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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구간], 길에 취하고 길에 홀렸다, 우리는 이 맛에 걷는다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
길에 취하고 길에 홀렸다, 우리는 이 맛에 걷는다
제12구간 : 회동현∼신재령∼재령산∼기린령∼박달령∼거차령
                                                           이  향  지

 하룻밤 눈 내리고, 꽁꽁 얼게 닷새 춥고, 이틀째 포근하다. 그 포근한 기운 믿고 회동현까지 왔다. 꽁꽁 얼게 춥던 닷새 중 세 번째 날이 입춘이었다. 입춘 문턱은 넘었으나 봄은 아직 아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써 붙일 솟을대문도, 둘러서서 덕담을 주고받을 인정이나 여유도 멀어진지 오래지만, 그런 풍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으니, 남과 북이 한 자리에 앉아 말문을 틀만한 재료는 남아있는 셈이다.
 일년 열 두 달, 스물 네 절기. 때맞춰 얼고 때맞춰 녹고 때맞춰 흐르고 때맞춰 시드는, 흙과 바람과 물과 햇볕과 초목들처럼,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들. 그분들이 남긴 땅덩이에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분계선이 생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생이별의 한을 품고 늙고 죽어가건만, 그 분계선 걷힐 날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은 누군가 오고간 흔적, 핏줄 따라 그리움 따라 찾아가고 찾아오라고 있는 것일텐데, 흐르고 싶은 것들 흐르게 하고 손잡고 싶은 것들 손잡게 해야할텐데, 또 한번의 입춘이 지나고 새로운 세기가 문전에 도착했지만, 수많은 이산가족 애절한 소망들, 겨울바람에 흩어지는 갈꽃의 낟알처럼 뿌리내릴 곳 없다.
 자연의 희망에 역행하는 문명의 그림자까지 짙게 겹친 탓인가, 이번 겨울은 눈마저 드물다. 목마른 대지. 목마른 계곡. 저수지마다 물이 줄어 바닥에 얼음 방석을 깔고 있었다. 우수와 경칩 지나도록 이처럼 가물다면, 이 산천의 풀과 나무들, 피라미와 개구리들, 벌과 나비들, 겨울잠을 털고 일어설 여력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재령산 정상 용연 가에서 떠들면 비가 온다니, 거기 올라 기우제 삼아 소리나 질러볼밖에!
 고원과 양덕을 잇는 산간도로.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회동현 마루턱을 뒤로하고 968m봉 기슭으로 올라섰다. 삿갓처럼 둘레가 넓고 오똑한 정상. 대간 능선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두리 뭉실하면서도 가파른 산비탈. 허벅지벅 오르다 돌아보면 두류산이 있다. 한 달 전 석양빛에 발그레 물들었던 두류산도 누군가의 머리칼처럼 희끗희끗하다. 양지쪽은 눈이 없지만 응달진 산기슭엔 하얀빛이 그대로 남았다. 능선의 나목들, 무수히 겹쳐진 잔가지 사이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파고든다. 주홍빛 햇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능선들의 곡선이 사뭇 관능적이다. 나 어릴 때 살던 초가지붕의 곡선미도, 우리 산자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봉밥 같은 무덤의 모습도, 우리 한복의 저고리 소매선(線)도, 시골집 마당 장독대를 지키는 장항아리들의 옆선(線)도, 바로 저 눈 덮인 겨울 산, 대지의 솜털 같은 나목들 불타는 아침 능선의 관능미(美)를 그대로 옮겨놓았던 것이 아닌가.
 관유령 지난 뒤에 아침을 끓여먹자 했는데, 관유령 직전봉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황당쪽으로 내려섰다. 이번 구간은 시작부터 황당한 일을 당한다. 지도에도 없는 길에 우리는 유혹 당했던 거다. 잠깐 사이에 내려온 산비탈 오래 투덜거리며 올라간다.    
 내 발아래 산, 지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 일대의 산 옛 이름은 '갓' 즉 '삿갓'을 연상시키는 '가사산(加沙山)'이었다. 우리가 출발한 회동현의 옛 이름은 '串'의 의미가 '꽃' 으로 변질된 '화여령(花餘嶺)'이었다. 조금 후에 지나가게 될 '관유령(串踰嶺)'은 조선총독부 제작 지도에서 찾은 이름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관여령(串餘嶺)'으로 기록되었다. '화여령'도 '관여령'도 '관유령'도 '串'처럼 가파르고 삐죽거리는 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이므로 '곶이령'이라 불러야 더 가깝다. 현대지도에 나타난 위치는 약간씩 어긋나지만, 고남리·고장백이 등, 이 산 주변의 지명에서도 낌새를 챌 수 있듯이, 회동현에서 신재령에 이르는 이 산 덩어리 모두가 '곶'처럼 생긴 지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串踰嶺'도 '관유령'이라 읽지 않고 '곶유령'이라 읽는 것이 본래의 이름에 가깝다. 이 지방 토박이들에게 물어보면 '화여령'도 '관여령'도 '관유령'도 아닌 '곶이령'이나 '꼿이령', '꽃이령' 또는 '꽃네미고개'나 '꽃넘이고개'로 발음할 것이 분명하다. 강원도 정선 여량리 조양강변 당너머 뒤쪽의 '꽃벼루'를 그 지방 토박이는 '곶이비리', '꽃비리'로 발음하는 것처럼-. '곶'이 '꽃'으로, '꽃'이 '花'로 둔갑을 한 흔적이, 강원도와 충청도 내륙에만 있지 않고 함경도와 평안도 접경 내륙에도 있다는 발견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산자락은 긴 꽃잎이 첩첩이 모여 만개한 실국화 송이 같을 거다.  산자락 전체에 하얀 눈이 덮이고, 바람이 눈 속에 서 있는 나목들을 흔들 때 내려다본다면,  만개한 국화송이가 바람 속에서 고개를 젖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고 아름다우리라. 그러나, 굴곡이 심한 능선을 헤치고 가느라 자꾸만 길을 잃는 우리.
 관유령 직전봉에서 아침을, 1,053.9m봉에선 점심을 먹었다. 한낮의 기온은 얇은 옷을 입고도 걸을만했지만 오후 4시 재령산 정상에 섰을 때는 쌀쌀해져서 방한복들을 껴입었다. 재령산 정상에서 1km쯤 내려온 곳. 바람막이 바위 앞에 텐트를 쳤다. 이번 산행에는 정맥답사를 오래 같이해온 이창기씨와 위수현씨가 지원을 나왔다. 저녁 햇볕에 시린 등을 말리고 있는 암릉들. 나는 내일 통과해야할 암릉들이 사뭇 걱정인데, 두 분은 아무 걱정 마시고 저녁이나 든든히 잡수시란다. 이창기씨 부인이 담아보낸 솔잎술도 한 잔 걸치고, 위수현씨 부인이 만들어보낸 북어찜도 한 점 삼키고, 텐트 밖으로 나서서 뭇별을 부르는 저녁. 재령산 정상을 지나왔지만 용연이 어딘지 몰라, 떠들어도 비가 오지 않는 것일까. 갈수록 별빛만 찬란해진다.    
 우리가 텐트를 친 곳에서 왼쪽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면 양덕군 문동에 닿을 것이다. 얼마나 큰문이 있기에 이름이 문동일까? 우리는 모든 문이 활짝 열린 산 속에서 덜덜 떨면서 별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텐트 한 동. 우주 공간의 미아 같다. 좋아서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이 길을 걷겠는가. 고원쪽의 불빛은 한층 더 가뭇하다.
 시마(詩魔)에 홀려 팔도의 산천을 헤매던 고려조의 시인 김극기(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 때의 문신)도 고원을 들렀던 모양이다. '고원역(高原驛)'이란 칠언율시가 시린 날 별빛처럼 가슴에 스민다.  

'한 세상 백년에 어느덧 오십 / 기구한 세상 길에 통한 나루가 적으니 / 삼년을 서울 떠나 무슨 일을 이루었나 / 만리에서 집에 돌아오니 다만 이 몸뿐이로세 / 숲새는 정이 있어 나그네보고 우는구나 / 들꽃은 말도 없이 웃으며 나를 만류하네 / 시마(詩魔)가 도처에서 와 성화대니 / 곤궁한 시름 말고는 벌써 괴로운 일일세(김극기의 시, '고원역')'

 고원은 함경남도의 삼거리 같은 고장이어서, 경기·강원·평안·함경 각도 사람이 머물렀기 때문에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노래 또한 많다. '서쪽이라 양덕 길은 높기도 한데 / 날 두고 임 가신 아득한 길 / 그 많던 버들가지 다 훑도록 / 아가씨 눈물은 달 밑에 지네'라는 민요. '저 들판에 송아지는 시금질만 하는데 / 이내 가슴 썩는 속은 방망이질만 하누나 / 어랑어랑 어허랑 / 어루람마 디허라 / 이것도 내 사랑이로구나'하는 '어랑타령'. '요문갑사 도홍치마 / 자락들어 꽃을 매고 / 초록 적삼 만호장에 / 자색 고름도 너울너울 / 후여넝층 버들가지 / 저 가지를 툭툭 치자'라고 부르는 '단오요'. 아이들이 다리를 쭉 뻗고 마주앉아 다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한알똥! 두알똥! 세알똥! 네알똥! 장군아! 멍군아! 고드레! 땡!'에 걸리면 다리를 당기는 놀이를 하며 부르는 동요 등이 있다.
 예전의 고원은 꽤 풍요롭고 흥청거리는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박원형(朴元亨)의 시가 있다. '백성들은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되고 / 곡창에는 9년이나 쌀이 묵었구나 / 성인의 덕이 점차 동쪽으로 뻗으니 / 남쪽 들판엔 누운 송아지도 많구나'
 절기도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사람도 잠깐 사이에 지나가나니. 길을 집 삼아 떠돌던 나그네들 돌아간 곳 어딘가. 나목처럼 흔들리다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어 춥다! 어어 춥다! 소리에 깨어나니 아침이다. 어어 춥다! 면서도 어느새 일어나 밥 다 지어 놓은 이창기씨. 덕분에 일출을 본다. 첩첩한 산머리 안개자락을 흔들며 떠오르는 태양. 텐트 자락을 젖히고 가득히 안아 들인다. 햇살 따라 냉기와 바람도 함께 들어온다. 길에 취한 우리 마음 훈훈하게 뎁혀주는 저 겨울햇살! 우리 앞에 줄줄이 늘어선 암릉들도 풍우에 씻긴 가슴을 열어젖히고  기지개를 켜는 것 보인다. 우리가 잠든 사이 대기의 물기는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눈부신 설화를 피워놓았고.
 출발! 오전 8시 30분. 우리가 야영한 곳에서 1,183.7m봉까지는 2.5km밖에 안 되는데, 대부분 응달 속을 걸어오느라 두 시간이 걸렸다. 커피 한 잔 씩 끓여 마시고 940m고개를 찾아 내려간다. 능선이 오똑해서 길 잃지 않고 십자로 안부를 지났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 점심을 먹고 회평마을 고갯길에 도착하니 오후 2시, 기린령 통과 오후 3시, 기린산 마루에 서니 오후 4시가 가깝다. 대간을 따라 500m쯤 더 내려와서 민가 가까운 곳에 텐트를 쳤다.
 기린령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기린산 치마바위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라고 한다. 이성계 이야기는 안변에서도 고산에서도 원산에서도 했는데, 이성계에 얽힌 일화는 백두산까지 따라올 모양이다.
 셋째 날 아침. 여전히 쾌청하다. 오늘은 기린산에서부터 조개덕산 분기점까지 갈짓자로 비틀거리는 능선을 타야한다. 점심은 행동식으로 때우기로 하고, 세 사람이 번갈아 책임독도를 하면서 진행하기로 한다. 조개덕산 분기점까지는 이창기씨가 맡고, 박달령까지는 위수현씨, 거차령까지는 내가 앞장을 선다. 조개덕산 오름길에서 내 속도가 조금 늦었을 뿐, 굴곡은 심하지만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서 큰 부담 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과 돈독한 팀웍이 가장 큰 도움이었다. 거차령에 내려섰을 땐 오후 5시.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다. 걷고있을 동안 까마득히 멀어져 있던 추위와 피로가 한꺼번에 엄습한다. 나무꾼도 사냥꾼도 아닌 우리, 어떻게 걸어왔을까? 길에 취하고 길에 홀렸었다. 우리는 이 맛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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