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서서 마시는 더운 물 한 잔의 행복
제14구간 : 백두산∼백산∼미산령∼장포령∼운봉∼거산령
이 향 지
백두산에서 백두산까지는 570km. 밝음에서 밝음까지의 거리처럼 멀어 보인다. 우리는 아직 고원군 경계에 있는 백두산에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더 돌아왔을 때. 백두산 정상에서 보게 될 일출. 그날의 광휘와 감격을 미리 그리며 백두산 비탈을 내려간다.
간밤엔 새벽까지 바람이 불었다. 우리 텐트는 백두산 정상 바로 아래 큰 바위에 기대 있었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센지, 텐트가 우리를 담은 채 원산 앞 바다까지 날려가서 풍덩 빠지는 줄 알았다. 우리는 가볍고 얄팍한 집과 지붕을 바람에 뺏기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했다. 바람이 덜 닿는 쪽으로 텐트를 옮기고, 소나무 둥치에 잡아매고, 큰돌을 들어다 귀퉁이를 누르고, 텐트 안에서는 바람 부는 쪽에다 배낭을 몰아서 눌러놓고…. 잠은 좀 설쳤지만, 우리는 바람을 이겼다. 우리는 아직 바다로 갈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 산길 따라 도상거리 570km를 더 걸어야 한다. 저 텐트는 철옹성 도착할 때까지 우리에겐 유일한 집이다.
정상은 잠깐 스쳐 지나가야지 텐트 치고 잠잘 곳은 못된다는 걸 알았다. 김종선 선생 말씀대로 500m쯤 더 내려간 안부에 텐트를 쳤어야 했는데, 백두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고 내가 우겼기 때문이다. 결과, 잠도 설치고 일출도 놓쳤다. 다음엔 정상에서 자자고 우기지도 못하게 되었다. 밤새도록 우리를 흔들던 집과 지붕이, 이상년씨의 배낭에 꽁꽁 묶여서 백두산 비탈을 내려가고 있다. 우습다. 나는 "눈물도 아낍시다"는 규칙에 묶여서 양치질도 제대로 못했다. 우리는 눈을 녹여서 얻은 물에 밥을 지어먹고, 눈물을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다. 눈물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 연료는 우리의 생명 줄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도 아끼자'고 규칙을 정했다.
백일동안 어두운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는 웅녀를 어머니로 삼은, 단군의 자손들이어서 일까? 우리 민족은 유난히도 밝은 것을 좋아한다. 백의민족은 우리민족의 표상이요, 백두산 이름도 '밝음'을 상징하는 산 이름이다. 백두대간에 있는 백산과 백두산이 모두 몇 개나 되는지는 백두산 장군봉까지 걸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어둠보다 밝음을 지향하는 민족정서에는 하늘의 빛에라도 기대어 추위와 어둠을 이겨보려는 서러움이 짙게 깔려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잠을 잤던 백두산도 점심때쯤 도착할 수 있을 백산도, 우리 민족의 표상처럼 '밝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 산머리에 솟은 암봉 빛깔이 하얗기도 하지만 이 산을 바라보면 먼 북쪽에 있는 백두산이 생각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고원과 신양의 경계에 있는 이 백두산 일대의 산 덩어리 전체는 옛 이름이 오강산(吳江山)이었다. '양덕 현에서 북쪽으로 150리, 分三岐'가 산경표의 내용이고,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는 이 백두산 서쪽 지역이 양덕군 오강면이었다. 분단후 양덕군을 둘로 나누어 오강면 쪽이 양덕군에서 신양군으로 바뀐 것만 다르다. 오강산이 백두산으로 바뀐 것은 조선총독부 제작 지도에서부터다. 백두산에 흠뻑 빠진 일본인들이 크고 흰 바위가 있는 산만 보면 백두산이란 이름을 붙여 지도 위에 올려놓은 탓이다. 이 산 아래 마을 토박이 노인들을 찾아 물어보면 좋으련만, 아무리 발돋움해도 마을은 가뭇하다.
마을 멀어 가뭇한 마음속으로 파란 하늘이 들어찬다. 바람이 구름을 몰아가 버려서 더욱 푸른 하늘. 구름 없는 공중으로 햇살이 번진다. 2월 말 아침 햇살에도 상고대가 녹는다. 나목들 가지에 두툼하게 매달렸던 상고대. 바람의 여운에도 떨어져 내리는 희고 눈부신 알갱이들. 해와 나 사이를 눈발처럼 날며 유난히 반짝이는 것들. 바위벽과 소나무 잎을 덕지덕지 감싸고 있던 설화는 더 빨리 녹는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빙화가 되어 매달린 것들도 있다. 차디찬 하늘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빙화. 투명한 몸 속으로 햇살이 통과할 때, 빙화는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난다. 오늘 나는 또다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 빛을 보았다. 백두산 능선의 소나무 잎새들이 초록빛을 되찾았을 때쯤, 우리는 백두산 그늘을 훌쩍 벗어났다.
1,365m봉에서 잠시 쉰다. 참나무 둥치에 배낭 기대놓고 더운 물 한잔 마신다. 추운 산길을 숨차게 달려온 피로가 스르르 녹는다. 이처럼 추운 산 속에 있지 않았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거다. 눈 속에 서서 마시는 더운 물 한 잔의 행복! 그러나 내가 지금 마신 더운 물은 눈물이다. 나는 눈물을 끓여서 지고 여기까지 달려 왔구나. 눈 녹인 물에 밥지어 먹고 눈물 마시며 걸어가야 할 산줄기가 겹겹으로 꿈틀거리며 손짓하고 있다.
백산 통과 낮 12시 30분. 라면 끓여서 허기와 추위를 달래고 1375.2m봉 쪽으로 간다. 능선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바람도 방향을 바꾼다. 북쪽 응달에는 눈이 제법 남았다. 발목까지 빠지는 곳도 있다. 그러나 겨울 내내 가문 탓에 이 산의 눈도 그리 깊지 않다. 지난 해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이, 두툼한 백설을 덮고 잠들어 있다가 버석버석 소리를 내면서 뒤집히는 것도 좋다. 아무리 낙엽이지만 가만히 누워있으면 더 빨리 썩는다. 일어나라 이 낙엽들아! 뒤집혀서 날아다니다가 부서지는 편이 낫다. 낙엽들이 내 말뜻을 알아듣건 말건, 버석버석 낙엽을 깨워가며 백산 비탈을 내려간다.
1,375.2m봉을 지나자 요덕군 경계로 들어왔다. 요덕이란 이름은 요덕진(耀德鎭)에서 비롯되었다. '요덕진은 현덕진(顯德鎭)이라고도 하는데, 현종 3년에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려사 권제58)' 요덕에는 요창(耀倉)이 있었다. '서쪽으로 130리에 있으며 요덕사(耀德社)라 불렀다(승람, 영흥)'. 요덕진은 폐하여 '사(社)'가 되었고, '사(社)'란 '이(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니, 본도(함경도)의 사람들이 '이(里)'라고 호칭하는 것은 모두 '사(社)'와 같은 뜻이다.(승람,영흥)' 지금은 무슨 무슨 '리'를 함경도 지방에서는 '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요덕군은 분단 전까지 영흥군이었다. 영흥이란 이름은 옛날 화주(和州)의 영흥진(永興鎭)이 이성계 외조부 최씨의 고향이라 하여 화주 전체를 영흥으로 고쳐버린 경우다. '영흥진은 옛날에는 관방수(關防戍) 라고 불리웠는데 문종 15년에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려사 권제58).' 영흥군의 전신인 화주(和州)는 고려 고종 때에 '조휘'와 '탁청'이란 자가 병마사를 죽이고 원나라에 받쳐 원(元)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게 했던 땅이다. 고려 전에는 고구려의 장령진이었다. 이 함경도 땅을 옛 중국 기록들은 숙신국이라 불러 전한다.
세조 조의 문신 김수녕(金壽寧)은 이성계 일가의 터전을 찬양하는 시를 영흥에서도 남겼다. '하늘이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오르니/ 울총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 있네/ 순임금의 옛날 밭 갈고 고기 잡던 그 자취는 이 용흥강과 성역산 머리에 있구나(승람,영흥편)' 순임금은 도조와 환조, 하늘이 보내어 솟아오르는 맑은 시냇물은 이성계를 일컫는 비유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산줄기의 동쪽비탈 물줄기들은 모두 용흥강으로 흘러든다. 동국여지승람 영흥대도호부편에 용흥강에 얽힌 내력이 길게 나온다. '부(영흥)의 동북쪽 2리에 있으니 옛 이름은 횡강(橫江)이다. 그 근원이 넷이 있는데 하나는 비류수(沸流水)이고, 하나는 마유령(馬踰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애전현(艾田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양덕현의 경계인 거차령(巨車嶺)에서 나오는데, 고암(庫岩)에 이르러 송어탄과 합류하여 횡천이라 이름하고 신룡당을 지나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아래 이르러서는 창경연이라 부르는데, 아래에 넓은 여울이 있고, 그 가운데에 흰 돌이 있어 형상이 흰 말과 같으며, 그 돌이 잠기고 드러나는 것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안다고 한다. …',
용흥강은 꽤 깊은 강인가 보다. 영흥부 북쪽 2리에는 용흥강교(龍興江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여름장마에는 물에 잠기기 때문에 배를 타고 물길을 건너다녔다 한다. 용흥강의 옛 이름이던 횡강은 철옹성이 있는 분지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며 흐르는 물줄기 횡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다음 구간에서 지나가게 될 철옹산 동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철옹성이 있는 분지를 거쳐 동해쪽으로 흐른다. 철옹성이 있는 분지는 분단 전까지 영흥군 횡천면에 속했다.
애전현과 마유령은 16구간과 17구간에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비류수는 현재 신양군을 거쳐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이름이다. 고려사(권 제 58)에 '정변진(靜邊鎭)은 현종 22년에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봄과 가을에 국가에서 비용을 내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비류수가 양덕을 거쳐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비류수인지, 용흥강쪽으로 흘러 동해로 흐르던 비류수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용흥강의 뿌리가 그만큼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흥강의 이름은 하륜(河崙)이 지었다한다. '하륜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에 이르니 도순문사 강회백이 강 중류에 술자리를 벌여놓고 청해 말하기를 "본부는 도조(度祖)·환조(桓祖)가 거주하던 땅이며 태조가 이곳에서 나셨는데도, 아직도 그 명칭이 없으니 또한 하나의 유감된 일이 아니겠는가"하매, 하륜이 비로소 '용흥(龍興)'이라 하였다(승람,영흥)'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이 영흥이야 말로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돋움해도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영흥에 와도 영흥이 보이지 않는 길을 우리는 걷고 있는 것이다.
영흥 북루에서 지은 김극기의 시가 있다. '나무와 바윗돌이 쌓인 가운데 울긋불긋한 정자/ 붉은 티끌[紅塵] 일어나지 않고 녹음만이 짙구나/ 물은 두 갈래로 흘러 제비꼬리 같이 나누고/ 산은 두어 봉우리 솟아 자라가 머리를 든 듯/ 대이슬[竹露] 뿌려 개인 날에도 낮에도 비를 이루고/ 솔바람 불어 더운 철에도 가을을 짓는구나//뉘 능히 달 아래서 유곤의 휘파람을 불어/ 오랑캐의 혼백이 놀래어 북녘 땅으로 도망치게 하려나(김극기의 시, '北樓')' 이 시에 나오는 인물 유곤(劉琨)은 진나라 사람으로 적병이 자신이 지키는 성을 포위하자 달밤에 성에 올라 적병을 향해 휘파람을 크게 불어 적병을 놀래주었다는 사람이며, 또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겨울 산 속에 있다. 여름도 휘파람소리도 영흥도 북루도 먼 겨울 산 속에!
1,245m봉 부근에서 하룻길을 접는다. 미산령까지 걷기에는 무리수가 따르고, 아늑한 양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종선 선생과 이상년씨가 코펠을 들고 가더니 눈을 가득 담아왔다. 휘발유 버너에 불을 붙이고 눈이 담긴 코펠을 올려놓았다. 우리는 둘러앉아 시린 손을 쪼인다. 우리들의 손이 따뜻해지는 만큼 코펠 속의 눈도 녹는다. 눈덩이는 녹으면서 키가 줄어든다. 키가 줄어드는 만큼 새 눈을 퍼서 얹는다. 몇 차례 새 눈을 얹어가며, 한 코펠의 물을 얻었다. 코펠 속에서 펄펄 끓는 눈물을 떠서 후후 불어 마신다. 너무 뜨거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리는 눈물도 아껴야한다.
우리가 텐트를 친 능선 끝에는 냉수바우가 있다고 한다. 얼마나 물맛이 차고 달기에 냉수바우 일까? 내가 먹어본 석간수 중에서는, 북한산 숨은벽 능선 절터 뒤편 큰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석간수를 나뭇잎을 대고 받아먹었을 때와 설악산 공룡릉에서 먹어본 물맛이 최고였다. 이 능선 끝 1,129.4m봉에 있는 냉수바우물도 그만큼 맛이 좋을까?
웅크린 잠 속으로 달빛이 지나가고, 다시 날이 밝았다. 오늘은 장포령을 넘어 운봉까지 가기로 한 날. 내 다리가 말을 들어줄 지 모르겠다. 미산령 찾아서 내려가는 능선에는 큰 바위들이 많아서 나는 추운 것도 잊어버리고 구경을 한다. 갈수록 길은 구불거리는데 내가 자꾸 뒤 처지니까 두 분이 우뚝 서서 기다리기를 거듭한다.
미산령 통과 오전 9시 45분. 이제부터는 갈짓자로 꿈틀거리는 능선을 헤치고 가야한다. 앞서거나 뒤 처지지 않도록 보조를 맞춰가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도처에서 바위가 불근거리고 나뭇가지가 배낭을 끌어당겼지만, 김종선 선생이 독도를 하며 앞장을 서는 덕분에 길재까지 통과한 후에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산줄기들 겹쳐진 너머로 운봉이 보인다. 1,021m봉을 통과한 뒤엔 계속 운봉을 보면서 가게된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로운 햇살이 흘러든다. 오늘밤엔 운봉 정상에 올라 달뜨는 걸 볼 수 있겠다. 먼 산줄기까지 가깝게 데려오는 저 햇빛 믿고 또 하루 힘차게 걸어 가보자.
[제14구간], 눈 속에 서서 마시는 더운 물 한 잔의 행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