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설령 마루를 건너서 2,005m봉에 오를 때까지, 나는 이 산맥에게 '늙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경솔을 후회했다. 2,009m봉을 오를 땐, 몇 번인가 주저앉았다. 경사가 완만하고 펑퍼짐한 덕(德)땅은 어디선가 끝나버리고, 굴곡 많고 험상궂은 산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설령에서 2,005m봉까지 도상거리는 3km정도인데, 실제로 걷는 거리는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이 봉우리 다음엔 얼마나 더 가파른 봉우리를 만나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걸었다. 천천히 걷자 천천히 걷자 말씀들은 넉넉하지만 모두들 걸음이 빠르다. 1,805m봉에 도착해서야 겨우 한숨 돌렸다. 내 배낭은 북설령에서부터 길춘일(고산자산악회)씨 배낭 위에 얹혀있었다. 사진작가 김유성(백두대간 식물탐사회장)씨와 강근식(백두대간 사진작가)씨가 함께 혜산∼보천을 거쳐 가림천을 거슬러 올라와서 북설령에서 합류했다. 이제 우리 일행은 16명이 되었다. 허항령에 가면 더 많은 산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의 배낭 속에는 싱싱한 먹거리들이 들어있었다. 2,005m봉 안부에서는 푸짐한 저녁상이 펼쳐졌다. 삼겹살과 소주, 상추와 풋고추, 나를 위해 따로 준비한 시루떡도 있다. 북쪽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사과배도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남설령을 등진 지 닷새도 안되었는데, 우리는 무인도에 좌초한 로빈슨크루소처럼, 새로운 술과 고기와 떡과 과일과 인정에 취했다. 추위도 잊을 정도로 즐거움에 취해서 횡설수설 하는 사이에 밤이 깊어간다. 머리 위에선 깨알같은 별이 돋고 어젯밤보다 더 홀쭉해진 달이 기우뚱하게 떠있다. 밤은 점점 더 깊어간다. 드르렁 푸푸 코고는 소리에 백두대간 허리가 휘청 기우는 밤. 압록강 줄기를 거슬러 올라온 바람에 텐트 프라이가 펄럭거린다.
나는 꿈속에서도 압록강 줄기를 더듬어 산골짜기를 헤맨다. 우리가 텐트를 친 안부의 서쪽 계곡은 가림천 원류가 시작되는 곳이다. 가림천 원류는 내일 아침에 지나게 될 북포태산 남릉에서 시작하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설령∼북포태산∼1,905m고개 구간은, 강원도 안변과 통천 경계에 있는 법배령∼깃대봉∼도납령 구간을 돌아 나올 때처럼, 삐죽하게 귀가 달린 형국이다. 북포태산에서 허항령쪽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도납령∼박달령∼장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지형이 비슷하다. 삐쭉하게 파인 골짜기의 정점에는 북포태산이 있다. 그러나 북포태산의 고도는 깃대봉 쪽보다 1,300여m나 높다. 가림천은 이처럼 깊숙하고도 높고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험난한 골짜기의 정점에 있는 북포태산 남쪽 기슭에서 시작한다. 이 산 이름에 '포태(胞胎)'란 한자를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남포태산, 북포태산의 원래 이름은 보다회산(寶多會山)이었다.
가림천 원류를 따라 내려가면 보천읍이 나온다. 보천은 조선시대에는 보천보(普天堡)라는 진지가 있던 곳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중국과의 국경선이 되는 압록강 원류가 서쪽으로 25km 정도밖에 안 되는 외진 변경이다. 북포태산과 쌍벽을 이루는 남포태산(南胞胎山·2,434.8m)이 서남쪽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대평리와 포태리 쪽은 밝을 때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마을을 거쳐서 허항령으로 이어지는 길은 백두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갔다. 우리가 머무는 능선의 오른쪽(동쪽) 물은 두만강의 지류 중에서도 서두수의 상류가 된다. 북포태산 정상 바로 남쪽에 있는 2,074m봉 남서쪽 골짜기에서는 두만강의 지류 중에서도 소홍단수가 시작되는 곳이다. 북포태산은 이처럼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에 근접한 지류들을 탄생시킨다.
압록강은 우리가 19구간에서 지나온 소마대령 부근의 (청북·청남)정맥분기점에서부터 우리가 걷는 백두대간 능선의 왼쪽(서쪽 또는 북쪽)비탈에서 수많은 지류들을 탄생시키며 함께 이어서 따라왔다. 장진고원 황초령에서는 장진강이, 부전고원 부전령에서는 부전강이, 개마고원 금패령·후치령에서는 허천강이 시작되고 있었다. 금패령∼후치령∼동점령에 이르는 긴 산맥의 서쪽 물은 모두 허천강이 되어 혜산 서남쪽 강구동에서 압록강 원류와 합류했다. 동점령 이후의 압록강 지류들은 강(江)이라기보다는 천(川) 또는 수(水)로 불린다. 동점령에서 황봉에 이르는 대간의 서쪽물은 모두 오시천(五是川)이 되어 혜산 북동쪽 중리에서 압록강 원류로 들어간다. 황봉∼아무산∼최가령∼북포태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서쪽 물은 오늘 우리가 텐트를 친 안부의 서쪽 계곡에서 시작하는 가림천(佳林川)에 모여 보천군 사소구비에서 압록강 원류에 합류한다. 북포태산·남포태산의 물은 포태천(胞胎川), 허항령 쪽에서 내려오는 물은 이명수(鯉明水), 간백산·소백산 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쇠백수(小白水)라 불리며 모두 압록강 원류와 합한다. 쇠백수 이후는 이렇다할 지류가 없고 모두 원류에 포함된다. 우리는 이제 이명수와 쇠백수를 탄생시키는 능선을 걸어갈 것이다.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면 압록강의 원류가 어느 비탈로 어떻게 흘러가며 어떤 지형 사이를 지나가는 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청북·청남정맥 분기점까지는 백두대간에서, 청북·청남정맥 분기점에서부터 압록강 하구 미곳까지는 청북정맥에서, 이 거대한 두 분수령의 서쪽 또는 북쪽 산비탈에서 압록강은 태어난다. 백두산 장군봉 정점에서 평안북도 용천군 미곳에 이르는 긴긴 산맥의 서쪽 또는 북쪽의 수계가 모두 압록강의 수원인 것이다. 장진강 합수목 이하의 지류들은 후주천·테라신강·창평강·후창강·금창강·시전강·자성강·독노강·위원강·초산천·동남천·구암강·오강·진마강·천마강·삼교천 등이 있지만, 도중에 운봉댐과 수풍댐이 있어서 예전처럼 일사천리로 흘러내리지는 못한다.
압록강은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국경선을 겸하는 강이다. 우리 발음으로는 혼강(渾江), 중국말로는 '훈장'이라 부르는 강을 제외한 중국쪽 지류들은 그다지 길지 않다. 신의주와 마주보는 단둥(丹東) 부근에서 '아이허( 河)'가 흘러들고, 고구려의 옛 왕도 '지안(集安)' 서남쪽에서는 '훈장(渾江)'이 합류하는데, 중국쪽 지류 중에서 가장 수원이 방대하고 긴 강인 '훈장'은 옛 이름이 '비류수(沸流水)'였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설화에 얽힌 '비류수'가 곧 지금의 훈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 중강진과 비스듬히 마주보는 도시는 임강시, 중국발음으로는 '린장(臨江)'인데, 이 린장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압록강 지류들에는 '1도구(一道 )'에서 '24도구(二十四道 )'까지 숫자로 이름을 매겨 구분한다. 그 지류들의 합수지점 부근 마을 이름도 삼도구·육도구 등으로 강 이름을 겸한다. 압록강(鴨綠江)의 중국 발음은 '얄루장'이다.
그 물빛이 오리머리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강. 그 시원인 백두산 장군봉으로부터 서한만까지 직선 거리로는 400km정도밖에 안되지만, 굴곡이 심해서 실제 길이는 두 배 이상 길다. 압록강의 길이는 790km로 알려져 있는데, 일제 때 항공촬영에 의한 수치라고 한다. 북한에서 발표한 압록강의 길이는 803km. 내가 재어본 도상거리는 811.7km 였다. 압록강의 길이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강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백두산 정상에 천지가 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는 고정관념 중에 가장 불합리한 것이 강의 발원지에 관한 것이다. 어떤 강의 발원 샘을 찾아서 표석을 세우고, 신성시하고 그 샘으로부터 그 강의 하구까지를 그 강의 길이로 발표한다. 똑 같은 산맥 위에 내리는 빗방울도 어느 쪽 산비탈로 굴러가느냐에 따라 흘러가는 강 이름과 주소가 달라지게 된다. 산 중턱에 있는 샘이나 폭포를 강의 발원지로 선전하는 것은, 조선시대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에서 백두대간을 설한령까지 북상시켰다 황초령으로 내려서게 한 경우보다 더 우려할만한 현상이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과학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밀지도와 우수한 장비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분수령(分水嶺)이다. 강은 분수령상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시작된다. 강은 허구가 아니라 실존하는 물길이다. 산등성이에서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지만, 그 곳이 강의 시원이 아니라고 무엇으로 반증해 보일 수 있을까?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 마른강이라는 불리는 계절강도 강물을 실어 나르는 강인 것이다.
백두대간을 비롯한 이 땅의 산줄기. 1대간 1정간, 13정맥이 모두 강줄기에 의해서 이름이 지어져 있다. 백두대간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치는 장백정간은 두만강 수계를 가름한다.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치는 11정맥 중,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엔 청북정맥,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엔 청남정맥,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엔 해서정맥,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엔 임진북예성남정맥, 임진강과 한강 사이엔 한북정맥, 한강과 금강 사이엔 한남금북정맥·한남정맥·금북정맥이 있고, 금강과 섬진강 사이엔 금남호남정맥·금남정맥·호남정맥이 있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동강 하구로 뻗어 가는 낙남정맥은 낙동강과 남해 사이의 수계를 가름하고, 백두대간 매봉산 기슭에서 남쪽으로 뻗어 가는 낙동정맥은 동해쪽 하천들과 낙동강 수계를 가름한다. 부분적으로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산경표에서 가름한 산줄기 체계는 한반도 지형에 가장 알맞은 산맥체계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답사를 해보면 더욱 그 장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재하는 산줄기나 물줄기를 대상으로 이야기할 때는 막연한 정황이나 개념이 아닌 납득할만한 근거가 함께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삼각점을 박아둔 산정의 높이는 나무가 자라면 달라질 수도 있다지만, 지각변동이 없는 한 강의 시원과 강의 길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강은 분수령 상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시작한다. 그 강의 하구로부터 가장 멀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그 강 쪽으로 흘러내리는 산비탈, 그 정점이 바로 그 강의 발원지인 것이다.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지만 강이 발원하는 지점은 '사기문 폭포'도 '소백수'도 '이명수'도 아닌 백두대간 분수령상의 정점에 해당되는 장군봉 기슭에서 시작된다. 강의 길이도 거기서부터 계산되어야 한다.
압록강은 워낙 큰 강이기 때문에 수많은 문헌들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명일통지에 이르기를 "장백산은 높이가 200리이고, 그 꼭대기에 못이 있어 주위가 80리나 되는데,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으로 흘러 혼돈강이 되고, 동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 하였다.(대동수경 참고)'했다.
우리에게는 섭섭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장백폭포, 그 장쾌한 물소리도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은 모두 송화강으로 흘러간다. 혼돈강은 쑹허장(松花江)과 무단장(牧丹江)이 합류하여 러시아의 동쪽 바다로 빠져나가는 아무르강을 말하며, 우리는 흑룡강(黑龍江)이라 부른다. 백두산 천지 물은 중국땅의 송화강과 러시아땅의 아무르강의 원류가 되므로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야고하'는 두만강을 뜻한다.
'당서지리지(唐書地理志)에 이르기를 "마자수는 백산에서 나오며 모양이 오리머리같다하여 압록수라고 부르는데, 지금 압록강이 그것이다."하였다. 또 당서 고려전(高麗傳)에 이르기를 "마자수는 말갈 백산에서 나오며 모양이 오리머리같다하여 압록수라 부르는데 국내성을 지나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치고 또 서남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큰 배로서 사람이 건너다니며 이것을 요새로 믿는다."했다.(대동수경 참고)' 국내성은 고구려의 옛 왕도 집안의 옛 이름, 안시(安市)는 중국 요령성 봉성의 옛 이름이다.
우리에게는 섭섭하지만 압록강은 우리만의 강이 아니었다. 동국여지승람 의주 편에는 '…그 근원은 만주 백두산에서 나오며 …그 물빛이 오리머리처럼 파라므로 이름지었고,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여진이 사는 곳에 압록강이 있다.'했고, 정몽주의 시에는, "…넓고 넓은 말갈(靺鞨) 물이 서쪽으로 흘러흘러 봉강(封疆)을 경계지었네."하여 국경에 선 심정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섭섭하지만,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 후 조선이 건국 되기까지,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우리와 같은 성원이었던 말갈족, 즉 여진의 수하에 있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중국쪽 문헌들에 한결같이 말갈과 여진의 산으로 기록되어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가 강성하던 때만 해도 압록강과 백두산 두만강은 모두 우리 강역의 중심에 있었으나, 발해 멸망 후 고려가 되찾을 때까지는 압록강마저도 우리의 권역의 밖에 있었던 것이다.
압록이란 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대동수경(大同水經)에 자세한 술회들이 나온다. '압록이라는 이름이 본래 의주 구룡연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문헌에 압록이라고 한 것은 다 의주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삼재도회를 고찰해보면 요양(遼陽)에서 압륙강(鴨陸江)을 넘어서 조선을 끼고 있다하였으니 대개 륙(陸)과 록(綠)의 음이 본래 서로 통하므로 압륙이라는 것이 곧 압록인 것이며, 고려사 지리지에는 "의주에 압록강이 있는데 마자수(馬 水)라고도 하며 청하(靑河)라고도 부른다." 하였다.' 그러므로 압록강의 이름은 그 발원지에 해당되는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하류인 의주 쪽에서부터 비롯되어 강 전체를 압록강이라 부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과 강은 하난데, 두 나라가 그것을 두고 다툴 때, 전쟁을 치르게 된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얼마나 전쟁과 설왕설래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산 속에는 일행들의 코고는 소리 외엔 적막할 정도의 평화만이 감돌고 있다.
압록강 긴 물줄기를 끝에서 끝까지 따라갔다 되돌아오는 사이에, 밤은 가고 아침이 돌아오고 있다. 새로운 아침 해가 뜰 때 나는 보았다. 2,159m봉 쪽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으로부터 하얀 바위능선이 바다 쪽으로 어깨동무를 하는 듯이 두 줄로 벌려서있는 것을…. 그리운 바다. 갈망하는 안식.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걷는다. 북포태산 정상에 올라 백두산 용암지대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화산재 위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백무고원의 장관. 어제는 강에 취하고 오늘은 고원의 나무들에 취해서 오래 앉아 있었다.
2,074m봉에서는 소홍단수가 시작된다고, 강물이야기를 나누며 한 참을 쉬고, 1,933m봉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아무도 바위를 타려고 하지 않아 아랫길로 우회한다. 1,905m 고개에서는 마을 냄새를 킁킁거리며 또 한번 집을 그리워하고, 2,054m봉 안부에서는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다. 이제 우리 앞에는 허항령이 남아있다. 허항령까지의 길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그 고원에 설 때까지 내리막길이 계속될 것이다. 2,075m봉에서 잠시 솟구쳤던 산맥이 고원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는 모습은 대지의 겸손을 보는 듯 황홀하다.
그러나 길은 마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몸으로 간다. 이 두 발로 또박또박, 걸어가야 한다. 한 걸음을 건너뛰면 다음 걸음이 휘청거린다. 내가 걸어본 산길이란 한결같이 마지막 한 걸음까지도 대지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돌멩이 나무뿌리 낙엽 벌 바위 가파른 비탈 웅덩이들을 박아놓았다.
2,068m봉은 정상에 섰을 때보다 1,824.3m봉 쪽으로 내려오면서 뒤돌아보는 광경이 더 아름답다. 우리 발아래 저렇게 아름다운 암벽이 펼쳐져 있었다니. 그 정상에 서있을 때는 몰랐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걷고있는 발아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이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야 보일 것이다.
모처럼 긴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나올 것이다. 그 깊은 산 속에서도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며칠씩 묵으며 걸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일제 때만해도 포수와 군인을 대동하고 백두산 등반을 했다던데, 그 호랑이 그 담비 그 곰 그 멧돼지 그 표범은 다 어디로 갔을까? 줄기가 가늘고 어린 나무 속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자연이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계바늘은 뒤로 돌릴 수 있어도,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길도 또한 그렇다. 앞으로 앞으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걷고 또 걸을 뿐이다.
[제31구간], 압록강, 그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