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대와 명아주, 강아지풀 줄기를 휘어잡으며 메꽃 한 송이 피고 있다. 강이 시작되는 마을의 들녘에 퍼지는 연보랏빛 기상나팔! 저 은은하고 수수한 빛깔의 가락은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일까? 판백리에서 널막령 오르는 길에서 만난 메꽃 한 송이! 네 수수한 빛깔과 모습을 만난 것만으로도 나의 아침은 활기차다.
널막령에서 고윤산에 이르는 남쪽 산비탈에는 다락밭이 많다. 다락밭이란 가파른 언덕에 층층으로 만들어진 계단식 밭들을 말한다. 인도의 북부지역, 히말라야로 들어가는 고산지대의 산비탈에도 마야의 계단을 연상하게 하는 다락밭들이 많았다. 마야의 계단! 삶이 버거운 사람들이 신(神)을 만나러 가는 길! 신(神)에게 호소하러 가는 길!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 이 동방의 금수강산에도 그런 계단이 벌써 필요했더란 말인가? .
다락밭! 뙈기밭!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 전나무 등의 수목들이 우거져 있었을 산비탈에서 감자, 옥수수, 콩, 조, 같은 밭작물들이 자란다. 저 아랫마을 사람들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씨앗들이,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영글고 있다.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만들어진 인도나 네팔 등지의 다락밭에 비하면, 고도도 훨씬 낮고 땅도 기름져 보이지만, 애잔함은 더하다.
우리 국토는 70％가 산이니, 농토와 양식이 모자라면 산에 불을 지르고 산을 파먹을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한쪽 백두대간 주변에도 절대빈곤의 시대에 횡행했던 화전(火田)의 상처들이 도처에 남아있다. 대관령 부근의 고루포기산이나 피재 부근의 매봉산, 진부령의 마산 기슭 등, 해발 600m이상의 고지대에 형성된 대규모 고랭지채소밭들도 결국 화전이 남긴 흔적 위에 쉽사리 형성된 제3의 농토들이 아닌가. 북쪽보다는 지형이 평평하고 덜 옹색한 남쪽이, 입맛과 경제성을 고려한 계절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너나없이 땀흘리며 농사짓기를 기피하는 까닭에, 남쪽에는 개망초꽃 자욱히 핀 묵정밭이 도처에 널렸는데, 북쪽에서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더 늘이려고 다락밭을 개간한다. 한민족에게 한반도를 삶터로 마련해준 이는, 남쪽의 곡물과 북쪽의 광물을 함께 주었건만, 서쪽의 평야와 동쪽의 승경을 함께 주었건만, 우리 민족은 그 복록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이민족의 착취와 반세기에 이르는 분단은 국토의 효율적인 관리와 산하(山河)의 균형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널막령 오르며 들은 메꽃 한 송이의 나팔소리는, 다락밭 계단 만나거든 무심히 지나치지 말라는 대지의 경고가 아닐까? 다락밭 이랑마다 넘치는 갈매빛에 내 마음의 밭둑들은 소리 없이 무너져 평토가 된다. 내 마음의 밭둑은 무너져 평토가 되었어도 내 발아래 산길은 여전히 울퉁불퉁하다. 밑창 두꺼운 등산화 바닥을 뚫고 내 뇌리에 첨탑에 전달되는 대지의 한숨과 투덜거림! 그러나 내 머리 위를 날아, 오른 쪽 숲으로 들어간, 날개가 크고 검은 나비의 춤은 한없이 가볍다. 가슴팍 한쪽이 다락밭으로 변한 산의 무거움과, 허공을 날아다니는 나비의 춤 사이에서 나는 걷는다.
모습만 보일 뿐 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언덕 하나를 넘었다. 널막령에서 고윤산으로 향하는 두 번째 언덕에서는 비를 만났다. 다락밭 콩잎에 후둑이는 빗소리! 하늘을 보니 큰비는 올 것 같지 않고 마땅히 피할 곳도 없으니 계속 걷기로 한다. 이따금 찹찹한 물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더 당돌한 것들은 눈을 감기며 뛰어든다. 지도가 젖고, 팔이 젖고 배낭이 젖는다. 나는 쉴 곳 없는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걸어간다.
다락밭 콩잎 위에 후둑이는 빗소리 점점 굵어진다. 푸른 콩깍지 속에서 자라고 있을 어린 콩알들은, 폭신한 솜털에 감싸여 꿈을 꾸고 있겠지. 그러나 그 콩알들 익어 뿔뿔이 흩어진 뒤엔, 이 다락밭을 기억할 콩알들, 몇 톨이나 될까? 명분과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도, 한 콩깍지 속에서 자란 정을 먼저 생각할 콩알들 과연 몇 톨이나 될까?
콩을 볶음에 콩깍지로 불을 지르니(煮豆燃豆箕)
콩은 솥 속에서 툭툭 튀며 우는구나(豆在釜中泣)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本是同根生)
서로 볶아댐이 이다지도 급하단 말인가(相煎何太急)
―조식(曹植·조조의 아들)의 「형제」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의 아들들이 남긴 칠보성장(七步成章·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편을 완성하는 것. 조조가 죽자 아비의 왕위를 계승한 조비는, 동생을 죽이려고 이런 계책을 썼다) 같은 일화는 없을 것인가?
다락밭 콩잎 위에 후둑이는 빗소리 들으며, 콩깍지를 떠난 형제 같은 우리의 모습들 뒤돌아본다. 콩깍지를 떠난 콩알이 태초의 콩밭 찾아가는 것처럼, 봉우리 셋을 넘어서니 고윤산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구름이 이따금 빗방울을 뿌리지만,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서 걸을만하다. 고윤산 정상에 올라서니 바다는 또 다시 먼 해안선을 끌고 두 눈에 가득 들어찬다.
고윤산에서 백적산까지는 바다를 음미하며 천천히 걸었고, 추지령으로 내려설 때는 밑진 걸음을 보충하려고 사뭇 뛰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내리막길을 뛰어내릴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추지령에는 통천과 금강, 회양을 넘나드는 자동차 소리가 있다.
비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금강저수지를 구경했다. 이 물이 서울로 가는 북한강구나. 내가 시집와서 30년 이상 마신 한강 한 줄기가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을 들여다보며 물가에 앉아 있었다. 바람처럼 햇볕처럼 물가에 앉아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법배령을 향해 추지령을 출발한다. 하룻밤의 휴식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했다. 추지령 넘는 자동차 소리 끌고 우동산으로 가는 길. 추지령과 자패령 부근 대간 기슭에도 흙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밭이 들어서 있다. 뙈기밭 이랑에 쭈그리고 앉아 고추 따는 저 할머니! 남쪽의 농촌 풍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북한강이 시작되는 산기슭 마을의 사람들도 낮 동안은 집을 비우고 흙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흙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5천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맥박에 다름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갯길을 가로질러서 우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가 많고 가파르다. 방향과 거리와 고도를 계속 확인하며 걸어온 덕분에 헤매지 않고 우동산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능선과 바위와 나무들보다 한층 높은 곳에 서니, 통천 앞바다가 잡힐 듯 가깝다. 목청을 다해 울고 있는 매미소리가 아니라면 포말을 일구며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저기 저것은 금란굴을 품고있는 연대산(금란산)이 겠지, 저기 저것은 총석정, 그 위쪽의 섬들은 삼도(三島) 같고, 그 위쪽엔 송전해수욕장과 시중호가 있을 것이다. 금강내기 바람과 해풍에 시달린 산록들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점점 더 드러나서, 점점 더 금강산을 닮아가겠지.
손오고개로 내려서니 사방이 꽉 막히고 바람 한 점 없다. 바람 찾아 전망 찾아 쉴 곳을 찾아 망마바우로 가는 길. 소금 먹고 물 마시며 걸어가는 길. 바위는 많고 길은 구불거리고, 날씨는 찜통 같다. 목표물인 망마바우산이 잘 보이는 것밖엔 모든 상황이 최악이다. 숨찰 때 듣는 매미소리는 자연의 잔소리 같고, 오름길에선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다.
망마바우산 정상에 서니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졌다. 북한강 줄기가 실핏줄처럼 얽힌 내륙쪽 풍경이 백두대간의 안방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깃대봉∼박달령∼장보령∼연대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다음 구간이 북쪽과 서쪽에서 회양을 감싸고 있다. 회양은 바라만 보아도 기름지다. 이 산 내려서면서 만날 홍수피령과 법배령 기슭에도 다락밭은 있다. 어제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의 남쪽 물은 모두 한강으로 가나니. 북한강줄기 따라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방울들에게 다락밭 소식 전한다. 다락밭 콩잎 위에 후둑이는 빗소리 함께 전한다.
[제5구간], 다락밭 콩잎 위에 후둑이는 빗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