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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구간],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제11구간 마식령∼갈현∼명우래령∼다락산∼두류산∼회동현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이  향  지
 
 가다보면 길이 있더라. 꽉 막힌 길.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길. 단념하고 지도 위에서나 걸어보던 산길이 꿈속처럼 열리는 날도 있더라. 금강산이 그렇게 열렸다. 이제는 백두산과 칠보산이 들먹거린다. 오늘 내가 걷고 있는 백두대간이 활짝 열릴 때까지, 지도 위에서나마 길 잃지 않고 백두산 향해 걸어가리. 하고싶은 말 다하지 못해, 옹이 같고 송곳 같이 가슴에 박혀 있지만, 이 산줄기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면, 백두산정에 내 몸이 우뚝 설 날 반드시 있으리.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 겨울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ㅎ던 빛깔도 / 설레이는 몸짓들도 / 깡그리 거두어간 기술사의 모자 // 앙상한 공허만이 /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 차라리 /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 죽어지고 숨어야하는 이 계절엔 / 나의 뜨거운 노래는 /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 … // 마침 비굴한 목숨은 /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 무쇠 연자를 돌릴 지라도 /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 들어 보라. /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 여기 진실은 고독히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의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중에서
 소한을 앞두고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다. 아침 지을 물이 얼었다. 뽀얀 숨결에 섞였던 수증기가 눈썹에 얼어붙는다. 허공을 떠돌던 물기들은 마른 풀잎과 나뭇가지에 매달려 눈부신 설화를 피웠다. 보는 눈은 즐겁지만, 언 것들을 녹이느라 연료가 더 많이 든다. 나는 하룻동안 먹을 물을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다. 세 분은 추우면 소주로 속을 뎁히겠지만 나는 뜨거운 물을 마시며 견딜 수밖에 없다.
 언 땅에 묻어야 할 노래는 더 넉넉하고 더 뜨거워야 할텐데, 내가 준비한 것은 고작 한 병의 더운 물. 그것도 오늘 하루 견디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이제부터 내 몸이 언 땅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리. 마지막 한 방울이 다할 때까지 내 배낭 속에서 내 어깨를 짓누를 더운 물 한 병은, 내 몸과 영혼이 얼지 않게 나누어 마시며 불러야할 뜨거운 노래에 다름 아니다. 내 배낭 속 보온병 속의 뜨거운 노래가 오래 식지 않고 오래 남아 있도록 하려면, 내 두 발에 실려있는 뜨거운 노래를 계속 되살려야 하리. 목숨보다 뜨거운 노래는 아직 듣지 못했으니!
 튀밥처럼 하얗게 언 밥을 폭폭 끓여서 나누어 먹고, 하룻밤 사이에 눈썹이 하얘진 네 신선이 출발한다. 갈골령 부근에서 샘물을 찾아 점심이나 걸게 끓여 먹읍시다. 죽발이 척척 맞으니, 신선이라거나 생선이라거나, 개의치 않고 껄껄 웃으며 걸어가는 거다. 저 넉넉한 웃음들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나는 안다. 김봉관씨 배낭 구석에 됫병 소주가 한 병 남았기 때문이다. 25% 짜리 희석식 소주가 연출할 따끈따끈한 저녁을 향하여! 저렇게 희희낙락 걸어가는 거다. 어서어서 걸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다 죽여버립시다. 될까?
 갈골령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백은식씨와 이도윤씨는 물 뜨러 가고, 김봉관씨는 소주 한잔을 시식 중이다. 덜덜 떨면서 둘러앉아 김치찌개를 끓여먹고 두류산 향해 가는 길이 갈짓자로 비틀거린다. 감산리고개에 내려서니 오후2시가 넘었다. 명우래령에서 잠시 쉬며 물통마다 물을 가득 채우고, 물 있는 곳에서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을 끓여먹는다. 얼어죽지 않으려고 더운 음식을 먹고 옷을 잔뜩 껴입고, 잠자리를 찾아 다락산으로 올라간다. 다락같이 높은 산허리에 바람막이 바위 곁에 텐트를 쳤다. 잠든 사이에 뜨거운 노래들이 식지 않게 가진 옷을 모두 껴입고, 물3 알콜1 비율로 희석된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드르렁 쿨쿨 코고는 소리가 멀고 먼 바다 밑에서 잠자던 햇바퀴를 머리 위에 띄워 올릴 때까지, 곯아떨어졌다.
 다락산에서 두류산까지는 가장 힘든 구간이지만, 그동안 먹어치운 식량과 소주가 무게를 줄여주었기 때문에, 세분은 짐이 줄었다. 그러나 내 짐은 그대로다. 반쯤 가다 이도윤씨가 자기 배낭 위에 내 배낭을 모로 얹어서 지고 간다. 날씨는 어제보다 더 추워졌지만, 계속 걷고있으니 얼굴만 춥다. 삭풍을 마주하고 걸어야하는 곳에서는 목출모까지 둘러쓴다. 이런 추위에 눈까지 펑펑 쏟아졌더라면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류산은 산세가 두터운 육산이다. 백두대간 상에는 똑 같은 글자를 쓰고, 이보다 높은 두류산이 하나 더 있다.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일면과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면 사이에 있는 두류산(頭流山·2,309m)이 바로 그 산이다. 또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성종 때의 문인 김종직이 쓴 '유 두류록(遊 頭流錄)'은 유명한 지리산 기행문이다.  
 오늘 우리가 삭풍을 가르며 오르고 있는 이 두류산은 옛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 풍상면과 평안남도 양덕군 대륜면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1,323m 문천읍에서 남서쪽으로 약25km 떨어져 있고, 원산시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다. 두류산 주변에는 구산덕(九山德), 동곡덕(東谷德), 봉산덕(鳳山德), 승지덕(勝地德)등 둥글넓적한 봉우리들이 여러 개 발달되어 있어서, 제주도의 '오름'들을 연상시킨다. 두리뭉실한 산봉우리를 이 지방에서는 '덕'이라 하고 제주지방에서는 '오름'이라 부르는 것이다.
 다락산에서 두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분수령 왼쪽(동남쪽) 비탈은 갈수록 좁아지며 급경사를 이룬다. 저 가파른 비탈을 뛰어내리는 물이 바로 임진강의 원류이다. 경기도 판문군에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게 된다. 그 비탈엔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이 분수령 반대편(동쪽과 북쪽) 비탈의 물은 신풍리쪽으로 흘러 덕지강과 합류하는 전탄강(箭灘江)이 된다. 물길이 좁고 가팔라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여울을 만들며 흐른다하여 전탄강. 우리말로 풀어쓰면 '살여울강'이다. 백두대간에서 동해로 흐르는 강물들은 대부분 이 살여울강처럼 물매가 급하고 길이가 짧다. 두류산 허리에는 실상암(일명 見性庵)이 있었다. 이 산에는 소나무 중에서도 최상의 목재로 치는 황장목이 많다. 그러나 바람 센 능선에서 살아남은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허리가 굽고 몸통이 뒤틀렸다.
 다락산 떠난 지 3시간 반만에 두류산 정상에 섰다. 날아갈 듯 바람이 불어 정상엔 오래 서있을 수가 없다.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 내 발은 눈 속에 있다. 명월 대신 태양이 눈부신 대낮이다. 오전 11시 30분. 해서정맥을 이루며 아호비령쪽으로 내려서는 능선 너머로 첩첩한 산줄기 본다. 한꺼번에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새떼의 날갯짓 같은, 산산산산산. 저 무수한 산산 너머에, 내 발아래 눈이 녹아 흘러들 또 하나의 바다가 있을 것이다.
 두류산 정상에서 회동현을 향해서 내려가는 길 왼쪽 비탈의 계곡은 이름이 두류산골이다. 두류산골 물은 대동강의 남쪽 강, 즉 '남강'을 이루며 흐르다, 대동강 원류에 합류한다.
 두류산 산세는 두리 뭉실하지만, 한 걸음씩 걸어서 내려가는 길에는 무수한 돌과 나무뿌리가 얽혀있다. 두터운 흙 속에 뿌리 내린 나무들은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있다. 좋은 흙을 만난 나무들은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산다. 늙은 나무들은 바람에도 추위에도 초연한 몸짓이다. 가지 끝만 조금씩 흔들릴 뿐이다. 언 땅에서 저만큼 줄기가 굵어지려면 뜨거운 노래를 얼마나 많이 삼켰을 것인가. 얼마나 많이 제 뿌리를 닥달하였을 것인가. 서 있는 고통과 흔들리는 고통을 참아낸 나무들만이 고목이 되어 이 산을 지키고 있다. 수많은 어린 나무들 둘레에 거느리고, 미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락산 떠나 회동현 내려설 때까지 우리가 만난 건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나무와 돌―. 3박4일간의 추운 산. 바람 센 모퉁이마다 보온병을 열어야 했지만, 뜨거운 노래는 아직 남아있다.  
 맞은 편 산머리. 이글이글 지는 해. 돌아보니, 두류산이 더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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