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우리가 왜 이 길을 걷는가를
제17구간 : 마유령∼백산∼모도봉∼모도령∼사수산∼향로봉∼(하)검산령
'영이란 것은 영 등성이가 조금 나지막하고 평평한 곳이다.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 동쪽과 통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산이라 부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嶺)'을 이같이 정의했다. '嶺'이 아니면 모두 '山'이라? 산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개를 끄떡일 만 한 정의다. 그러므로 백두대간, 내 발아래서 나를 흔드는 이 기갈 찬 산길은, 영과 영, 산과 산, 영과 산, 사이를 이으며 존재한다. 내 발자국 하나 하나가 이 기갈 찬 산줄기를 잇는 점 하나씩이다. 그러함으로, 이 백두대간, 이 거대한 산줄기도 결국, 핏줄 같은 개인 개인이,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점과 점으로, 그치지 않고 이어갈 때 그 존재가치가 더욱 빛나게 된다. 핏줄 같은 사람들의 혼과 혼을 꿰뚫는 커다란 줄기 하나를 이어 보이기 위해, 내 발자국은 작고 작은 점이 되어 부서져도 좋으리라. 비와 눈이, 바람과 땡볕이, 이 산줄기를 주저앉힐 수 없듯이, 어떠한 명분 어떠한 이념도 이 산줄기를 끊어놓을 순 없다.
이번 구간의 출발지가 되는 마유령(馬踰嶺)은 '말넘이고개'다. 근원을 캐면 '마루+영'이 겹쳐진 이름이겠지만, '말을 타지 않고는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 담겼다. '유(踰)'는 '넘을 유', '이길 유', '나을 유', '뛸 유', '더욱 유' 외에 '요'로도 읽는다. '멀다', '아득하다'는 뜻과 소리가 실린 '멀 요', '아득할 요'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요망(踰望)'이란 '멀리 바라봄'이란 뜻이지만 이 고개에서는 먼 곳이 바라보이지 않는다. '유령(踰嶺)'이란 '고개를 넘음'이지만, 우리는 마유령 고갯마루를 넘어 마을에서 마을로 가지 않고 가로질러 간다. 우리처럼 고개를 가로지르는 행위는 '넘을 유(踰)'자와는 상관없는 횡단이다. 우리가 마유령을 횡단하는 것처럼, 마유령은 백두대간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군가를 가로질러 넘지 않고는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것이 길 위에 선 자의 고통이며, 길이 지고 있는 십자가이다.
마유령을 등진 지 2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1,545m봉 기슭을 오르고 있다. 백산 정상은 가파른 산줄기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고, 숨만 턱턱 막힌다. 나는 또 한번 출발지에서의 초발심을 다져야 한다. 기억하라, 우리가 왜 이 길을 걷는가를!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평지를 걸을 때는 모른다. 낡은 심장이 경사 급한 산비탈에서 그만 가자! 쉬어 가자! 숨을 몰아쉴 때, 무수히 주저앉는 두 발을 일으켜 세우려면 '처음 마음'의 격려라도 없이는 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사랑이여, 처음만 같아라! 처음 먹은 마음보다 더 아름답고 굳센 동지는 없다.
김수현씨와 이소희씨는 우리에게 아침을 든든히 먹이고 도시락까지 싸주고, 차를 돌려 내려갔다. 사흘 후에 검산령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소희씨는 산악자전거 베테랑이다. 자동차로 올라올 수 없는 길은 산악자전거로 지원을 오겠다고 한다. 백두산 가는 길에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셈이다. 덕분에 사흘 분 짐만 지고 걷는다. 일주일분 식량을 지고 걷던 때에 비하면 배낭 무게가 훨씬 가볍다.
1,545m봉에서 잠깐 쉬고 백산 정상으로 향해간다. 짧은 내리막 끝에 발 밑으로 들어온 평지 같은 안부. 내 심장이 모처럼 평정을 회복한다. 볕 좋은 비탈에 둥치 굵은 소나무들이 섞여있어서 고산의 운치를 더한다. 산이 높은 탓인지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남았고, 철쭉꽃은 아직 작고 단단한 봉오리 속에 있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산머리만 보인다. 첩첩한 산줄기의 파도에 갇혀, 파도의 용마루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 나뭇가지를 젖히면서 지나가야 하는 곳이 많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하고 내 심장은 또 다시 고통을 호소한다. 느릿느릿 달래며 걸어주는 수밖에 달리 도울 길이 없다. 백산 정상에 서니 1시 20분. 마유령 떠난 지 4시간 10분만이다. 도상거리 5km에 4시간 10분이라니, 걸음 빠른 분들에게는 미안하다.
백산 정상에서 성리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영원군과 대흥군의 경계가 된다. 원래는 모두 영원 땅이었으나, 분단후 두 집 살림을 차린 것이다. 영원 일대는 고대엔 고조선의 영토였고, 고구려 동천왕 때 고구려 땅이 되었다. 고려 태조 5년(서기 922년) 영원진(寧遠鎭)을 설치한 것이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한다. 영원과 대흥의 중심부를 흐르는 대동강의 원류는 낭림산 기슭에서 발원한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 흐름이 급해서 평양 쪽으로 원목을 수송하는 떼길(뗏목길)로도 이용되어 왔다. 이 일대의 산들은 오래 전부터 좋은 목재와 풍부한 물과 질 좋은 지하자원을 제공해온 보고인 셈이다.
백산 정상에서부터는 산줄기가 동쪽으로 향한다. 태양은 어느새 뒤통수 위에서 빛나고 나무 없는 길에 서면 산 그림자까지 앞으로 와서 밟히곤 한다. 쏟아질듯 가파른 비탈을 다 내려와서 돌아보면 거대한 산덩어리가 해를 막고 서있다. 작은가래골로 내려가는 소로를 만난 시간 오후 3시. 1,499.8m봉을 넘어 다시 텐트를 친 시간 오후 5시 50분이다.
넷째 날, 해가 돋기 무섭게 출발한다. 오늘 가야할 산길도 멀고 험하기 때문이다. 능선은 휘어 돌지만,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서 내가 걷기에는 좋다. 1,384.2m봉 삼각점 위에서 가야할 방향을 한번 더 확인하고 1,203m고개로 내려섰다. 목도 마르고 물통도 비었다. 세 남자가 쌀과 물통들을 있는 대로 챙겨 들고 남쪽 비탈을 내려가고, 나는 다리 뻗고 앉아서 쉰다. 이 고개는 지도에는 이름이 없다. 남쪽 비탈 아래가 대숙리 노루목이니까 아마 그 비슷한 이름일텐데,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이곳 사람들도 산길은 피해서 평지로만 다니는 모양이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 내려가니 또 소로가 나왔다. 1,230m고개다. 이 고개에서 물을 구하려면 북쪽 비탈을 내려가는 것이 가깝다. 1,443.4m봉은 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퉁그러져 앉았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1,443.4m봉에서 모도봉으로 향하는 길 왼쪽에는 도흥리산태개라는 이상한 이름의 마을이 있다. 도흥리면 도흥리지 산태개는 또 무언가. 1,643.1m봉이 무명봉이 아니라 '도흥리산'인가 보다. 그럼 태개란 무언가? 큰 개라는 뜻일까? 두 물줄기가 합치는 곳이니 '개' 바다로 치면 '포구'에 해당될 만큼 아늑한 땅이라는 뜻이겠다. 바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산아래 아무리 아늑한 땅이 있은 들, 우리는 질기고 질긴 핏줄들 대표로 벌받는 사람들처럼 각자의 짐을 지고 꾸역꾸역 걸어간다.
1,643.1m봉 부근은 마을이 가깝기 때문인지 지도에도 없는 길이 두 번 가로질러 갔다. 모도봉은 높기도 하지만 남쪽으로 불쑥 퉁그러져 앉아서 '모퉁이산' 같다. 능선이 두툼하고 등산로 주변에는 관목들이 많다. 바람이 씽씽 불어서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철쭉꽃이 피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모도봉 정상 도착 오후 4시 30분. 철옹성 진달래꽃 흔들던 화사한 꽃바람은 먼 옛날의 향기처럼 멀고, 오래 서있을 수 없을 만큼 바람이 차다. 먼 옛날 이 산머리는 영원이나 영흥사람들이 성스러운 제사를 모시던 곳이리라. 자연 속의 해, 달, 별, 산, 나무를 신처럼 떠받들고 건강과 비와 풍요를 빌던 사람들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땅으로 흘러와 있는가. 모도령으로 내려가는 능선 역시 두툼하고 펑퍼짐하다. 모도봉 정상으로부터 앞장서서 내려가는 길 한 가닥이 이 산아래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능선의 남쪽은 아직 요덕군이다. 그리운 바다는 백리 밖에서 바람을 보내지만, 저 첩첩한 산머리를 넘어 저어올 나룻배는 없으리.
다섯 째날, 모도령 동북쪽 비탈에서 다시 텐트를 접는다. 아무리 늦더라도 검산령까지 걸어야하는 날이다. 누군가 길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도 구속이다. 모든 짐을 다 지고 나섰을 때는, 여력이 있을 때는 더 걷고 힘이 모자랄 때는 주저앉을 수도 있었지만, 약속이 기다리는 땅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야하는 것은 또 다른 짐이 된다. 1,765m봉 오르는 비탈이 좀 힘들었을 뿐 길이 까다롭지 않아서 1,386m고개까지는 어렵잖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수산으로 오르는 길은 아무래도 고통이다. 누적된 피로가 모래주머니처럼 두 발목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도윤씨가 내 배낭을 받아서 가슴 쪽에다 붙이고 올라간다. 열 걸음에 쉬고 스무 걸음에 쉰다. 빈 몸으로 오르는 나도 마찬가지다. 내 배낭이 백은식씨 가슴으로 갔다가 김봉관씨 어깨로 갔다가 머리로 갔다가 뺑뺑이를 도는 사이에 사수산 정상에 도착했다. 짐 위에 짐을 덧붙여 진 자의 고통과 자신의 짐을 남에게 떠맡긴 자의 양심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큰소리를 쳤다. 아, 두고 가세요 내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요. 하하. 난 말씀만 백설공주였다. 그러나 모두 같은 시간에 정상에 오르니 좋다.
사수산에서 구름덕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요덕군과 정평군의 경계이다. 정평은 불과 4km떨어진 향로봉까지다. 그러니까 사수산∼향로봉 능선의 동쪽만 정평군이다. 정평군은 백두대간에 대고 있는 거리는 짧지만, 동해를 향해 깔대기처럼 가슴을 열고 있는 넓은 땅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깔대기 끝 부분에 도착해 있다. 그럴사 그러한지, 정평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바닷 냄새가 섞여있다.
정평은 고려시대에는 정주라 불렀다. 고려사 58권에 보면 '정주(定州);옛 칭호는 파지(巴只), 선위(宣威)라고도 하였음. 정종(靖宗) 7년에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로 삼고 관문을 두었으며 공민왕 5년에 도호부로 올렸다. 별호를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춘추(春秋)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비백산은 정평군의 진산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던 풍습은 이 사수산 머리에서까지 행해졌을 것으로 본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상검산, 중검산, 하검산, 소검산 등 여러 개의 검산이 나온다. 검산은 태백산의 천제단처럼 검대가 있는 산, 즉 제단이 있는 산이다.
또 이 부근은, 고려 때는 여진과의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정평에서 남긴 시가 있다. '정주 땅 중구일(重九日;음력9월9일)에 높은 산에 올라보니 / 의구한 누런 국화가 눈에 붉게 비쳐오네. / 포구는 남으로 선덕진과 연해있고, / 산봉우리는 북으로 여진성(女眞城)에 의지해 있구나. / 백년간 싸우던 나라의 흥하고 망한 일들은 / 만리길 나그네의 심정을 강개롭게 해준다. / 술자리를 파하고 원수(元帥)에게 부축되어 말에 오르니, / 얕은 산에 비낀 해가 붉은 깃발을 비춰주네'하였다.
정추(鄭樞)의 시도 있다. '정주의 관문 밖엔 풀이 마냥 무성한데, / 사막에 인기척 없고 해는 서쪽으로 향해 가네. / 비릿내 풍기는 바닷바람이 전망(戰亡)한 백골을 불어 스치는데, / 흰 느릅나무 많은 곳에서 말울음소리 자주 들려온다'하였다. 얼마나 많은 인마가 임금 다른 땅을 지키려다 헛되이 죽어갔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시들이다. 정평 바닷가로부터 삭주 의주 쪽으로 쌓아나간 천리장성은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타고난 수명도 못 채우고 죽어가게 했을 것인가.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이 땅에서 살다간 선조들의 애닲은 사연이 스며 있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젖어든다. 가슴 한쪽만 젖는 게 아니었다. 우리 전신이 빗속으로 들어왔다.
사수산에서 향로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가파르다 싶을 땐 편편해지고, 느슨하게 풀릴만하면 도로 가팔라지기를 거듭해서 한눈 팔 틈을 주지 않는데, 빗방울까지 주룩주룩 배낭 뚜껑을 두드린다. 향로봉 정상에서는 경치를 음미할 틈도 없었다. 검산령을 향해 내려가는 사이에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져서 한기와 물기가 뼛속까지 젖게 만든다. 아아, 어제 이 비를 맞았더라면 더 큰일이었을 거다. 진달래 꽃망울이 배새시 입을 여는 능선. 이 아름다운 길을 휴식도 노래도 없이 굴러 내려간다. 봄비에 쫓겨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제17구간], 기억하라, 우리가 왜 이 길을 걷는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