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면 밝아서 좋다. 어둠을 쫓아주는 해와 달. 하나만 고르라면 달이 더 좋다. 어느 한 귀퉁이도 이지러지지 않고 꽉 찬 보름달을 더 좋아들 한다. 보름달 중에서도 음력 정월 대보름 달과 팔월 한가위 보름달을 더 좋아들 한다. 거산령에서 나흘만 더 걸어가면 정월 대보름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오를 것이다. 내 고향 사람들은 또 달집을 지을 것이다. 바닷가 공터에 나무를 잔뜩 쌓아놓고 빙 둘러서서 커다란 달집에 불을 붙이고 환호할 것이다. 동쪽 바다 수평선을 누르며 둥근 달이 솟아오를 때, 달집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달집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그 불길을 쪼이며 겨울의 그늘을 태울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만 믿고 살던 농경사회의 자손들답게 풍작과 풍어와 질병 없는 한 해를 빌 것이다. 재가 된 달집을 남기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해가 뜨면 다시 나와, 달집을 태운 재를 거름으로 새로운 씨앗을 뿌릴 것이다.
달은 음(陰)이고, 지구도 흙도 음이고, 어둠도 병도 겨울도 음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양(陽)이고, 하늘도 공기도 양이다. 대보름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달집을 태우는 행위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하늘의 물과, 대지의 불, 하늘의 불과 대지의 물을 짝 지워 줌으로써 천지음양의 조화도 꾀하고, 그들의 자식인 열매를 얻어 배고픔을 면하려던 소박하고도 절대적인 염원이 깃들어 있다. 병(病)도 축축하고 더러운 곳에서 생기는 것이니, 불로 태워서 소멸시킨다는 청결의식이 함께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달집을 태움으로써, 마을 사람들끼리 즐겁게 단결할 수 있는 계기로도 삼았다.
휘여넝청 휘도는 백두대간 따라 우리가 걷고 있는 시간에도 달은 자란다. 자라고 또 자라서 만삭이 되면 대지 위에 충만한 빛을 낳고 다시 야윌 것이다. 야위고 또 야위어서 몸이 암흑이 되면, 새로운 달이 눈웃음을 치며 태어날 것이다. 시간도 돌고 해도 달도 돌고, 휘여넝청 휘도는 산줄기 따라 우리도 돌아간다.
산촌의 사람들은 대보름을 어떻게 보낼까? 철옹성 사람들은 대보름 달맞이를 어떻게 할까? 거기 아이들도 깡통에다 불을 담아 긴 끈을 잡고 휘휘 돌리며 쥐불놀이를 할까? 거산령 언덕에서 상수포 분기점으로 향하는 산길이 펑퍼짐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은 뒷걸음쳐서 고향으로 달려가고 몸은 미래의 땅으로 향한다.
운봉을 지나면서 맹산 경계로 들어섰다. 운봉은 굴곡이 심한 산이었다. 오르는 산길도 내리막 산길도 가파르게 꿈틀거렸다. 트위스트를 추는 것 같았다. 구불거리는 골짜기에서 불어 올리는 바람에는 밥짓는 연기 같은 것이 섞여있었다. 내 기억의 아랫목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오곡밥 향기를 맡으며 바람 속을 걸어간다.
맹산은 옛 이름이 철옹이었다. 철옹은 쇠로 만든 항아리란 뜻이다. 이 말은 맹산 땅이 마치 쇠로 만든 항아리 속 같이 두툼한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겠지만, 백두대간을 타고 가면서 보면 무수한 산줄기가 빽빽하게 꿈틀거리는 고원지대다. 상수포 분기점에 올라서니 철옹산이 보인다. 치마주름 같은 산줄기들이 골짜기를 향해 모여들며 꿈틀거리고 있다.
상수포 분기점에서 곧장 내려가면 얼마가지 않아서 큰길이 나오고, 그 큰길에서 철옹산 쪽으로 얼마쯤 들어가면 철옹성이다. 쉬운 길을 옆에 두고 어려운 길 가기란 정말 힘들다. 왼쪽으로 내려서면 맹산의 명물에 속하는 구십구곡(九十九谷)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십구곡은 우리말로 하면 아흔아홉골이다. 그만큼 휘도는 골짜기의 굴곡이 심하고 구석지다는 뜻이다. 백을 꽉 채우지 않고 하나를 뺀 것은,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이라도 아흔아홉칸 이상 되는 집을 짓지 않던 이유와 같다. 백 칸 짜리 집은 임금에 대한 불충이라고 여겼던 때문이다. 상수포 분기점에서 철옹산까지 이어지는 대간 산줄기 남쪽의 구십구곡은 그 만큼 물이 많고 후미진 골짜기란 뜻도 숨어 있다. 구십구곡 즉 아흔아홉골이란 이름은 제주도 한라산에도 있다. 소백산에는 죽계구곡이 있고, 금강산에는 구룡연이 있고, 전라남도 강진 땅에는 구십포(九十浦)가 있다. 주로 물길을 일컬을 때, '九'를 병용해 왔다. '九'는 양수(陽數)다. 골짜기는 물이 있는 곳이고, 물은 '陰'이다. 대보름 달집을 태우는 풍습처럼, 지명에도 음양의 조화를 꾀한 흔적들이다.
상수포분기점에서 철옹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남쪽물, 즉 구십구곡의 물은 동면강을 이루며 흐르다가 맹산강으로 들어간다. 맹산강 물은 흘러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대동강은 흘러서 서해가 된다. 우리는 물이 가는 길로는 갈 수 없다. 바람이 가는 길로도 갈 수가 없다. 물과 물이 나뉘는 분수령만 따라간다.
저 구십구곡은 맹산팔경에 들만큼 아름답다. 맹산팔경(孟山八景)이란, 옥녀봉 월파정에서 하는 달구경, 철옹성에서 쉬는 구름, 관봉의 가을단풍, 용고개에 내리는 초여름 세우, 연당에서 노는 물고기, 옥녀봉 소림사에서 울리는 저녁종소리, 장대에서 무사들이 활 쏘는 모습, 수라산에 핀 진달래꽃. 등이라 한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대간의 오른쪽(북쪽) 분지 안에는 철옹성이 있고, 왼쪽(남쪽) 골짜기는 구십구곡이니, 우리는 맹산팔경 중 2경을 좌우에 거느리고 걷는 셈이다.
맹산에는 원지(圓池)라는 못이 있었다. 맹산현에서 동쪽으로 60리에 있는 이 연못에,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담가 놓으면 비가 왔다 한다. 맹산팔경에 들어있는 연당이 바로 그 연못이 아닐까.
상수포 분기점을 지나면서부터 저녁 해를 안고 가게 된다. 오늘은 내내 철옹산을 바라보며 걸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얼마쯤의 양식과 연료, 넘치는 피곤. 자작령까지 걷기에는 너무 늦었다. 회목동도 산줄기 하나를 더 넘어가야 있다. 753.8m봉 안부에 다시 텐트를 쳤다. 철옹산 줄기를 넘어가는 태양을 향해 내가 비는 건 오직 하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저녁!
다시 아침이 왔을 때 나는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다시 아침이 되자 홀린 사람처럼 다시 길을 떠난다. 아침은 마약이다. 우리는 아침을 먹었다. 자작령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이르다. 모처럼 마을로 들어섰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 모습이 가관이다. 한적하고 좁은 자동차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할머니 한 분이 대문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어디 가시우?" "철옹성 갑니다." "그 길 따라 쭈욱 내려 가시우" "할머니! 저희는 저 산줄기를 타고 비잉 돌아서 가야합니다. 가게가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 "길이 있는데 왜 산으로 가시우? 산소 자리 보러 댕기는 양반들이시우?" 의아해하시는 할머니를 자세한 말씀으로 설득해서, 할머니 댁에서 좀 쉬기로 했다. 가게를 찾아서 쌀과 반찬, 연료도 보충하고, 할머니 댁 솥과 물도 빌렸다. 모처럼 국도 끓이고 세수도 하고, 양치질도 마음대로 하고 나니 살 것 같다. 온돌 위에 다리 뻗고 누워 두어 시간 쉬었다. 그 휴식이 보약이었던가. 철옹산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걸음이 더 빨라졌다. 오후5시에는 분상동에서 올라오는 소로를 건넜다. 그러나 철옹산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905m봉 부근에 다시 텐트를 쳤다.
철옹산은 맹산의 산이다. 저 우람한 산 덩어리에 맹산의 옛 이름을 얹어놓음으로써, 철옹성이 있는 분지 안까지 맹산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므로 평남과 함남의 경계는 이 대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수포 분기점에서 용흥강 상류로 내려가는 산줄기를 따라 이어지게 된다. 철옹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토성이지만 주변의 절벽같은 산줄기에 기대 쌓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 성터가 남아있고, 그 성터가 있는 마을 이름은 산성리(山城里)다. 이틀 뒤 석양 무렵이면 우리는 그 산성리에 있을 것이다.
웅크린 잠 속으로 또 달빛이 지나갔다. 주홍빛으로 배부른 열 사흘 달빛이었다. 철옹산 오르는 길에서 산새 소리 듣는다. 겨우내 마을 근처에 있던 놈이 눈 속에 번지는 봄기운 믿고 이 능선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아니면 철옹성 텃새가 마중을 온 것일까? 철옹산에서 분령으로 내려서는 길은 암봉을 피하느라 멀리 돌았다. 분령에 내려서니 12시가 넘었다. 분동에서 대분동으로 가는 사람들을 만나 길을 물었지만, 이 사람들도 산길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평지로만 다닌다. 802.4m봉에서 삼각점을 확인하고 1km쯤 더 걸어오니 다시 거대한 암릉 앞이다. 암릉을 피해서 빙빙 돌다보니 도로로 내려와 버렸다. 분상동 사거리에서 맹주동을 거쳐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맹주동 분기점에서 또 한번 헤매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맹주리 고개에 주저앉았다. 1056.8m봉 기슭에 텐트를 치고, 발아래 마을의 밤을 내려다본다. 이제 남은 길은 5km남짓. 내일 아침 우리는 다시 길을 걸을 것이다. 철옹산에서 울던 놈인가, 또 산새가 운다. 쯔비쯔비 울어대는 산새소리는 철옹성 찾아가자! 철옹성 찾아가자! 재촉하는 것 같다. 이 구간의 종점인 786m고갯마루에 도착하니 3월 2일 오후 5시 20분. 정월대보름 둥근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나에겐 더 걸어갈 힘없다. 힘없다, 없다는 데도, 그 산새가 운다. 철옹성 찾아가자! 산새가 운다!
[제15구간], 철옹성 찾아가자! 산새가 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