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주능선을 통과한 지 두 달만에 다시 온정령에 섰다. 1998년 9월 25일까지는 43일이 남았다. 그날은 분단 50년만에 휴전선 이남의 사람들이 금강산 관광을 떠나게 되는 첫 번째 날이다. 기왕이면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전하고 싶지만, 그날이 와도 만물상 천선대에 올라, 백두대간의 앞 뒤 모습을 조망하는 것밖에, 그 이상의 기대는 불가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첫날의 항해, 그 두근거리는 첫걸음이 의미 있는 씨앗이 되어, 한민족 모두의 소원인 통일을 앞당길 수 있기를…!
단기 4331년 9월 26일 아침, 거대한 유람선이 닿으리라는 강원도 고성읍 장전항으로부터 내가 서있는 온정령 마루턱까지는 자동차 길로 22km쯤 된다. 온정천을 거슬러 오르는 온정령 고갯길의 남쪽은 관음연봉이고, 북쪽의 능선들은 매바위산∼바리봉∼수정봉∼문주봉∼세지봉∼천주봉∼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암릉이다. 고성과 금강을 연결하는 온정령 고갯길이 자동차 길로 확장 된 것은 6.25 동란 중이었고, 주로 지역민들이 동원되어 밤을 틈타서 공사를 했던 모양이다. 결과, 북측의 금강산 사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고, 그때 길 닦은 사람들을 위해 온정령 이름도 영웅고개로 바뀌었다 한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전신을 맡긴 채, 나는 묻는다. 잃은 자는 누구이며, 얻은 자는 누구인가? 동족상잔의 포화 속에서도 금강산은 남아, 50년을 등지고 살던 남과 북이 말문을 트게 되었다. 이 땅의 산, 백두대간의 자연이 베푸는 커다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한쪽은 돈을 벌고, 한쪽은 구경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 것인가? 금강산은 구름 속에서 대답이 없고, 잣새 한 마리 포르륵 천선대 쪽으로 날아간다. 작은 새 한 마리 날아오른 것으로도 잣나무가지는 흔들리지만, 금강산은 구름 속에서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금강산은 까딱도 않는데
너만 바쁘구나
바람아…, 구름아…, 햇볕아…,
허리 굽은 소나무 잎에 이슬로 맺힌
소낙비야
너만 바쁘구나
생각했는데……
내 기다림이 듣는 대답은 막막한 벼랑뿐이구나
못 오를 벼랑 위에 핀 초롱꽃 같은 거구나
바라만 보다 되돌아서야 할 몹쓸 꽃 같은 거구나
생각했는데……
1998년 9월 25일
금강산 가는 첫배가 떠난다 하네
어머니 그리다, 고향 그리다, 주름 깊어진
실향민들이
먼저 떠난다 하네
고향 앞에서도 어머니 못 보는 노인들의 눈물로
올 가을 만물상 단풍은 한층 붉겠고
옥류동 계곡 물은 더욱 넘치겠네
―졸시,「금강산 생각」
온정령에서 오봉산까지는 날개 달린 새들이나 갈 수 있는 암릉의 연속이다. 그나마 구름이 짙어서 방향으로만 짐작한다. 만물상 천선대 구경은 지난 달(월간 산, 1998년 8월호 금강산 특집)에 했으니, 오봉산 안부로 오를 수 있는 길을 찾아 서쪽 비탈을 내려간다. 새벽비가 적셔놓은 자동차 길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먹구름이 빠르게 흐르는 하늘을 보며,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지만, 오늘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저 산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찌 전하겠나?
춘원 이광수는 1921년 8월 12일에 그의 부인과 함께 내금강 세동 쪽에서 이 길을 걸어 외금강으로 넘어갔다.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에 남아있는 77년 전의 모습을 옮겨보겠다.
'세동(細洞)이라기에 아아 조그마하더라도 무슨 시가지나 되는 줄 알았더니 자동차는 우리를 개천가 밭뚝에 내여던지고 차세(車貰)를 받아넣기가 바뿌게 오던 길로 도로 달아나고 맙니다. 짐을 지울 사람이 있나 물어볼 집이 있나 이런 기막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하야, 십오륙세나 되여보이는 소년에게 1원 50전을 주기로 하고 짐을 맡기고 뒤따라가게 되는 데, 그 아이는 개천 건너 어떤 집에 모인 사람 중에서 제일 게을러 보이고 노름꾼 같아 보이는 자의 동생이다. "얘, 이 자식아 너 이 짐 지고 원정리(溫井里)꺼지 갓다 오너라" 하는 것을 보면, 그 지역 사람들이 온정리를 원정리로 발음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불과 20리 길을 거의 4시간이나 허비하야 천신만고로 온정령 마루태기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는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아니하나 원체 더운 날에 바람 한 점 얻어볼 수 없고, 벌은 웬 벌이 그리도 많은지 조곰만 방심하면 눈코 할 것 없이 쏘일 형편이외다. 어떤 곳에서는 연방 팔을 전후좌우로 내여 둘러야 되게 되었습니다. 그놈의 매암(매미)의 소리가 땀을 쥐어짜는 듯 합니다. 혹 시내를 만나 찬물이라도 마셔 보려하면 그것도 미지근하여 끓었다가 식은 물 같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도 이 령(嶺)을 넘는 자에게 지난한 감을 주는 것은 령(嶺)이 아무리 올라가도 올라오는 것 같지가 아니하고, 저 고개만 넘으면 되나 저 모퉁이만 돌면 되나 하야, 밤낮 속으며 감이외다. 과연 인생의 행로에 비길 만 합니다.…'
오르기는 어려워도 내려가기는 쉬운 길. 아아, 인생의 행로도 오르기는 어려워도 내려가기는 쉬운 법이다. 칼날 같고 창날 같은 암릉을 피해 멀리 우회해야하는 하는 길. 아아, 인생의 행로에도 이런 경우 이런 길 왜 없겠는가? 내려가면서 듣는 매미소리는 부채바람 같고, 귀에 익은 매미소리는 좋은 길동무가 되지만, 77년 전에 이 길을 지나 흙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백두대간이 두 쪽이 난 것도 모르고 있으리. 아아 그때는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 민족 전체가 똘똘 뭉쳤던 때가 아닌가?
온정리에서 3km쯤 내려오니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다. 모퉁이 하나를 더 돌아 내려가면 유달리 물맛이 좋고 시원하다는 '찬샘'도 잇고, 민가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다. 오른쪽에 능선을 두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30분쯤 오르니 계곡이 가늘어지고, 30분쯤 더 오르니 오봉산 안부다. 땀은 빗물처럼 흐르고, 배낭은 어느새 내 어깨를 벗어나 풀더미 위에 모로 누워있다. 나도 그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만물상의 맹주격인 오봉산 정상은 우람하게 솟아, 동남쪽 풍경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다. 저 가파른 봉우리를 꼭 올라야 하나? 죽어라고 올라갔다 이내 되짚어 내려와야 하나? 내 대답은 곧장 선창산으로 가겠다고 한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천불천 계곡의 물소리가 섞여있다. 물소리로 멱을 감고 매미소리 부채 삼아 훌렁훌렁 저으며 선창산으로 걸어간다. 동북쪽으로 가지를 치는 지능선을 따라가면 천불폭포·오단폭포·백사폭포·삼단폭포가 있는 골짜기로 내려설 수 있겠지만, 별금강 구경은 다음에 하고, 오늘은 백두대간만 따라가리라. 선창산 정상에 서니 푸르른 바다 끝없는 수평선이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다. 이런 곳에서는 바위에 앉아 가던 길 잠시 잊으리라.
바다를 곁에 두고 산길을 걸어가네/흐르는 땀으로 목욕하고/귀에 익은 매미소리 부채 삼아/백두대간을 걸어가네//하루치의 물과 양식도 내 어깨는 무겁다 하네/이 산에서 저 산까지가 몇 리냐? 몇 리냐?/지친 발은 계속 묻네//오늘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내일 만나야 할 산과 마을들 섧지 않겠는가?//먼 곳, 더 먼 곳에서 기다릴 백두산은/더 섧지 않겠는가?// ―졸시,「여름 산행」
선창산에서 1시간쯤 걸어오니, 암봉이 하나 막아선다. 금수봉 자락을 벗어날 때까지는 이런 암봉이 다섯 개가 더 있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길을 찾아보지만, 마음만 급했지 별 소득이 없다. 땀에 젖은 팔꿈치가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졌다. 기억 자로 찢어진 옷소매를 돌볼 겨를도 없어 바위 뿌리를 피해서 돌아간다. 경황없는 중에도 뱀이 있으면 어쩌나 지팡이로 툭툭 소리를 내면서 산비탈을 헤매자니 웃음이 난다. 진작에 바위라도 좀 배워 둘 걸. 바위만 만나면 멀찍이 돌아가야 하는 내 꼴이 난감하고 씁쓸해서 웃음이 난다.
금수봉 분기점에 솟은 큰 암봉을 우회한다는 것이, 숲이 짙어 엉뚱한 곳으로 내려서고 말았다. 길을 따라 내려오니 마을이 나왔다. 마을 이름은 사라지란다. 사라지라면 사령 바로 아래 마을이다. 금수봉쪽을 돌아보니, 내가 건너뛴 능선이 오후 3시의 하늘아래 긴 어깨를 드러낸 채 모로 돌아앉아 있다.
오늘 산행은 실패였다. 본의 아니게 우회하고 건너뛴 구간이 많았다. 사령에서 널막령까지는 착실히 독도를 하며 걸어가야지. 사령에서 1,227m봉을 거쳐 신창리를 질러가는 길. 매산과 덕수산 사이에서 신창리로 질러가는 계곡 길. 덕수산에서 주어직을 질러가는 계곡 길. 시원한 그늘과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 계곡 길들이 유혹하겠지만, 나머지 구간은 대간 능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내일 아침에 오를 길을 미리 익혀두려고 사령으로 왔다. 사령 언덕의 다락밭에선 옥수수 잎새들이 설렁설렁 저녁 바람을 흔든다.
[제4구간], 금강산은 까딱도 않는데 너만 바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