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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구간],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제7구간 철령∼고직령∼풍류산∼청하산∼학미현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이  향  지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임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준들 어떠하리'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무슨 일로 이 고개를 넘었으며, 이 고개를 넘어서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나? 백두대간을 타고 지나가면 철령은 그리 높은 고개가 아닌데, 그는 왜 원루를 뿌리며 넘어가야 했나?
 당파에 초연하고 기개가 늠름해서 임금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이항복은, 선조의 계비이던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한 죄로 관작을 삭탈 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 되던 1617년이었다. 그는 북한강 줄기를 거슬러 회양 땅으로 들어온 뒤 철령을 넘으면서 이 시조를 남겼다. 그는 한 번 넘어간 철령을 다시 넘어오지 못했다. 그 이듬해인 1618년, 귀양지인 북청에서 세상을 마쳤던 것이다. 그가 철령을 넘으며 흘린 원망의 눈물이, 구중심처 임금의 머리에 비로 내린 것은 그가 세상을 마친 뒤였다. 그의 임 광해군은 그가 죽은 후에야 삭탈한 관작을 회복시켰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철령이 얼마나 험한 고개였기에 오성 이항복조차 다시 넘어오지 못한 것일까?
조선조 철종 때 사람 김진형은 상소한 것이 허물이 되어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가 남긴 '북천가(北遷歌)'에 철령을 넘어가는 귀양길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강원도 북관 길이 듣기 보기 같으고나/회양서 중화(中火·길 가다가 먹는 점심)하고 철령을 향해가니/천험(天險)한 청산이오 촉도(蜀道) 같은 길이로다//요란한 운무 중에 일색(日色)이 그치난다/남여를 잡아타고 철령을 넘난고야/수목은 울밀하여 암석을 가리우고/암석은 총총하여 업더지락 잡바지락/중허리에 못 올라서 황혼이 거의로다//상상봉 올라서니 초경이 되얏고나/횃불을 신칙(申飭)하여 화광 중(火光 中) 나려가니/남북을 몰랐거든 산형(山形)을 어이 알리//삼경에 산을 나려 탄막에 잠을 자고/새벽에 떠났으니 안변읍 어디멘고.'
 100여년 전만해도 업더지락 잡바지락 횃불을 달래가며 넘어가던 험로였으나 지금은 자동차도로가 뚫려서 안변과 회양이 잠깐이다. 그러나 자동차 길 한 가닥이 산의 모습 전부를 바꾼 것은 아니어서, 고려말의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이 남긴 '철령(鐵嶺)은 우리나라의 동쪽에 있는 요해지이다. 이른바 한 사람이 관에서 막으면 일만 명이 덤벼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철관의 험난함은 진실로 한 사람에게 지키게 하면 천만 명이 노리고 공격하여도 몇 해 몇 달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철령의 형세와 철령 주변의 자연이 지은이의 정감과 가장 잘 어우러진 글은 역시 김극기(고려 명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의 시 '철령'이다.
'높고 높아 끝없고, 거대한 형세가 관동을 누르도다. 꼭대기 하늘 끝까지 치솟고 뿌리의 깊이는 땅끝까지 이었네. 겨울의 위세는 봄에도 춥고, 어두운 빛은 낮에도 흐릿하네. 학은 산 허리 이슬에서 소리치고, 원숭이는 골 입구 바람에 부르짖네. 무너진 벼랑에 날아든 비는 검은 색이고, 빼어난 고개에는 저녁놀이 붉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티끌 세상과는 멀고, 앞 길을 찾으니 돌계단이 뚫렸네. 빽빽하게 모여선 봉우리는 수자리 서는 보루를 떠받들고 겹겹의 산들은 신령의 궁전을 안고 있다네. 붉은 기운은 높고 푸른 곳에 둘러있고, 붉은 아지랑이는 푸른 하늘에 뿜는다. 말굽은 나뭇가지 끝에 달려가고, 사람의 그림자는 구름 속에서 번득인다. 떨어지는 물은 은하수의 물결에 이어졌고, 수풀은 달 속의 계수나무에서 나뉘어 나왔구나. …바라보고 듣는 것이 다 특이하니, 조화의 공을 누구라 알겠는가?(동국여지승람)'
 내 발아래 산줄기는 억만년 전에 태어났건만 아직도 늠름하고, 김극기의 시는 몇 백년 전에 태어났건만 줄기에 매달린 머루송이처럼 싱싱하구나. 동해로 가는 물은 가파른 비탈을 뛰어내리며 부르고, 서해로 가는 물은 빗장걸이를 한 것 같은 계곡 사이로 돌아 내리며 반짝인다. 철령 험하다고 옛날부터 소문났건만 물길을 따라 올라온 집들은 머지 않아 산마루까지 서겠네. 사촌과 절골과 영후동이 오전 내내 길의 왼쪽을 따르며 손짓하네만, 내 길은 분수령을 벗어날 수 없다네.
고직령에서 풍류산 오르는 비탈에서 기운을 다 쏟았으니, 모처럼 경치를 즐기며 점심을 먹고 가자. 이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가 이 산 아래 금리(琴里)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씨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뒷산에는 오색 영롱한 구름이 감돌았다고 하여 이 산을 풍류산(風流山)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훗날 왕비의 탄강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다 한다. 순조 24년이던 1824년에 세웠다는 그 비석이 지금도 건재한 지는 모르겠으나 금리라는 지명은 지금도 있다.  
풍류산은 서북쪽으로 불거져 앉은 산이어서, 자연히 바람이 많이 닿을 곳이다. 풍류산 서쪽은 고음동(鼓音洞)인데, 계곡이 아름답고 유명한 고음폭포가 있어서 고산군의 명소로 꼽힌다.  
 풍류산 북쪽은 신고산이다. '신고산이 우루루/함흥차 가는 소리에/구고산 큰 애기/반봇짐만 싼다/어랑어랑 어허야 어야디야/ 내 사랑아' 경원선 신고산역에서 함흥가는 기차가 떠날 때마다 구고산 큰 애기는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한다는 내용의 '신고산타령' 즉 '어랑타령'이다. 풍류산이 이 부근 백두대간의 귀처럼 생긴 산이어서 그런지, 흐르는 바람에도 노랫가락이 섞여서 귓속으로 흘러든다.  
 마을이 가까운 산줄기를 탈 때는 길이 많은 것이 탈이다. 산줄기가 곧고 우뚝하지 않을 때는 더 그렇다. 고음동과 새터를 잇는 고개 부근과 현동 고개 부근이 특히 그렇다.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의 추포령(楸浦嶺)이 현동 서쪽 고갯마루 해발 754m되는 지점에 있는 고개 였을 것이다. 고지도의 내용이라 정확한 고증은 불가하지만, 동쪽과 서쪽에 마을이 밀집해 잇고, 안변과 회양을 가장 가깝게 잇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고개에서 두 개의 고개를 더 가로질러서 천천히 올라서니 청하산이다. '푸른 안개가 흐르는 산' 이름이 예쁘다. 풋풋한 빛깔이 스며 잇다. 그러나 이 청하산 비탈까지도 밭들은 나무를 밀어내고 올라와 있다. 저녁 바람에 수런거리는 옥수수 잎새 너머로 기적이 울려퍼진다. 청하산 정상에 앉으면 시선은 자연히 삼방쪽으로 향한다. 삼방은 추가령열곡을 지나가는 기찻길과 자동차길이 남대천과 가장 가깝게 지나가는 구간으로 옛 날에는 상방이라 불렀다.
 청하산에서 연대봉 분기점까지는 평지처럼 걸을 수 있는 길인데, 계속되는 기적의 여운에 이내 속의 나뭇잎처럼 흔들리며 걸어간다. 연대봉 분기점인 1,085m봉에 섰을 때, 삼방역에서 울리는 기적소리는 더 가깝고 크다. 내가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찻길 옆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기찻길과 남대천과 자동차길이 백두대간에 둘러싸인 협곡의 가장 저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가리개 역할을 하는 산이 없는 지점에서는 더 가깝고 크게 들리는 것이다.
 동쪽을 가리고 있는 봉우리는 연대봉 정상이다. 연대봉분기점에서 1km도 안된다. 이곳 연대봉도 다른 연대봉들처럼 밤에는 불꽃을 낮에는 연기를 올려 다급함을 전하던 봉수대 흔적이 있을 것이다.
 학미현까지 내려가야 마을이 있기 때문에 내 걸음은 쉴 틈이 없어서 그냥 내려가지만, 그 옛 날 회양쪽에서는 연대봉을 청화산(靑華山)이라 불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한 여지도서 609쪽 회양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오악(五岳)중 서악(西岳)을 화산(華山)이라 일컫기 때문이고, 지금의 연대봉이 회양부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오악은 중국 사람들의 중원사상의 영향인데, 우리 산하 도처에 사대사상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반면 삼방쪽에서는 청학산이라 불렀다. 삼방 쪽에서 보면 이 산은 날개를 활짝 펼친 푸른 새의 형국이다. 또 이 산의 서쪽에 청학동이란 마을이 있고, 청학동 동쪽 산마루에 있는 고개 이름은 학미현(鶴尾峴) 즉 학의 꼬리를 닮은 고개라는 뜻이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두 마을 사이에 우뚝한 산 하나가 있으면 서로들 마음에 드는 이름을 올리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돌아 학미현으로 내려간다. 또다시 기적이 운다. 이번에는 좀 더 길고 좀 더 은은하다. 기적 우는 쪽 마을에 불빛이 하나씩 돋아난다.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산들은 마을보다 일찍 이내가 퍼진다. 걷자.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을 만날 수 있으리라.
오백여년 전에 이 마을을 지나간 성현(成俔·1439-1504)은 노래했다.
'높은 산길을 다 지나 어지러운 나무 사이를 비스듬히 뚫고 나가니, 깊은 수풀에 판자 집을 열어 지나가던 나그네 말안장을 내리네. 골짜기 깊으니 구름은 언제나 어둡고, 산이 높으니 기온은 차구나. 서울이 여기서 몇 리일까, 돌아가는 꿈만이 날마다 멀고 아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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