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 해당화야! 오늘은 내 그리움의 전신이 너를 향하고 있다. 삭풍이 흐르는 하늘 가엔 기러기 떼 날고 있다. 어쩌자고 내 눈은 갈 수 없는 바다기슭을 헤매고, 추운 하늘을 더 좋아하는 새떼들을 불러, 수 억 년 그치지 않는 파도소리에 귀먹어 있을 네 머리 위를 날게 하나! 모래들도 밟히면 밟은 자의 발을 구덩이 속에 가두며 우는소리를 내는데, 명사십리 해당화야! 네 울음소리는 파도소리가 삼키고, 네 노란 꽃술엔 벌이 앉았구나! 내가 찍지 않은 사진 속에서,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웃고있는 해당화! 철모르는 해당화야! 명사십리를 맨발로 걸으며, 네 향기를 맡고 싶다.
'너는 지금 이 눈에서 멀고 / 명주조개 찾으러 / 몸 잠그고 헤엄치던 물들아 / 지금은 너무 아득한 저 하늘 밑 / 알알이 미끄러져 날리던 모래에 / 기대고 히살지으며 마음 부풀던 시절' ―모윤숙의 시, '해당화로 덮인 흰 모래벌'
명사십리 해당화야!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던 통큰 시인, 원산의 딸 모윤숙도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워하던 고향, 모래벌과 해당화를 가슴에 품고 갔다. 네 향기를 직접 맡아본 일없는 나는 사흘을 바람 속에 있다. 꽉 막힌 바람 속에!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목이 쉰 까마귀처럼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지도 위를 걷고 있다. 나는 너의 향기는 모르지만, 동백꽃 향기는 안다. 1월에도 꽃이 피는 남해안에서 돌아왔다. 다도해 동백꽃 향기에 비틀거리다 왔다. 한 겨울에도 쑥이파리가 시들지 않는 난류를 가득히 품었다. 이 따뜻한 남쪽 바람을 너에게 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내 두 발이 천령 눈 속에 서있다.
천령 떠나 노인치에 도착할 때까지, 내 희망은 두 번을 쉬었다. 내 눈길 닿는 산모퉁이마다, 동백꽃이 피었다. 내 눈길 닿는 수평선마다 해당화가 피었다. 내 안경 앞이 온통 해당화와 동백꽃 천지였다. 떠나온 땅과 갈 수 없는 땅의 바람이 뒤섞이며 꽃잎을 흔들었다. 내 발등이 온통 꽃잎이었다. 아니다. 내 두 발이 새하얀 눈 속에 빠져 있었다. 갈 수 없는 바다를 생각하며, 동해의 여름꽃과 남해의 겨울꽃을 동시에 그리고, 내 발등을 덮고 있는 눈을 보았던 거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던 거다. 시리도록 푸르러 눈물이 흐르는 하늘을!
이상난동! 눈 없는 겨울! 긴 가뭄에 목이 타는 산하여! 응달의 눈조차 봄날의 잔설처럼 깊지 않아서, 우리 걷기에는 좋다만, 목마른 나무들의 신음소리에 애가 탄다. 백암령 고갯마루에서는 나무하러온 아이를 만났다. 까만 손과 야윈 얼굴에 눈만 반짝이는 소년. 나도 너만 할 때 나무하러 간 적이 있었다. 소나무 삭정이와 잡목 그루터기가 제일 좋은 땔감이었지만 그런 건 많지 않았다. 너는 무슨 나무를 제일 좋아하니? 친척집에 놀러가서 어쩌다 나무한 일, 내겐 추억이 되었지만, 이 아이에겐 비켜갈 수 없는 현실이다. 이름도 사는 곳도 말하지 않고 열두 살이라고만 말하는 소년과 헤어져, 작은 봉우리 하나 넘어서기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고춘봉에 올라서니 해가 정수리에 왔다. 고춘봉은 안변과 원산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이번 산행에는 산악자전거의 달인 백은식씨, 산악스키의 이등병 이도윤씨, 현장 독도의 고참 김봉관씨가 지원을 나왔다. 이 세 분만 있으면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무섭지 않다. 이도윤씨의 무쇠솥에서 마른 누룽지가 끓어서 퍼질 동안, 세분은 소주병을 따서 언 속에 군불부터 지피고, 나는 설 끓은 숭늉부터 떠서 마시고, 원산 앞 바다를 내려다본다.
원산만은 금강산 아래 장전만 비슷하게 생겼는데, 훨씬 규모가 크다. 호도반도와 갈마반도가 두 팔을 구부려 난바다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기 때문에, 동해안을 대표하는 천혜의 항구다. 이런 자연조건 때문에 아늑한 바다기슭에 명사십리와 송도원 같은 모래밭도 생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원산! 원산은 100여 년 전 만해도 원산포라 불리던 한산한 포구에 불과했으나, 원산이라는 작은 포구를 품고 있던 덕원(德源)은, 이씨조선 목(穆)·익(翼)·도(度)·환(桓) 4대 어향(御鄕)으로 추존 받던 땅이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가 전주로부터 삼척으로 옮겼다가 또 본부(덕원)로 옮겨오니 170가구가 따라왔다. 본부 남쪽 용주리(湧洲里)에 살며 익조를 낳았고, 익조가 경흥부로 옮겨 살더니 난리를 피하여 적도(赤島)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곳(용주리)으로 돌아와서 적전사(赤田社)라 이름을 고쳤는데, 경흥의 백성들이 뒤따라오는 자가 시장에 가는 것 같았다. 또 함흥 송두등리(松頭等里)로 옮겨 도조를 낳고, 얼마 안되어 도로 적전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도조때 쓰던 문짝이 지금도 본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동국여지승람 덕원도호부편 용주리)' 작전사 즉 용주리에서 이성계가 태어났고,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의 조선을 건국시켰다. 그러므로, 안변, 원산, 문천, 옛 함경남도 일대와 함흥 등은 이씨조선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00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德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다. 면면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 악장(樂章), 왕업의 아름다움을 찬송하였네.'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수녕(金壽寧·1436-1473)은 이렇게 덕원을 예찬했다. 반도란 3000년만에 한번씩 열매가 연다는 복숭아, 즉 선도(仙桃)를 뜻하고, 선리(仙李)란 이씨조선의 왕이 이씨였으므로 '신선이씨'라고 미화하여 말한 것이다. '오이덩굴 한 악장이란, 시전에 주나라 왕실을 예찬한 노래 중 '면면하게 뻗어가는 오이덩굴'에서 본 딴 것이다. 김수녕은,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고, 성종때는 호조참판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용의 자품이 실로 이 천년의 땅에서 탄강하셨으니 왕실의 역수(歷數)는 응당 억만년을 이어 전하리라' 이것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계유정란의 공신 박중손(朴仲孫·1412-1466)의 글이다.
'도문을 떠나서 북녘 고을에 와서야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개인 맑은 흥취 나그네 시름을 잊게 하네. 누대(樓臺)의 그림자는 하늘이 낮은 곳에 거꾸러졌고 산악의 정기는 땅이 다한 머리에 쌓여있네. 푸른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햇바퀴는 바야흐로 새벽이 되는데, 적전(용주리의 별칭, 도조가 있던 집. 즉 이성계가 태어난 집)에 난 꽃나무는 가을을 모른다네. 패땅의 옛 물건 이끼 낀 사립문이 있는데, 촌옹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네.' 이것은 허종(許琮·1434-1494, 조선 초기의 문신)의 시. 모두 세조 조의 공신들로 '덕원'이란 땅과 '이씨 왕조'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글들이다. 한 시대의 격랑을 죽지 않고 넘으며 입신양명까지 하려면, 붓은 이처럼 무릎이 닳아야 했던 것이다. 한때의 인걸들은 백년도 못 살고 사라지지만, 그 시절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굴욕과 애환, 생존의 방식까지 가름하게 하지 않는가!
신령을 지나 성재산에 올라서니 바다가 더 잘 보인다. 내 팔다리가 제주도 설화 속의 설문대할망처럼 크고 길었더라면 성재산에 엉덩이를 걸치고 원산만에 두 발을 담그고 송도원과 명사십리 해당화를 후두둑 깨워서 여도에도 한 무더기 옮겨 심어 놓고, 내 가슴에도 한 무더기 심어놓고, 호도반도 호랑이를 깨워 지키게 하련만, 아서라 이 추위 속에서는 헛꿈도 죄가 되리.
원산지방은 항구와 바다에 면하고 있어서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영흥만 연기설화'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옛날, 아주 옛날, 이 땅이 생기던 때. 백두산에 살던 호랑이가 굶주리다 못해 마천령에서 내려다보니, 낭림산 중에는 곰·이리·돼지·말·노루·토끼 등의 온갖 짐승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게 보였다. 군침이 돈 호랑이가 어흥하고 개마고원에 앞발을 내딛는 순간, 혼비백산한 짐승들은 엉겁결에 동해 바닷물로 뛰어 들었다. 배가 고픈 호랑이도 작은 짐승들을 잡으려고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동물들은 결사적으로 헤엄을 쳤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두산 산신령이 호랑이에 쫓기는 작은 짐승들을 구하려고 오른 손을 내밀어 호랑이 꼬리를 움켜잡았다. 호랑이는 꼬리를 잡힌 채 길게 늘어나면서 영원히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호랑이는 꼬리부분이 잘룩하게 빠지다 말아서 호도가 되고, 헤엄을 잘치는 곰은 웅도가 되고, 말은 여도에, 토끼는 모도에 숨고, 큰 돼지와 작은 돼지는 마을 근처로 피난하여 대저도와 소저도를 이루었다 한다.'
후소령에서 1,022.4m봉 오르기가 내겐 고역이다. 수침리 고갯마루에 오니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김봉관씨와 이도윤씨는 물을 찾아 내려가고, 백은식씨와 나는 텐트 칠 자리를 물색한다. 저녁이 끓을 동안 별들이 총총해졌다. 그러나 산 위의 밤은 추워서 별을 바라보며 서정을 읊조릴 처지도 아니다. 내일 길을 생각해서 일찍 자자 일찍 자자 노래를 부르다 나 혼자 먼저 드러누웠는데, 깨어보니 이튿날 아침밥이 벌써 끓고 있다. 잠보다 술이 좋고, 친구가 좋은 남자들이, 언제 잠들고 언제 일어나서 밥까지 지은 것일까? 나머지 길에는 삭풍 대신 미풍이 나부끼리라.
1,022.4m봉에 올라서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원산 구경, 법동 구경, 첩첩이 늘어선 산자락 구경. 하늘하늘 구름 흐르는 겨울 하늘 구경. 한없이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마식령 찾아서 내려가는 길. 응달에는 눈 깊은 비탈이 제법 있어서 스패츠를 둘러야 하지만, 얼었다 녹았다하는 얼음길보다는 걷기 편하다. 구부정한 허리를 볕 쪽으로 돌리고 있는 소나무들 곁을 지나, 나목들의 숲을 헤치고 지나간다. 나흘 치의 식량과 텐트며 침구까지 챙겨지고 가느라, 모두들 짐꾼처럼 헉헉거리면서도 불평 없이 목표지점을 향해 걸어간다. 그늘 깊은 쪽 산기슭엔 하얀 눈이 남아있어서, 몇 겹의 능선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건너다보는 산의 굴곡이 가히 매력적이다. 고도만 높을 뿐, 이곳 또한 우리 산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마식령 내려설 때까지 삼각점 하나 없는 능선 길. 표지판은 더더욱 없는 길. 굽이치는 산자락을 요리조리 달래며 작은 봉우리, 작은 지능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니 몇 배나 힘이 든다. 마식령으로 이어지는 산간도로가 산기슭을 파면서 올라오는 게 보이는 지점까지 그렇게 왔다. 해는 어느새 서산 마루에 걸렸지만 우리는 좀더 가기로 한다. 마식령 부근이 온통 다락밭이어서 야영을 할 만한 곳이 마땅찮기 때문이다.
'철관성 밑의 길은 먼데 / 눈에 가득한 물결에 해마저 기우나니 / 남으로 가고 북으로 오는 동안 봄도 다하려하여 / 말머리에 해당화가 간 곳마다 피었네' ―변중량(卞仲良)의 시, '철관도중(鐵關途中)'
마식령 부근에서 반룡산을 거쳐 동해로 빠지는 산줄기 남쪽에 철관(鐵關)이 있었다. 안변과 회양의 경계에 있는 철령과 함께 관서 지방을 지키던 주요 관문이었다. 희끗희끗한 눈 속에 옥수수 대궁이 삐죽대는 밭두렁들이 길게 누웠는데, 저 밭두렁들 넘어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옛 사람들 별빛으로 돌아와 두런대는 마을이 있으련만, 우리들의 길은 빗방울도 동서로 나뉘는 분수령 위에 있다.
겨울 해는 일찍 저문다. 산 속의 해는 더 일찍 저문다. 마식령에서 갈골령 쪽으로 2km쯤 더 걸어오니 이미 어두웠다. 어둑한 비탈에 텐트를 치고 또 하룻밤을 기댄다.
해당화 피는 바다는 멀어도, 두둥실 떠오른 저 둥근 달빛은 해당화 피던 동해안과 동백꽃 피어있는 남해안, 우리들이 텐트를 친 산기슭을 함께 비추겠지.
[제10구간], 삭풍 흐르는 하늘가엔 기러기 떼 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