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들
제20구간 : 황초령∼오봉분기점∼고대산∼백암산∼부전령
이 향 지
이름도 모른다. 고향이 함경도 어디라는 것밖에, 사는 곳도 모른다.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면 81세가 되셨을 것이다. 자그마하고 깡마른 체구에 후줄근한 배낭을 메고, 북한산 능선을 바람처럼 걷던 할아버지. 운동화 차림에 검고 주름진 얼굴. 낡은 모자가 바람에 날려갈세라, 모자 안단 양쪽에 고무줄 끈을 매달아 턱에 걸고 계셨다. 땀에 절은 타월을 목에 둘렀다 허리띠에 옮겨 걸었다하며 땀을 닦곤 하셨다. 손 대신 로프 대신 그 타월 한쪽 끝을 내려뜨려, 나를 비봉 꼭대기까지 끌어 올려주셨다. 그때 벌써 일흔 두 살이라 하셨는데, 바위 타는 모습은 20∼30대 청년처럼 날렵하셨다. 20세기말. 마지막 10년이 시작되던 첫해의 5월. 북한산 비봉 능선에 수수꽃다리 향기가 가득하던 날이었다.
매주 두 번 이상 비봉을 찾아 북에 계신 어머니를 부르며 우신다던 할아버지. 황초령에서도 생각난다. "진흥왕순수비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겨놓았고, 할아버지께서 그리워하시는 북쪽은 북한산 중에서도 백운대나 보현봉에서 더 잘 보이는데, 왜 하필 서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비봉(碑峰)까지 걸어오셔서 우시느냐" 물었다. "내가 여기서 우는 것은 이 비석 때문이오"했다. 총알 자국이 박힌 가짜 비석(현재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遺址를 뜻함)이나마 어머니처럼, 자신을 기다리다 돌아가셨을 어머니 무덤 앞 비석처럼 끌어안고 "오마니! 오마니!" 부르며 실컷 울고 나면,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머니를 만난 듯, 제삿날도 모르는 어머니 무덤 찾아 성묘라도 한 듯, 울분과 회한에 짓눌리던 가슴이 조금 가벼워지기 때문이라 했다. 그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북한산 비봉은 식솔들 몰래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통일이여,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원하시는가. 그날 그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실컷 울지도 못했다. 스물 몇 살 땐가 혼자 내려와서 전공 노릇을 하며 사셨다는 분. 길이 있다면 걸어서라도 고향에 가보고 싶다했는데, 오늘 내가 이 길을 걸을 줄 알았더라면 사는 곳과 고향이라도 자세히 물어둘 걸.
바람이 분다. 압록강을 건너서 장진강 줄기를 거슬러 올라왔을 바람엔, 격랑의 세월, 거친 파도의 이랑을 넘어온 물 냄새가 섞여있다. 북한산 비봉에서 그 할아버지가 느꼈을 고향처럼, 아득하고 먼 물 냄새. 흔들리는 것이 어찌 내 옷깃과 저 나뭇잎들뿐이랴.
황초령에는 관북의 내륙을 오르내리는 관문이 있었다. 역사 깊은 고갯마루. 장진과 함주, 영광, 함흥 등지로 오가는 차량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것일까 지나가는 차량도 사람도 없이 텅 비었다. 황초령에도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다. 황초령에 세워졌다하여 황초령비로 불리는 진흥왕순수비는, 창녕비·북한산비·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 시대의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의 족적들이 담겨있는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의 하나였다.
서기 568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초령비는 비신이 손상되고 글자가 마모된 채 흙 속에 묻혀있었다. 1852년 관찰사 윤정현이 발견하여 황초령 아래 진흥리로 옮겨 세웠고, 현재는 함흥 본궁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 황초령 부근은 고구려-옥저-한(四郡 중에서도 현도)-신라-발해-여진-원-고려-청-조선 등이 부흥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영토 다툼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다.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된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용맹을 떨친 왕이나 장군의 이름과 족적만 기록할 뿐, 하잘 것 없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들의 역사는 이 땅 자연의 원소처럼 불에 타고 물에 찢기는 종이 대신, 흙과 공기와 물방울 속에 집을 짓고 있으며, 바로 그것들 자체이다. 그러하기에 이 산, 이 길, 저 바위, 저 나무들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이 땅의 역사, 바로 그 주인공들인 것이다.
바람이 분다. 이 땅에서 돋아났다 이 땅에서 스러진 수많은 풀뿌리들의 탄식 같은 것이, 북한산 비봉에서 울던 실향민 할아버지처럼 울분과 회한을 자연 속에서 삭이며 늙거나 죽어간 사람들의 눈물 냄새 같은 것이, 바람에 섞여와서 나를 흔든다. 수수천년 이 땅을 적셔왔을 탄식과 눈물냄새 같은 것에 더 깊이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나는 좀 더 빨리 걷는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기를 실어 나르는 송전선 아래를 뛰듯이 지나간다. 감자밭을 지나서 야트막한 언덕을 바람처럼 넘는다.
밤이 되면 희미한 등잔불을 밝히고, 새끼를 꼬거나 헌옷을 꿰매 입으며 살았어도, 이 땅의 민초들은 이것이 삶이거니 순종하고 체념하며 살다 죽었다. 그러나 왕이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고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려 했다. 대가야를 평정하여 창녕비를 세우고, 백제와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여 북한산비를 세우고, 함경도 함흥과 이원 땅, 발해의 영역까지 북상하여 황초령과 마운령에까지 순수비를 세웠던 신라 진흥왕은, 백제의 근초고왕,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더불어 삼국시대 척경(拓境)의 삼걸주(三傑主)로 통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 갈문왕의 비(妃)였다. 왕은 세상을 떠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중의 옷)를 입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진흥왕 편. 삼국사기에는 7세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 불렀고, 지증왕의 손자였다. 서기 534년(법흥왕 21년)에 태어나서 576년(진지왕 1년)까지 살았다. 540년부터 576년까지 37년간 왕위에 있었다하니 삼국사기에 있는 7세 즉위설이 맞다.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은 법흥왕의 아우였고, 진흥왕 집권 초기에 섭정을 한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진흥왕은 숙부와 조카의 근친결혼으로 태어난 인물이었다. 진골과 성골의 피에 다른 피를 섞지 않으려 했던 것은 신라 귀족들뿐이었을까. 역대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핏줄 다른 세력과의 정략 결혼도 서슴치 않았다. 멀게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경우가 그렇고, 가깝게는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경우가 그렇다. 대륙풍과 바닷바람의 간섭과 시달림을 끊임없이 받으며 이 산 바위와 나무들은 뼈가 드러나고 가지가 휘어졌지만, 태어난 자리에서 제 소명을 다하다 스러질 뿐이겠지만, 한 시대 빼어난 인걸의 역사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제 자리를 지켜온 자연의 역사가 더 길고 더 많은 진실을 포용하고 있다.
감자밭을 지나서 잎갈나무 숲을 가로질렀다. 언덕의 정점을 넘어서니 또 감자밭. 감자밭, 감자밭, 이랑 너머로, 목마름을 달래며 쉬고 싶다는 소망마저 날려 보내버렸다. 내 몸과 마음은 날아가지 않고 걸어서 가야하는 길로 왔다. 아무 것도 지지 않고 걸을 수 있다면 더 가볍겠지만, 백두산에 도착할 때까지 등에 붙은 배낭만은 내려놓을 수가 없다. 내 등에 붙은 배낭은 이미 나의 일부. 백두대간을 걷는 동안 내 체중에는 내 배낭의 무게까지 포함된다. 불과 몇 걸음 앞. 반쪽만 펼친 병풍처럼 막아서는 산은 매봉(鷹峰·1,314.3m)이다. 한자로는 응봉이라 쓰고 한글로는 매봉이라 쓰는 것은, 다른 매봉들의 경우와 같다. 날카로운 능선을 잇대어 남쪽으로 줄기를 뻗치고 있는 모습이, 한쪽 날개만으로도 세계를 지배하고 날아오를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독수리처럼 오만해 보인다. 그러나 매봉 북쪽은 고원지대여서 둥그스럼하고 살찐 언덕들이 수많은 감자밭을 껴안고 있다. 자식들을 위해 낮은 삶을 마다 않은 이 땅의 어머니들처럼-. 낮은 언덕일수록 더 많은 밭을 품고 있는 것을, 보라.
매봉을 한번 더 바라보고 황초령으로 내려섰다. 장진선 협궤열차가 터널 속을 통과 중인 모양. 발아래 땅이 흔들린다. 장진호반에서 철로가 끝나는 장진선은 고도 차가 심한 지형에 삭도를 설치하여 운행하고 있다. 전기로 끌어올리고, 내려주고 하면서 고도 차를 극복하는 운행방식이다. 아직까지 원목수송을 위한 화물열차만 운행된다지만, 스위스의 융프라우나 뉴질랜드 등지의 관광지에서 보는 것처럼, 장진호반의 아름다움과 연결하는 관광열차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황초령역은 북쪽으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있지만, 우리는 기차로 오지 않고 자동차도로로 왔기 때문에 그곳 풍경은 모른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황초령에서 황초령까지의 3km를 더 걷게 되었다. 매봉분기점에서 내려설 때 잠깐 능선을 놓쳤을 뿐, 생바우고개까지 길 잃지 않고 걸은 것이 신기하다. 점심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고 아주 목마르거나 허기지기 전에 간식과 물로 에너지를 보충하며 걷는다. 도처에 감자밭이 있어서, 감자 수확하는 농부들과 인사도 나누고, 찐 감자도 얻어먹는 즐거움을 누린다. 하얀 바위산이 석양 속에 전신을 드러내고 있는 곳까지 오니 더 걸을 수가 없다.
별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둘째 날의 하늘은 우리편이 아니다. 흙과 바위와 나무에 남아있던 열기와 공중을 떠돌던 물방울들이 만나서 안개까지 잔뜩 풀어놓았다. 걸어온 길이 보이지 않고 가야할 산이 보이지 않는다. 생바우에서 오봉까지는 곳곳에 암봉이 있어서 속도가 늦어지는데, 오봉분기점을 지나기도 전에 빗방울이 굵어진다. 갈아입을 옷들은 비닐주머니 속에 넣어두었고, 배낭 덮개를 꺼내 씌웠지만, 흘러내리고 스며드는 빗방울들은 어쩔 수가 없다. 안개가 점점 더 짙어져서, 몇 번인가 길을 헛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행군을 계속한다. 여름 산에서 비 맞는 것이 어디 처음인가. 젖기 전까지가 두렵지, 젖을 만큼 젖은 뒤에는 두려울 게 없다. 위로 삼아 주고받던 흰소리들도 빗방울이 굵어지면서부터 잠잠해졌다. 안개 때문에 먼 곳은 보이지 않지만 오봉산으로 오르는 능선이 뚜렷하고, 무엇보다도 미끄러운 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행들 덕분에, 전진 또 전진한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오봉의 아름다움을 그릴수도 있었겠지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속에서는 그림의 떡보다 더 먼 풍경이다.
배꼽시계가 울 때마다 찐 감자를 먹기로 했다. 각자 배꼽시계 우는 시간이 달라서, 식은 감자 먹는 시간들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젖은 바위에 앉아 빗방울 섞어가며 내가 먹는 감자 맛은 먹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폭신하고 따뜻한 포만감보다는 비애에 가까운 식사. 우리는, 이미 풍요로운 세계의 주민들이 아니다. 옷은 젖었고, 음식은 차며, 집은 먼 곳에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는 비오는 산 속에서 식은 감자로 허기를 때우는 우리처럼, 비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를 피할 수 없이 넘어 가야하는 우리처럼, 젖은 흙에 미끄러지고 풀잎에 살갗 쓸리면서도 걷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우리처럼,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백두대간 궤도를 이탈할 수 없는 우리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과 자연이 대를 이어 견디며 지키고 이룩해 놓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비 맞는 나무들처럼 능선을 타고 가며, 비나 그쳤으면 하던 소망은 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젖었다. 껍질이 젖으면 뱃속에 오한이 든다. 털 가진 짐승들이야 툴툴 털고 다시 걸으면 되겠지만, 우리는 둘러앉아 라면을 끓인다. 더운 국물을 훌훌 불어 마시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아, 살 것 같다"다. 공중이 머금었던 먹구름들, 모두 비되어 내린 뒤, 하늘은 또 다시 푸른 얼굴을 드러낸다. 젖은 풀들 사이로 고대산으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우리는 내일 또 다시 저 길을 가리라. 개마고원 상공에 뜨는 쌍무지개를 그리며-.
[제20구간],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