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고원의 밤하늘, 별이 한층 가깝다
제19구간 : (상)검산령∼노란봉∼(청남·청북)정맥분기점∼마대산∼황초령
노란봉 오르는 길은 해를 안고 걷는 길이다. 길이 동쪽으로 향하는 탓도 있지만, 다락밭 이랑에서 고개를 내민 감자싹들이 내 눈엔 또 다른 태양처럼 귀하다. 검은흙을 열고 일어선 파릇파릇한 생명들이 어떤 꽃보다 아름다워, 내 발길이 자주 그들 곁에 머문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은 '감자꽃'이란 동시에서 이같이 노래했지만, 이제 막 이파리를 펼치기 시작하는 어린 감자싹들은, 미래의 꽃 빛을 줄기 안에 깊숙이 감추고 있어서, 너는 자주다, 너는 하양이다, 갈래짓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어린것들은, 어린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을 포용하고 뛰어넘는다. 저 감자 싹들이 훌쩍 자라 저마다의 꽃빛을 토하고, 저 감자이랑이 떠들썩하게 부풀 때쯤이면, 집집마다 감자 익는 향기가 마을의 공기를 풍요롭게 달구리라.
감자밭을 지나서 반시간 넘게 걸어서 작은 언덕에 올라섰다. 눈 아래 비탈이 모두 다락 밭인데, 밭마다 파릇한 새싹들이 덮고있어서 초여름 초원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밭이 하나 있었다. 내 어머니는 한없이 부지런한 분이어서, 많은 식구에 잘 먹이지는 못해도 배곯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우리가 사는 도시 근교에 제법 넓은 밭 한 뙈기를 장만하셨다. 그 밭을 부치는 농부는 따로 없고, 내 어머니가 틈틈이 고구마, 콩, 밭, 녹두, 고추, 배추 같은 작물을 심어 놓으면, 내가 틈틈이 어머니를 따라가거나 혼자 가서 그때마다 필요한 찬거리들을 추수해오곤 했다. 여름마다 그 밭 고구마를 캐오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다. 주둥이가 좁다랗고 속이 깊은 대바구니를 하나 들고, 호미 한 자루를 들고,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그 밭이 있었다. 밭이랑을 휘 덮은 고구마 줄기를 걷어버리고 씨알 굵은 고구마들만 캐서 이고 오는 일이 주로 내 차지였던 것이다. 그게 내겐 커다란 불만이었다. 며칠에 한번씩 고구마 캐오는 일 자체보다도 그 밭으로 오고가는 길이 우리 학교 교문 앞을 지나가야 했던 것이다. 학교 앞을 안 지나가려면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야 했는데, 아무리 야산이지만 고구마 한 바구니를 이고 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 많은 학생들 앞을 고구마 바구니를 이고 왔던 날, 나는 마당에다 고구마 바구니를 던지면서 울었다. "나 다시는 고구마 캐러 안 간다!"고….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의 그 지독한 보리고개를 우리 식구들은 그 밭 덕분에 푸성귀며 잡곡 간식 떨어뜨리지 않고 이웃과 나눠먹으며 지낼 수 있었다. 내 어머니는 그 밭을 팔아서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밭으로 바꾸셨는데, 바꾼 밭은 1960년대 초 내 대학 입학금으로 날아 가버렸다. 그 밭자리는 지금 큰길이 나고 그 옆은 택지로 바뀌었지만, 내 어머니는 한번도 너 때문에 그 밭 날렸다는 원망 않으신다. 지금 내 눈 아래 저 무성한 감자싹들은 저 아랫말 어머니들이 그녀의 어린 자식들을 위해 심었을 것이다. 겨우내 갈무리했던 씨앗들을 내다 심고, 다시 열매가 영글 때까지, 사람들은 땅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수고하고 또 수고한다. 이 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고 살아왔겠나. 수고할 땅도 없는 민족들에 비하면 우리는 복 받은 민족이다.
노란봉에 올라서니 오전 11시 20분,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진행이 빠르다. 노란봉은 왜 노란봉일까?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파릇한 이파리들만 보인다.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지명들이 낯설다. 원나라와, 여진족들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그 근원을 캐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노란봉에서 산창령으로 내려서는 길도 아주 가파르다. 이제부터 대간 능선의 오른쪽(동쪽)땅은 영광군 영역이다. 영광은 분단 후 오로군으로 부르다, 1981년에야 영광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영광 역시 옛날에는 함주 땅이었다. 함흥은 곧 함주 안의 노른자위요, 함흥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일어선 터전이기도 하다. 조선조 초기의 문신 정도전이 함주에서 남긴 시가 있다. '조수(潮水)의 빛과 하늘 그림자가 함께 창망한데,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이 석양빛을 띠고 떠 있네. 이때 차마 옛 곡조를 들으랴, 함주 벌판은 원래 나라의 중앙이었다네.' 조선 건국의 터전이던 함흥을 예찬하는 노래에 다름 아니다. 이성계가 정종에게 물려준 왕위가 방원에게로 가는 것을 보고 함흥본궁으로 돌아와서 머물고 있었다. 이성계는 아들 방원(태종)이 보내는 사자마다 목을 베어 죽였다. 그후부터 어딘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라고 비유하는데, '함흥차사'란 바로 이 대간의 동쪽 마을 함주 복판 함흥에서 있었던 일화다.
시간도 지나가고 사람도 지나간다. 죽인 자도 죽고, 산 이름도 강 이름도 마을 이름도 바뀌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노란봉 동북쪽 기슭을 타고 신풍리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길은 성천강 상류인데 저 물길 따라가면 정도전이 나라의 중심이라 노래한 함주벌이 있겠지만, 대간 능선만 따라가는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 만나본다.
산이 고도만 높을 뿐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고, 고산지대여서 봄 날씨 같아 걷기에는 좋다. 산창령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물통들을 채웠다. 산창령에서 1720.1m봉 오를 때까지가 조금 힘들었을 뿐, 이 구간의 최고봉인 1,855.6m봉까지는 비교적 쉽게 왔다. 아침 5시 25분에 해가 떠서, 오후 7시 32분에 해가 지는 날. 아무리 해가 길어도 (청남·청북)정맥분기점까지 가기는 무리다. 1,855.6m봉 북쪽 안부에 텐트를 치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서 겨울 속에 있는 것 같다. 방한복을 꺼내 입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눈에 익은 별자리들이 드넓은 하늘에 사금파리를 뿌려 놓은 것 같다.
이 산 이름은 무엇일까? 지도에는 이름이 없는 이 산 이름이 대동여지도에 낭림산이라 나와있는 바로 그 산이라면 고산자 김정호는 백두대간을 잘못 그리지 않았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현재 북한에서 낭림산이라 부르는 산을 남한에서는 소백산이라 부른다. 북한에서 소백산이라 부르는 산을 남한에서는 낭림산이라 부른다.(본고에서는 북한쪽 지명을 따랐음) 그렇다면 낭림산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내 발아래 이 산, 제19구간 최고봉인 이 1,855.6m봉이 낭림산이 아니었다는 증거 또한 없다. 자잘한 강줄기까지 낱낱이 밝혀놓은 대동여지도에서, 이씨조선의 성지에 속하는 함흥 부근의 지형을 잘못 파악했을 리가 있는가. 이 산, 이 1,855.6m봉이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에 낭림산이라 불렸다는 증거만 찾을 수 있다면 지도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고산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으련만….
또 하루의 태양이 동해 쪽에서 떠올라 우리들 머리 위까지 왔다. 아침 5시가 넘을 무렵 길을 떠났기 때문에, 마대산 정상에서 아침을 먹었다. (청북·청남)정맥분기점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가다 북쪽으로 휘어 도는 산줄기가, 우리가 타고 가는 대간보다 훨씬 우뚝하고 기세 등등해서 우리가 행여 잘못 가는 것이 아닌가 자꾸 돌아보게 된다. 능선의 오른쪽(동쪽)은 가파르지만 왼쪽 비탈은 느슨해서, 대간 마루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가파른 비탈 쪽으로 바짝 붙어서 따라간다.
뒷봉 통과 오후 4시, 문암장고개 부근에서는 대간 마루금을 놓치고 남쪽 비탈로 내려와 버렸다. 길이 있었다 없었다 뒤섞인 지점들이 늘 문제다. 대간 마루금을 멀리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내일 아침해가 뜨면 문암장고개를 찾아서 올라갈 것이다. 내일 점심때쯤이면 황초령에 도착하겠지. 또 하룻밤 한데 잠을 청하면서 올려다보는 밤하늘. 개마고원 서남쪽, 장진고원의 밤하늘. 밤이 깊어갈수록 별들이 한층 가깝다.
[제19구간], 장진고원의 밤하늘, 별이 한층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