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강물의 끝에는 바다가 있고,
모든 강물의 시작에는 산이 있다네!
제18구간 : (하)검산령∼백산∼차일봉∼유동령∼(상)검산령
이향지
초록빛 능선을 열고 가는 발자국들의 행진! 나팔소리도 구경꾼도 있을 리 없는 고적한 산길의 연속이다.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백두대간에 묶어놓고 1년을 더 살았다.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향해 오체투지로 다가가는 나날들이다.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막막할 때마다 꺼내보는 생각 둘이 있다. 내 뒤의 수많은 산들이 함께 백두산으로 간다. 내 뒤의 산들과 내 앞의 산들과 나와 우리는 모두 백두산과 한 두름에 엮인 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힘이 솟는다.
산에는 풀과 나무, 풀과 나무엔 꽃, 사람들 마음엔 저마다 고향이 있다. 지난 해 피던 꽃 다시 피고, 지난 해 울던 새 다시 울건만, 분단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안개 띠처럼 지상을 덮고있는 아지랑이 너머에 가야할 산은 첩첩이지만, 가다보면 백두산이 있겠지, 통일도 볼 수 있겠지, 희망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개마고원이 가까워서 그런지 검산령에선 이제야 봄이 시작이다. 서울의 소나무들은 새순이 한 뼘 넘게 자라 송화가루가 풀풀 휘날리던 데, 이곳 소나무들은 이제야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다. 마른 풀 더미 속에서 웃고있는 보라 제비꽃! 보라, 보라, 제비꽃 무더기에 엎어지는 햇살! 날마다 새로워서 눈 부시는 햇살 속으로, 짐 진 자들의 행렬이 들어선다. 우리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눈물겨운 소나무 숲. 꿋꿋하게 키를 세우고 가지를 펼친 모습이 자유의 전령들 같다. 20분쯤 걸어 오르니 다시 햇빛 속이다. 봉긋한 무덤 한 기가 5월의 햇살 속으로, 파릇한 잔디들을 밀어 올리고 있다. 무덤 가의 소나무들은 모양도 소담스럽고 잎새도 더 푸르다. 남쪽 지방 같으면 단풍취나 미역취 같은 취나물이라도 돋아 나풀거리겠지만 이 산 초목들은 이제 겨우 잠을 깨어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다.
발 밑에만 시선을 주면서 20분쯤 걸어 오르니 환한 등성이로 올라섰다. 능선의 방향이 북쪽에서 서북쪽으로, 서북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바뀐다. 능선의 정점에는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있고, 봉우리 정점엔 삼각점이 있다. 1,399.6m봉이다. 삼각점 위에 지도를 놓고 가야할 방향과 위도를 가늠해 본다. 우리는 어느새 북위 39°55′를 넘어섰다. 내일 오후 (상)검산령에 도착할 때쯤이면 북위 40°를 넘어서 있을 것이다. 서북쪽 전방에 우뚝한 산은 백산이다. 우리들의 길도 자연히 백산 쪽으로 향한다. 날씨가 맑은 덕분에 백산의 전모가 드러났다. 백산은 뿌리가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 가도, 가도, 백산의 가슴팍만 보인다. 산은 스스로 기어드는 것들만 안아들일 뿐, 다가와서 안아주지는 못하는 존재다. 오는 사람 내치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사람의 말로 산의 마음을 번역해보면 이쯤 되리라. 따지고 보면 산은 한없는 무관심을 펼쳐 놓았을 뿐인데, 우리들 사람은 거대한 산의 무관심에 엎어지며 자빠지며 빠져드는 것이다. 수많은 봉우리들이 첩첩한 능선에서 삐죽대고 있고, 새들은 가까운 나뭇가지 사이를 날면서 운다. 사흘 전 내린 비로 길은 알맞게 촉촉하다. 양지쪽 신갈나무들은 숟가락만한 햇잎들을 펼쳐놓았고, 빛깔 하얀 바위들은 길에서 돌아앉아 먼산바라기를 한다.
덕숭골과 수구안을 잇는 고갯마루에서 물통을 채우고 점심을 먹었다. 덕숭골 쪽으로 물뜨러 내려가는 길이 꽤 가팔랐던 모양으로, 이도윤씨와 백은식씨가 땀투성이가 돼서 돌아왔다. "봉관아 다음 번엔 니 차례다!" 이도윤씨의 다짐에 "알았다!" 김봉관씨가 순순히 다음 번 물 당번을 맡는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식수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구나. 세 남자가 화기애애하게 소줏잔을 돌릴 동안에 나는 몇 걸음이라도 더 걸어두려고 혼자 비탈길을 올라간다.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져서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며칠째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거미줄이 휙휙 얼굴을 덮는다. 삭정이 하나를 꺾어들고 눈앞의 허공을 치면서 걸어간다. 그 옛날 명성을 드날리던 무사들도 초보시절엔 칼쓰는 법을 이렇게 배웠겠지. 삭정이 꺾어들고 아래위로 거미줄이나 치면서 가는 주제에 기분이 한껏 부푼다. 날개 검은 나비가 한 쌍 거미줄을 피해서 날아가고, 새들은 좀더 높은 가지에서 옮겨다니며 운다. 내 몸이 비로소 평화 속으로 들어왔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동행들이 있고, 때묻지 않은 공기와 고요가 세속의 앙금들을 말갛게 비워주고 있으므로-.
나는 이런 날, 이런 산길이 좋다. 소나무 잎이 걸러주는 산바람 마시며, 삭정이 한 토막 꺾어들고 얼굴에 감기는 거미줄이나 휘휘 치면서 느긋하게 혼자 걷는 이런 산길이 좋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잠깐 잊어버리고, 길이 생긴 대로 다리를 번갈아 옮겨놓는다. 신작로 같은 산길을 무리 지어 떠들면서 걸을 때는 이런 즐거움 모른다. 산은 혼자 느리게 걷는 자에게만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오늘 나는 이 산에서, 산이 나의 숨을 쉬고 내가 산의 숨을 쉬는 걸 느낀다. 망중한이라 해도 좋으리라. 느릿느릿 걷는 사이에 길은 줄어들고, 점심 먹던 고갯길이 어느새 저만치 아래로 내려가 있다.
백산 정상에 오른 것은 오후 3시쯤. 쉬며, 걸으며, 생각하며, 힘들여 생각한 것조차 바람 속으로 흩어서 놓아버리며, 우리들의 몸이 오늘 노정의 최고봉에 섰다. 대동강 물굽이를 끌어안은 산줄기들이 초록빛 어깨로 석양을 떠넘기며 꿈틀거리고 있다. 서쪽으로 뻗어 가는 지능선을 타고 평안도 대흥땅 어느 외진 산골 마을을 찾아들면 밤이 되리라. 통나무에 구멍 파서 만든 벌꿀통 몇 개 산자락에 기대놓고, 벌목꾼으로 살면서 늙은 내외가 호롱불을 돋우며 반겨 맞아줄까? 물길이 열리는 날마다, 산에서 베어온 원목으로 뗏목 만들어 타고, 냄비와 푸성귀와 양식을 싣고, 어기여차, 어기여차, 대동강 물길을 따라 삿대를 젖는 떼꾼들도 만날 수 있을까? 바다는 멀지만, 서해는 더욱 멀지만, 모든 강물의 끝에는 바다가 있고, 모든 강물의 시작에는 산이 있으니, 우리가 서있는 이 산머리도 강물과 바다가 시작되는 곳.
백산의 동쪽은 모두 함주땅이다. 옛 함주에서 함흥을 떼어내어 독립시키고, 그 나머지를 다시 나누어 영광과 함주가 되었지만, 함주라는 이름은 함흥보다도 오래된 이름이다. 함주 북쪽의 영광은 더더구나 분단 후에 생긴 이름이다. 함주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기 때문에 지석묘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백산 동쪽기슭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금진강이 된다. 금진강은 남쪽으로 계곡을 만들며 흘러가서 정평군 민초들의 목마름을 달래고 동해로 흘러든다.
함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중 재미있는 것으로는 '광포매몰'전설이 있다.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의 경계에 있는 광포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데, 광포매몰 전설은 바로 멀쩡하던 마을이 가라앉아 큰 호수가 생길 때의 이야기다.
옛날 한 노파가 광포에서 조그만 주막을 차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갈건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서 배가 고프니 요기를 좀 시켜달라고 간청하였다. 주막집 노파는 그 노인에게 밥 한 상을 잘 차려주었다. 노파가 차려준 밥을 다 먹고 난 노인은 가진 돈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물었다. 노파는 돈 받으려고 차려준 밥상이 아니니 밥값 걱정은 말고 떠나시라고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다. 노인은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지금부터 3일간의 양식을 준비해두었다가, 저 산 위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자석상의 눈에서 피가 흐르거든, 준비해둔 양식을 가지고 높은 산 위로 피난을 떠나시오"일러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주막집 노파는 그 노인이 일러준 대로 사흘 치 양식을 꾸려놓고, 동자석상 눈에서 피가 나는가를 살피러 다녔다. 그 무렵 광포에는 불량배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노파를 골려주려고 밤에 몰래 산에 올라가서 동자석상의 눈에 붉은 칠을 해놓고, 노파에게로 달려가서 석상이 혈루를 흘린다고 알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노파는 그 노인에게서 들은 대로 준비해둔 양식을 들고 높은 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불량배들은 노파가 집을 비우자마자 주막집 술통을 열어 마음대로 마시고 대취하였다. 그때 마침 해일이 일어 주막이 있던 광포 마을은 순식간에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한 마을이 사람들과 함께 가라앉아 호수가 되어버렸지만, 노인의 말을 들은 노파는 목숨을 건졌고, 그렇게해서 생긴 호수가 광포이다. 광포는 두 개의 호수가 있는데, 한쪽은 민물, 한쪽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석호라고 한다. 전설의 고향 함주땅을 한번 더 굽어보고, 대흥리고개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숨이 덜 찬 대신 조금만 방심하면 길을 잘못 들어서 곤욕을 치른다. 오늘도 하마터면 1,613.1m봉에서 대흥리 쪽으로 빠질 번했다. 앞서 가던 김봉관씨가 "어이! 잘못 왔다! 도로 올라가자!"하면서 되돌아왔다. 백은식씨와 나는 후미에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손해본 것 없지만, 바짝 따라 내려갔던 이도윤씨는 또 한번 물 뜨러 갔던 사람처럼 땀에 젖었다. 대흥리고개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진다. 한 걸음이라도 물이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하룻길을 접는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밤은 또 다시 아침으로 바뀌고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네! 보리밭은 멀지만, 보리밭 노래는 입술을 열고 멀리 퍼진다네. 보리이삭이 피는 마을은 먼 남쪽에 있으니, 내 몽상 속에서 솟구치는 종달새들이나 멀고 먼 고향 하늘을 만지게 하리라. 수첩 속에 적어 넣는 사이에 세분은 어느새 차일봉 그늘로 들어서고 있다. 행동하는 사람과 사고하는 사람 사이에서 길은 굽이친다. 또 하루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해야할 검산령. 그곳엔 어떤 그늘, 어떤 바람이 기다리고 있을까.
[제18구간], 모든 강물의 끝에는 바다가 있고, 모든 강물의 시작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