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 그 땀과 끈기, 꽃보다 아름다워라
제16구간 : 철옹성∼용풍산∼망경대령∼성전고개∼마유령
이 향 지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이 땅 어느 산천에서나 흔하게 보는 진달래꽃. 철옹성 절벽에도 피어있었다. 봄 하늘에 번지는 화사한 꽃불. 고개 젖혀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꽃방망이들. 아지랑이 둑을 넘어, 봄 햇살에 흔들렸다. 비 그친 하늘과 나 사이에 번지는 화사한 꽃바람. 길고 우중충한 겨울을 건너온 마음 흔들렸다. 진달래꽃 필 때마다 고향 잃은 사람들, 고질병처럼 도질 그리움. 마른 풀 더미 같은 가슴에도 옮겨 붙었다. 앉아서 세월만 무너뜨릴 순 없다. 걷자, 걸어서 통일을 보아야겠다.
이번 산행에는 같이 걷는 사람들이 많다. '산에 도라지를 심는 사람들' 우리 뿌리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 일행 15명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도상거리 1,572km를 123일만에 주파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사람들이다. 도상거리 1,572km를 123일만에 주파하려면 백두대간 능선길만 우리 이수로 매일 평균 40리 정도는 계속 걸어야하는데, 백두대간 마루길이 어디 평지 같은가. 이정표도 없고 지능선 많아 무수히 헛돌아야하는 산마루 길. 그러나 "걷는 것이 통일이다"는 화두를 품고 백두산을 향해 떠난 분들이니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도라지팀, 산삼팀은 철옹성에서 우연히 만나 합류하게 되었지만, 우리보다 훨씬 앞서 갈 것으로 본다. 도봉산 천축사 문무관 출신인 원공스님이 대장이시다. 원공스님은 전국 어디든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는 일화로 유명하다. '농심마니'는 <산>의 작가 박인식씨가 이끄는 팀이다. 도라지팀 산삼팀은 실은 한 집안 두 살림 팀이다. 백두대간을 걷는 한편 '십시일반'이라는 성금통장을 개설하여 북녘땅 어린이 돕기에도 나서고 있다. 햇살 밝은 산비탈에는 도라지를 심고, 그늘지고 토양이 좋은 비탈에는 산삼을 심고, 세기말에 휘둘리는 도시인들의 가슴에는 훈훈한 동포애를 심는다. 초면이긴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백두대간'이라는 끈끈한 끈이 이어져 있다.
우리 팀은 넷이다. 천령∼마식령∼두류산∼회동현 구간을 같이 걸었던 산악인 이도윤 김봉관 백은식씨가 강남 갔던 제비들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지배배 합류했다. 어느 골짜기로 내려가면 물이 있는지, 어느 능선을 굽어 돌면 바람이 드셀지 꿰뚫어보는 양반들이다. 나는 그저 내 비상용품만 꾸려서 지고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우마차로가 통과하는 마유령까지 가면 클럽아프리카 대장 김수현씨와 청소년 탐사대 이소희 단장이 다음 구간에 쓸 물품을 싣고 지원을 나와 있을 것이다.
아침바람에도 흔들리는 진달래꽃 등지고 잎갈나무 숲으로 들어왔다. 786m고개에서 첫 번째 삼각점이 있는 1,073m봉까지는 길도 희미하고 가파르다. 훤칠하게 자란 나목들 사이로 어림잡아 능선을 헤쳐나간다. 1,073m봉에 서니, 오전 7시10분. 꿈틀거리는 능선 너머로 철옹산이 보인다. 한달 사이에 산 빛이 완연히 달라졌다. 진달래꽃 피었으니 머지않아 녹음이 우거질 것이다. 대간 능선의 나목들도 가지 끝이 발그레하다. 흙 속의 실뿌리들 우듬지 끝까지 수액을 길어 올리느라 숨이 가쁜 모습들이다. 녹음이 우거지면 나뭇잎이 시야를 가려서 그만큼 길 찾기가 어려워지겠지. 걷자. 녹음 우거지기 전에 좀더 많이 걸어두어야 한다.
풍림리와 초항을 연결하는 산길 소로를 건너 용풍산 정상을 향해간다. 용풍산은 맹산의 귀때기처럼 동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앉았다. 핏줄처럼 얽힌 애창강 줄기를 끌고 동해 구경 나섰다가, 용흥강 줄기에 막혀서 우두커니 서있는 맏형 같다고나 할까. 햇볕이 일찍 닿는 만큼 바람도 더 많이 받고, 사람이라면 외로움도 더 많이 느낄 자리에 서있다. 그러나 요덕 쪽에서 보면 대륙풍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산이다. 접근을 불허하는 성곽처럼, 첩첩한 암봉들을 거느리고 있는 용풍산 정상은 멀리 있어서 오히려 희미하게 보이고, 병풍산 암봉들은 가깝고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 산 이름을 병풍산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병풍산 이름은 이 산 주봉이 아니라 동남쪽 암봉에 붙어있었다. 그 점이 허전했던가. 본고의 기본지도에서부터 병풍산 이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이 산 정상부에 용풍산이란 이름이 하나 덧붙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산 정상부분을 용풍산이라 불러주면서 지나가기로 한다.
1,390m봉에 올라서니 8시 35분. 아침해가 병풍산 머리에 환한 햇살들을 풀어놓는다. 쯔비쯔비, 찌르찟찌, 귀에 익은 텃새소리. 솔새소리, 박새소리. 돌아보니 철옹산이 손짓하고 있다. 용풍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오를수록 시야가 트이고 경치가 좋다. 바위능선 너머에 있던 병풍산이 점점 낮아지면서 꼭대기 부분이 드러난다. 산이 높고 계곡은 깊은데, 용흥강 줄기 하나가 산의 발치를 반짝이며 휘돌아 나가는 게 보인다. 병풍산 머리가 점점 더 환해진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병풍산을 강줄기 남쪽에 그려놓았을까? 아무리 고산자라해도 100% 완벽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용풍산 능선은 굴곡이 심하고 바위 또한 많아서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이다 안보이다 한다. 경치와 사람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아직 8부 능선을 오르고 있는데, 도라지마니 산삼마니들은 용풍산 정상에서 야호!를 외치고 있다. 느릿느릿 올라서 용풍산에 서니 10시 반이다. 바위에 둘러앉아 간식을 나눠먹으며 둘러보는 산천. 햇살은 어느새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우리는 벌써부터 목이 마르다. 맹산군 솔몰 부근에서 맹산강에 합류하는 애창강 줄기들이 발아래서 굽이친다. 물은 낮은 곳에 있다. 아직은 산 그림자가 짙은 골짜기 안에. 해가 용풍산 머리를 넘어서면 저 골짜기 물길도 한때나마 거울처럼 반짝일 것이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길 한 가닥이 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없는 우리. 백두대간 마루금 따라 소로를 건넜다. 망경대령 찾아 내려가는 능선이 쏟아질 듯 가파르다. 봉우리 둘을 지나서 조금 더 내려오다 점심을 먹었고, 가파른 산비탈을 내려서니 십자로 안부가 나왔다. 첫 번째 소구간이 끝나는 망경대령이다. 도라지마니 농심마니들이 앞장을 서서 빨리 걷기 때문에 우리 속도도 자연히 빨라졌던 것이다. 해가 지려면 3시간도 더 남았으니, 물이 가까운 1,015m고개까지 가서 텐트를 쳐도 될 것 같다.
가파른 비탈을 30분쯤 올라오니 편편한 능선이 나타났다. 고도 100m 높이는데 30분을 죽이고, 넓적 바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처량하게 굴었더니, 이도윤씨가 "그럴 수는 없지예" 배낭 던져 놓고 마주 앉아 사과 하나를 깎았다. 김봉관씨는 소주 한 팩을 따뤄서 돌리고, 백은식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마른 오징어를 찢어 준다. 산사람 눈썹에 설화가 필 정도로 춥던 날엔 못해본 호강이다. 봄이 좋긴 좋다. 잠시라도 다리 펴고 길게 앉아본다. 봄은 둥글다. 둥글게 둘러앉아 소주 한 모금씩 홀짝거리는 우리 마음만큼이나 올 봄은 둥글다. 꽃봉오리가 도톰해진 진달래 한 그루가 우리 옆에 있어서 백두대간의 봄은 더 둥글다. 내 앉은 키보다 작은 진달래. 바람찬 산등성이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햇살 속으로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는 작은 나무의 저력이 눈부시다.
식민지 시대의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꽃' 밟히는 산천을 노래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내야하는 마음이야 서럽겠지만, 죄 없는 진달래꽃은 왜 뜯어서 깔아주나. 떠나는 이의 발 밑에 진달래꽃 깔아주면, 그 이별이야 눈물겹고 죽을 때까지 아름답게 기억되겠지만, 꺾이고 밟히는 진달래꽃은 얼마나 아프고 분통터질 것인가. 수난의 시절은 지나가고 쉰 번째의 봄이 돌아왔건만 이 땅의 진달래들은 여전히 슬픔에 젖어서 핀다.
능선 길 따라간다. 계레의 슬픔 훌훌 털며 저녁을 향해 걸어간다. 농심마니들은 성전고개까지 간다고 했지만, 우리는 1,015m고개에 주저앉았다. 김봉관씨와 이도윤씨는 물 뜨러 가고 백은식씨와 나는 텐트를 세웠다. 진달래꽃 같은 별들이 머리 위에서 속삭이는 밤. 그 별빛 음미할 여유도 없이 잠이 깊었다.
둘째 날 아침. 어제의 황홀은 옛말이 되었다. 아침부터 가스가 끼어 먼 산 가까운 산들이 모두 사라지고 바로 앞의 목표물이 보이지 않는다. 시계는 10m남짓. 가까운 나무들과 눈앞의 길만 보일 정도로 답답하다. 농심마니들이 붙여놓은 리본이 없었더라면 더 고생할 번 했다. 누군가 먼저 지나간 길은 선등의 묘미는 덜하지만, 오늘처럼 조건이 나쁜 날에는 톡톡히 도움을 받는다. 성전고개 통과 오전 8시 10분. 1,350m고개 통과 10시 5분전이다. 백은식씨가 해병대 정신을 백두대간에 불어넣고 있어서, 다리 아파! 불평 한번 못하고 따라가는 날이다. 1,501.5m봉에서는 삼각점을 확인하고 아껴두었던 쑥버무리로 점심을 때웠다. 정오를 지나면서 시야가 점점 틔어서 내일 가야할 산줄기들까지 잡힐 듯 가깝게 드러났다.
우리 뒤에는 누가 이 길을 걸을까? 20세기는 개막과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의 아픔과 기아를 선사했고,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알게 해 주었다. 그 분단이 얼마나 아프고 불편한 상처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남한쪽 백두대간 640여km를 걸어본 사람은 안다. 바로 눈앞에 가야할 길을 남겨두고 돌아서 본 사람들은 안다. 우리 앞의 벽이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워졌다는 것을…. 녹슬어 가는 철조망 앞에서 속수무책 눈물만 뚝뚝 흘리겠는가. 걷자, 걸어서 통일을 앞당겨보자. 남한쪽 백두대간을 완주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철조망 걷히는 날 누구보다도 먼저 백두대간으로 달려올 사람들이 바로 그분들이다. 아마 수천 명은 되리라.
백두대간 종주 붐은 90년대 초반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1989년 5월3일부터 7월12일까지 지리산∼진부령 구간 종주를 70일만에 끝낸 방통대 석탑 산악회, 최향옥(당시 33세), 지효순(당시 29세), 김학정(당시 24세) 3인조가 선구자에 속한다. '백두대간'이란 시집까지 상재한 바 있는 산악인 권경업씨(48)와 여성산악인 남난희씨(43) 조는 1990년 9월부터 1년간, 남한 쪽 백두대간을 12구간으로 나누어서 종주했다. 기억에 남는 단독종주자는 코오롱등산학교동문회 황정곤씨로 1990년 9월∼11월 사이의 50일간에 종주를 마치고 "거추장스럽게만 여겼던 '통일염원'이라는 어구가 이렇게 내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이 마음은 단지 더 갈 수 없다는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인 자유에 대한 희구였다."는 소감을 남겼다. 92년 3월 11일부터 50여일 간에 걸쳐 완주한 울산등고회의 신갑섭씨와 고재복씨는 진부령에서 돌아서며 "아들 낳으면 나머지 구간 시키자"고 약속을 했다한다. 덕유산악회의 지원을 받으며 단독종주를 한 길춘일씨는 '70일간의 백두대간'이란 단행본을 출간했고, 부산일보사에 근무하던 이동화씨도 '백두대간종주'란 책을 펴냈다. 구두닦이 아버지와 국민학생 아들의 부자 종주대 이야기는 안락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백두대간 지리산∼진부령 도상거리 640여km를 45구간으로 나누어 완주한 바 있는 남청희씨(49)는 한국요산회 안경호대장과 함께 남한쪽 9개 정맥답사에 나서고 있다.
한반도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철조망이 걷히는 날 제일 먼저 백두대간으로 달려갈 사람들은 이 분들만 아니다. 백두대간 전문 안내 '거인산악회'는 3차종주를 끝낸 결과 75명의 완주자를 탄생시켰다한다. 나와 함께 향로봉에 올랐던 '덕유산악회'도 1차 80%, 2차 종주대의 약65%가 완주를 했다. 잔디밭산악회, 성남마운틴, 클럽아프리카 등 백두대간을 전문으로 안내산악회도 늘어만 간다. 월간<산>에서 추정해본 완주자 숫자는 아마 수천 명에 이르지 않을까.
무엇이 그들을 걷게 하였고, 우리를 걷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 통일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백두대간을 완주했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거나 지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걸었고, 우리는 걷는다. 그 땀과 끈기, 꽃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걸어서 갈 수 없는 곳이 바다나 하늘이 아닌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363m봉에서는 횡천령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이 더 뚜렷해서 생각없이 그쪽으로 가다 다시 돌아왔다. 걷는 자가 생각이 깊으면 길을 벗어나기 십상이다. 마유령까지는 태양을 등지고 간다. 갈수록 그림자가 길어져서 슬프다. 잡목 숲을 헤치고 나오니 어느새 땅거미가 깔린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 야호! 외치니 야호! 하고 대답하는 사람. 이소희씨다. 사슴처럼 비탈길을 달려 올라오는 사람은 김수현씨다. 김수현씨에게 배낭을 뺏기고 뛰어내려간다. 마유령 고갯마루에 번지는 구수한 밥 냄새. 아아, 누군가 기다려주는 산길은 눈물겹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니 보송보송하다. 뜨끈뜨끈한 쌀밥과 고추장찌게에 목이 메인다. 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삼겹살과 상추쌈! 아아! 좀 천천히 먹읍시다!
[제16구간],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 그 땀과 끈기, 꽃보다 아름다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