 그 불길로 밥도 짓고 국도 끓일 수 있듯이, 이 땅의 산악인들이 지피고 있는 이 지순(至純)한 불길들의 힘이 분단 반세기의 장벽을 허무는 데 일조를 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가? 남쪽 사람 북쪽 사람들이 예전처럼 하나가 되어 백두대간을 타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언제일 것인가? 그때를 손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통일시대의 산악운동에 대비한 아무런 준비와 노력도 없이 그날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누군가가 어떻게 해 주기만을? 드디어 그날이 왔을 때, 그때에 가서야 지도를 찾고 나머지 백두대간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알려고 법석을 떨 것인가?
그날을 위한 준비작업으로써 나는 이 지난한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눈으로 보고 발로 걸을 수 없는 산을 지형도만 보고 산세를 파악하고 가상 산행까지 해보려는 것이다. 과거에 가본 적도 없고 현재 가볼 수도 없는 산. 머지않은 미래에 가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도 할 수 없는 산들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다고 쓰려고 하는가? 5만 분의 1로 축소된 지도를 보면서 실제의 세계를 떠올려야 하고, 기호로 가득찬 평면 위의 세계를 보면서 입체적인 표정과 숨소리를 길어 올려야 한다. 이 일은 현미경과 확대경, 몽상과 과학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시인조차 꿈꾸지 않는다면 세계를 어찌 바꾸겠나?
나에게는 산경표 산줄기 답사를 계속해온 경험이 있다. 한북정맥·한남정맥·한남금북정맥·금북정맥·금남정맥 답사 등이 그것이다. 지형도를 보고 정맥(正脈)과 대간(大幹)을 가르고 잇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구별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밑천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길이 내 앞에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 나는 지도를 믿는다. 또 하나는 내 발과 내 눈으로 확인한 우리 땅의 산줄기. 이 땅의 산계와 수계를 아울러 살피는 우리 고유의 산경개념이, 개화기의 침략자인 일제가 규정해놓은 산맥개념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것을 현장을 답사하며 믿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산을 걷고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생성과 함께 있어온 산줄기를 더터가며 쓰려는 것이다. 고대와 근세, 현재를 꿰뚫을 수 있는 각종 지리서와 지도들이 내 걸음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땅의 자연이 나에게 베푼 은혜를 아낌없이 되돌릴 준비가 되어있다.
이 일은 북한쪽 정밀지도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이 가능했다. 경인문화사에서 발간한 '최근 북한 5만 분지 1 지형도'가 그것이다. 이 지도는 좌표체계를 1942년을 기준으로 하여, 1949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976∼1979년 사이에 자료를 보완하였고, 1981년 구 소련군 참모본부에서 항공촬영법을 이용하여 원색으로 출판한 군사용 지도다. 물 흐름의 방향, 흐름의 속도, 삼림의 식생까지 표시되어있는 정밀지도다. 원래는 러시아어로 제작된 것을, 1997년 경인문화사(02-718-4831)에서 러시아어로 표기된 지명과 산 이름들을 영어와 한글로 재 번역하여 한정본으로 출판한 원색지도로, 총 33층 400도엽으로 이루어져 있고 두 권으로 묶어진 묵직한 역작이다. 난외주기를 제외한 지형도의 크기는 가로43.5cm×세로37cm로, 우리 국립지리원 지형도(가로43.6cm×세로55.3cm)와 폭은 비슷하나 길이는 짧다. 이밖에 우진지도문화사에서 발간한 '최신 북한지도'와 통일부에서 제공하는 자료들도 참고한다.
나는 90년대 벽두에 중국 땅을 거쳐서 백두산엘 간 적이 있었다. 마침내 백두산이 가까워 졌을 때, 우리 땅의 흙내음이 가득히 밴 등산화로 바꿔 신었다. 그러나 중국 국적의 지프는 천문봉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우리를 내려 주었다. 나는 등산화조차 필요 없는 길로 백두산엘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백두산에 왔으나 백두산이 아닌 곳.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그날 찍어온 백두산 사진을 걸어놓고 산다. 천지 둘레의 산머리들엔 자욱한 구름이 얹혔고, 구도도 빛깔도 형편없는 졸작이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아야 백두산이 제대로 보인다. 그 사진에는 백두산의 현실이 스며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더 쾌청한 날의 백두산을 만날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백두대간 총 길이는 도상거리 약1,577km 실제거리 약2,103km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분수령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모든 산맥이 백두산 하나에 매달려 있다. 다알리아나 땅콩, 감자를 한 포기 뽑으면 줄기 하나에 숱한 뿌리들이 딸려 나오듯이, 우리 땅의 산줄기들도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는 1대간(大幹·백두대간), 1정간(正幹·장백정간), 13정맥(正脈·청북정맥/청남정맥/해서정맥/임진북예성남정맥/한북정맥/한남정맥/한남금북정맥/금북정맥/금남정맥/금남호남정맥/호남정맥/낙동정맥/낙남정맥)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을 알면, 그 산줄기로 인해 갈리는 강줄기(압록강·두만강·청천강·대동강·예성강·임진강·한강·금강·섬진강·낙동강)들까지 완연히 드러난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산줄기 지도를 그렸고, 산줄기 지도를 보면서 강줄기를 함께 알아보았다. 각 지역들은 큰 산줄기들이 팔 벌여 껴안고 있는 강줄기 주변에 오순도순 삶터를 열고 있다. 그러므로 산줄기 지도를 읽을 줄 알면, 국토의 전모와 각 지역의 위치와 특성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우리 국토를 나름대로 인식하고, 장점을 활용하는 독특한 방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각 산줄기를 강줄기와 연계하여 족보식으로 서술해 놓은 책이 <山經表>다. 그 산줄기 지도를 가장 정확하게, 자세히 그려 놓은 지도가 <大東輿地圖>다. 그러나, 이 자료들에도 오류는 있었다.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시기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행히 남과 북이 공히 정밀 지도를 제작하여 보유하고 있다. 이 현대지도들을 기본도로, 고문헌에서 정의한 산줄기들을 찾아가며, 그 옳음과 틀림을 차분히 가름해 보았다. 일제의 개입, 주권의 상실과 함께 잊혀지고 변형되었던, 우리 고유의 산줄기들의 이름 복원, 그 존재 되찾아주기.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는 바로 그 일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진부령 이후의 백두대간은 칠절봉∼둥글봉∼향로봉∼고성재∼삼재령으로 이어진다. 삼재령까지가 남한 구역이다.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수동면 경계에 있는 삼재령(三峙嶺)은 현재 비무장지대에 들어있다. 또 진부령 이후는 군사지역이어서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다. 진부령∼삼재령은 도상거리 약26km 실제거리 34km남짓 된다. 따라서 남한쪽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삼재령까지며, 도상거리 약666km 실제거리는 약888km이다.
북한쪽 백두대간은 휴전선 상에 있는 삼재령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로, 도상거리 약911km 실제거리는 약1,203km이며, 북한 쪽이 남한 쪽보다 도상거리 248km 실제거리 327km 정도가 더 길다. 따라서 지리산 천왕봉∼백두산 장군봉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총 길이는 도상거리 약1,577km 실제거리는 약2,103km이다. 우리 이수(里數)로 환산하면 5,257리나 되는 산길인 셈이다. 이 수치들은 백두대간 전 구간을 최대한 가는 선으로 이어서 커비미터(curvimeter)로 측정한 것이고, 실제거리는 도상거리를 삼등분 하여 그중 ⅓을 더한 것이다. 소수점 이하의 처리는 관례에 따랐다.
삼재령을 거친 백두대간은 무산(巫山·1,320m)∼금강산 비로봉(1,638.2m)∼온정령(853m)∼법배령(870m)∼철령(685m)∼풍류산(1,023.8m)∼추애산(1,529.8m)∼백암산(1,229m)∼복희령(1022.4m)∼두류산(1,323m)∼재령산(1,208m)∼거산령(900.6m)∼용풍산(1,549.9m)∼마유령( 972m)∼모도봉(1,832.8m)∼노란봉(1,735.3)∼마대산(1,744.5m)∼금패령(1,676m)∼후치령(1,335m)∼희사봉(1,760.3m)∼동점령산(1,925.8m)∼대각봉(2,121m)∼백사봉(2,098.6m)∼아무산(1,802.6m)∼북포태산(2,289.1m)? ?拈容?2,173.9m)∼대연지봉(2,359.5m)∼백두산장군봉(2,750m)으로 이어진다. 북한 쪽 백두대간 상에는 희사봉·대각봉·백사봉·황봉·북포태산·소백산·간백산 등 2,000m가 넘는 봉우리들도 10개가 훨씬 넘는다.
백두대간을 타면서 기억해야 할 사람들과 시대적인 상황
이중환(1690-1756)은 떠돌면서 '택리지(擇理志)'를 썼고, 정약용(1762-1836)은 유배지 강진에 앉아서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를 썼다. 떠돌 수밖에 없게된 사람에겐 몸 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만한 땅이 과연 어디인가가 절실했을 것이고, 땅끝을 지척에 둔 적소에 18년을 갇혀서 낯선 울타리를 벗삼아야 하는 사람에겐 경계(境界)에 대한 인식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1864)가 불행한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재능과 신분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 벼슬길을 치달릴 수 있었더라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란 걸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현재 우리 앞에 남아있는 지지(地志)와 고지도(古地圖)들은 대부분 시대적인 불행에 역동적으로 대처한 선인들이 남긴 금자탑들이다. 그 어려운 시대의 소산들은 안타깝게도 100년 넘게 생존이라는 절대의 그늘에 묻혀있어야 했다.
우리 나라 지리서들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관(官) 주도의 지리지 편찬이 국운이 상승하는 시기에 이루어 진 것과 달리 민간인 내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실학자들에 의한 지지 및 지도 편찬은 주로 국론 분열기와 국운 쇠퇴기에 이루어 졌다. 20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일반에 회자되기 시작한 '산경표(山經表)'의 존재도 그렇다. 영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인 신경준(1712-1781)이 관찬 지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남겨놓은 역작인 것이다. 요즘 시중에서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산경표(푸른산刊)'의 원본은, 육당 최남선을 필두로 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여지편람(輿地便覽)'의 필사본을 재영인한 것이라 한다. 금세기 초, 국운이 쇠퇴한 틈을 타서 침입한 일제가 우리 고유의 산경개념을 무시하고 지질학적 이론에 기초를 둔 산맥들을 따로 규정하여 창씨개명까지 서슴지 않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낀 지식인들이 '여지편람(輿地便覽)'에 실린 산경표의 영인본을 만들어 보급해둔 공로가 크다. 그 어려운 시대의 소산들이 이 어려운 시대의 우리에게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 허리를 조이고 있는 철조망이 걷힐 때까지
우리 경제는 지금 IMF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북한은 세계를 향해 식량난을 해소시켜 달라고 SOS를 타전한다. 남한과 북한이 막대한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한 결과가 이러한 환난과 가난을 초래한 것이라고 개탄하는 목소리들이 호응을 얻고 있다. 새로운 무기 더 새로운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더 성능 좋은 비행기와 잠수함을 구입하기 위하여, 북쪽의 아이들은 피골이 상접해가고 남쪽의 아이들은 부모를 두고도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있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철조망이 걷힐 때까지는, 우리 민족은 다른 희망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백두대간 마루금을 그려나가는 내 손은 떨렸다. 산경표의 내용과 대조하면서 산줄기의 흐름과 강줄기의 흐름을 함께 살펴나가는 내 마음도 떨렸다. 이제 내 앞에서 70매의 지형도(남한쪽 지형도 26매, 북한쪽 지형도 44매)가 형광펜으로 이어지고 한 줄기 백두대간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산줄기. 작은 계곡 하나도 건너지 않고 분수령 마루금만을 타고 갈 수 있는 5,257리의 산길은 이어졌다. 장군봉 삼각점 위에 마침표를 찍고 천지를 내려다보는 감회가 현실처럼 벅차게 다가온다. 체제와 이념을 아득히 초월한 지도 위에서, 내가 그린 백두대간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꿈틀거리고 있다.
'세계는 하나'라는 기치 아래 외래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확산되면서 우리들의 생활과 의식구조도 많이 달라졌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발빠른 전환은 대가족의 핵가족 화를 부추기게 되었고, 정신적인 구심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미아가 되어 도시공간을 떠돌고 있다. 우리를 우리답게 하나로 묶어줄 끈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장된 안정과 평화의 원형을 되살려야 한다. 나는 한 줄기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그 몫을 하리라고 믿는다.
외세의 침입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국토는 분단되고, 국토의 등뼈인 백두대간 또한 남북으로 나뉜 채 반세기를 넘고 있지만 백두대간은 분명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것이 우리에겐 희망이다. 살아있는 백두대간! 분단의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할 우리 국토의 등뼈! 분단된 국토와 민족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는 굳건한 끈이며, 민족정서를 통일의 장으로 이끌 수 있는 공통분모! 우리 민족에게 백두대간은 결코 꺼트려서는 안될 희망의 불씨인 것이다.
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