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구간 / 진부령∼향로봉∼삼재령 구간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을 사람들에게 이 향 지 (시인) 서울의 공기를 향기롭게 달구던 라이락이 지고 철쭉꽃이 만발했다. 꽃들의 유혹이 화사하다. 꽃샘바람 황사바람 심술궂게 불어도, 화사한 꽃잎 사이로 초여름은 스미고, 연둣잎은 다투어 초록이 된다. 그러나 백두산은 아직 눈 속일 것이다. 두메양귀비, 구름국화, 노란만병초도 깊은 눈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천지(天池) 물은 꽁꽁 얼어있을 것이다. 그 동토(凍土)로 남쪽의 꽃 소식을 전하러 가자. 멀기에 더욱 그리운 산. 지도에 지도를 이어 붙이며, 능선과 능선을 한 줄기로 이으며, 우리 땅 우리 길로 백두대간을 타고―.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김영랑은 노래했지만 나는 걸으면서 봄을 소생시키련다.
내 발은 길이가 235mm,
등산화는 그보다 1cm가 크다.
1:50,000 지형도 위에
내 한 쪽 발을 올려놓으면 12.25km,
발자국 둘이면 60리를 덮을 수 있다.
지도 위를 걷고 있으면 나는 거인이 된다.
평면 위에서 오글거리는 세계를 밟고 가는,
외로운 거인이 된다.
―졸시, 「지도 위에서 걷는다」
거인의 족적도 축지법도 나는 사양한다. 조각난 베폭을 이어 한 벌 옷을 짓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이어가야 할 길이 내 앞에 있다. 햇빛 아래 걷고 별빛 아래 잠들며 달빛 아래 추억을 씹으며 걸어가야 할 길이다. 비가 오면 젖고 우뢰를 만나면 떨고 별똥별을 만나면 위로해 주리라.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산길을 걸으며 나는 편지를 쓰리라. 어느 낯선 대륙 낯선 나라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 땅 우리 산을 안으며 지나간다. 내 오른 발을 자음 삼고 내 왼발을 모음 삼아, 달마다 편지를 쓰리라.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을 사람들에게―. 드디어 진부령! 별빛과 햇빛이 자리를 바꾸는 시간이다. 지도 위에서 익혀둔 길이 여명 속에서 걸어 나온다. 나는 익숙한 길을 가는 사람처럼 열린 길로 빨려 든다. 어제는 밤 9시에야 용대리에 도착했고, 민박집 괘종시계가 울 때까지 꿈없는 잠을 잤다. 별들은 내가 잠든 지붕 위에서, 그 빛이 다할 때까지 장도를 축복했다. 진부령으로 오는 도중에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나는 혼자 가는 게 아니었구나!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아카시아꽃 향기도 있다. 가까운 어딘가에 아카시아꽃이 잔뜩 핀 모양이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아카시아꽃 수백 송이가 내 코끝에서 피는 것 같다. 조금 걸으니 능선이다. 나는 길을 버리고 그 능선으로 붙는다. 대간도 정맥도 곧이 곧대로 타는 게 좋다. 조금 편하자고 길을 따르다 엉뚱한 곳으로 빠진 경험이 여러번 있다. 5월의 흙은 발 밑에서 푸슬거리고, 흙 위로 머리를 내밀던 풀들이 밟히며 투덜거리지만, 용서해라 잠깐만 밟고 지나가마. 오름 길에서의 나는 팬더처럼 느리다.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1간 반을 끙끙거렸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산을 껴안고 산길 안의 사물들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끙끙거리는 오름 길에서 가능했다. 아무도 안 다니는 산길인줄 알고 마음놓고 햇볕을 쬐던 원추리 가족이나, 주근깨 투성이 잎사귀 사이에 보랏빛 꽃 한 송이 힘겹게 밀어 올린 얼레지 아줌마들의 아리랑타령을 듣는 것도 바로 이런 길에서였다. '함경도 원산이 살기는 좋아도/왜놈의 등살에 못 살겠네//인천 제물포가 살기는 좋아도/왜놈의 등살에 못 살겠네//(한국민요집에 수록)' 침략자들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하얼빈으로 떠돌던 식민지 시절의 사람들이 불렀다는 민요가, 푸릇푸릇 살 오르는 들판을 가로질러 백두대간까지 따라왔다. 경기 북부와 강원도 산에 지천인 얼레지들은 식민지 주민들이 캐어먹던 나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얼레지는 데쳐서 하룻밤 이상 우려야 설사를 하지 않는 나물인데 허기를 못 이겨 바로 먹고 고생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그 배탈과 설사가 원인이 되어 죽어간 사람은 없었을까? 보리고개! 보리고개! 우리 민족을 가로 넘고 세로 넘어간 보리고개! 또 이 부근은 6.25때의 격전지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군가까지 끼어들어서 가뜩이나 숨찬 발길을 흔든다. 아아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거대한 대륙의 동쪽 끝에 조그맣게 매달려, 쌓이고 쌓인 한(恨)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산하(山河)여! 나또한 너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칠절봉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모자와 장갑을 벗고 그 바람 맞아들인다. 설악은 깊은 골짜기와 첩첩한 산줄기 너머에 중후한 일가를 이루고 있다. 안산 뒤편의 가리봉 능선도 알아보겠다. 점봉산∼한계령∼끝청∼중청∼대청∼공룡릉∼저항령∼황철봉∼미시령∼신선봉∼대간령∼마산∼진부령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 봉우리마다 추억은 놀다가자고 아지랑 거리지만, 땀이 마를 때까지 쉬면 더 못 걷게 된다. 물과 토마도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걷는다. 차소리가 웅웅거리는 마을로부터 나를 따라와서 내 목을 축여주는 것들의 희생으로 나는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출발한다. 진부령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던 길은 향로봉을 향해서 90°로 꺾이며 북진한다. 능선 길은 뚜렷하고 또 높직해서 볼거리가 많지만 오름 길에서의 저속을 만회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오직 길 만보고 몇 갠가의 봉우리를 오르내렸다. 그리고 드디어 향로봉 정상이 바로 건너다 보이는 갈림길까지 왔다. 향로봉 분기점이다. 인제와 양구쪽의 산들과 소양강 지류들이 휘돌아나가는 골짜기들이 내 왼쪽에 있다. 건봉산쪽은 향로봉에 가려져서 안 보이지만 바다는 보인다. 오늘의 바다는 멀지만 나는 습관처럼 바다 쪽을 보고 앉는다. 파도와 갈매기, 오징어와 물미역, 가리비와 해삼들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러나 오늘은 목메이는 김밥이나 먹고가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 이것도 그리워지겠지. 고성재로 내려서는 길에서는 행여라도 잘 못 들어설가봐 천천히 걸었다. 고성재는 인북천 지류와 남강 지류가 마루턱에서 손을 놓고 남북으로 갈리는 곳이다. 우마차로를 건너서 850m봉으로 올라섰다. 850m봉은 지형도를 보면 꼭 뱀대가리처럼 생겼다. 뱀대가리를 밟고 넘느라 땀을 빼느니, 뱀대가리를 끼고 우회하며 두 갈래로 갈라져서 날름거리는 새빨간 혓바닥을 밟고갈 수 길을 택하고도 싶지만, 나는 구차하고 낮은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곧이 곧대로 올라간다. 그러나 내려설때는 너무 서쪽으로 내려서서 길이 더 벌어져 버렸다. 결국 조금 더 걸었다. 실수는 양식이다. 실수를 곱씹으며 임도를 따라간다. 아참, 이 부근 계곡에서 식수를 보충했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다시 나를 에워싼다. 이 땅의 5월은 아카시아꽃 천지다. 오름길로 들어서자 내 걸음은 느리고, 1,052.8m봉 앞에서 또 한번 지름길의 유혹을 받았지만 봉우리 저쪽 인제땅까지 보려고 대간 마루금을 탄다. 1,052.8m 무명봉에 서니 향로봉 줄기가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동쪽에 펼쳐져 있다. 오후 두시의 태양을 받아 연둣빛 날개를 펼쳐든 산. 북쪽을 향해 고도를 떨구며 가는 산줄기 중간쯤에 건봉산이 우뚝 솟았다. 건봉산은 너 어디가니? 묻는 것 같고, 향로봉은 나를 찾아 날아오는 것 같다. 나는 저 향로봉에서 이쪽을 건너다 본적이 있다. 그때 나는 발목까지 눈 속에 빠져 있었다. 오늘 내 발은 발목까지 잠기는 수풀 속에 있다. 향로봉과 나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건널 수 없다. 편편하게 이어지던 능선이 왼쪽으로 90°로 꺾이며 고도를 뚝뚝 떨군다. 점봉산 줄기가 감싸고 있는 진동리나 귀둔리 부근처럼 산세가 부드러워진다. 길이 살아있는 뱀처럼 구불거리는 구간이어서 아무리 지도와 맞춰가며 걸어도 어쩔 수 없다. 송이달 부근에서 한번, 854.1m 무명봉 부근에서 한번, 지능선으로 빠졌다 되돌아 왔다. 삼재령엔 453번 지방도로가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신탄리를 연결하고 있지만, 지금은 없는 길이나 마찬가지다. 아아. 나는 있으나 없는 길로 여기까지 왔다. 사람대신 풀들이나 가득히 자라는 비무장지대 안. 소양강쪽으로든 남강쪽으로든 한 줄기 물처럼 흐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하늘을 본다. 하늘이여 부디 우리 겨레를 도우소서!
제1구간,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을 사람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