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의 용마루를 타며
제21구간 : 부전령∼(구)부전령∼백역산∼명당봉∼불개미재
'계집애가 새알을 만지면 그릇 깬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차별이 심하던 풍토에서, 여자가 지붕에 올라 용마루를 타는 일은 어찌 생각될 것인가. '계집애가 새알을 만지면 그릇 깬다'는 속담은, 여자는 어릴 때부터 그릇이나 소중히 다루며 살림이나 배울 일이지 수풀 속 새알 같은 것에는 흥미조차 갖지 말라는 구속이며 억압에 다름 아니다. 시대는 바뀌어 마음만 먹으면 새장 속에 예쁜 새들을 가둬놓고, 갇힌 새들이 낳는 알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새알을 깨트려도, 갇힌 새들은 초롱초롱한 소리로 울어 귀를 즐겁게 해주며 새로운 알들을 줄줄이 낳아 바치며, 스텐레스 그릇들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지붕을 타는 일도 그렇다. 현대식 집들은 평평한 슬라브 지붕 위에서 운동도 하고 빨래도 널고 장항아리도 늘어놓을 수 있으니, 여자가 지붕을 탄다는 말도 이제는 예사롭게 들릴 정도가 되었다.
내가 지붕에 처음 올라간 것은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초가 지붕 위에서 둥글어진 박 덩이를 따기 위해서였다. 저녁반찬으로 박나물을 만들어 먹어야겠는데, 나물 해먹기에 적당한 박이 지붕 위에 있었고, 장마 지난 초가지붕으로 올려 보낼 만큼 체중 가벼운 인물이 그때 집안에 나밖에 없었던 때문이었다. 키 큰 어른에게나 맞게 만들어진 나무사다리를 타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후둘후둘 떨리는 한쪽 발을 지붕 위로 옮겨 딛자마자 내 두 손은 지푸라기만 잔뜩 움켜잡은 채 지붕에 얼굴을 박으며 엎어지고 말았다. 언닌가 누군가 한 사람이 더 사다리 위쪽까지 올라와서 내 엉덩이를 떠밀어 박이 있는 곳까지 갔다. 불과 몇 걸음 저쪽에 있는 박 덩이가 몇 십리 저쪽에 있는 등불처럼 멀어 보였다. 바로 옆에서 어른이 지키고 있어도 박이 있는 곳까지 서서 걸어가지도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갔다. 여름 지난 초가지붕은 내 조그만 몸도 무거워해서, 체중을 옮길 때마다 나락으로 푹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날 우리 집 지붕의 박 넝쿨은 반 이상이 뒤집어져서 한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가까운 오늘, 내 몸은 또 다시 지붕 위에 있다. 장마의 전조인 소나기가 한차례 내린 뒤, 뭉게구름이 눈부신 하늘 아래서, 한반도의 지붕인 개마고원의 용마루를 타고 있는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꺼지는 초가 지붕은 아니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불투명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구간 중에서도, 한쪽은 가파르고 반대쪽은 완만한 경동지괴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백암산∼백역산∼명당봉 구간이다. 대간 남쪽을 내려다보면 가파른 지붕 위에 선 듯 까마득하고 대간 북쪽을 보면 어느 구릉지대의 초원을 보는 것 같다. 언덕의 윤곽들은 부드럽고 강줄기들은 느린 물줄기를 끌고 작은 언덕만 만나도 주춤거리며,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이 구간 대간 북쪽의 물줄기들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서 호수를 이루다가 압록강이 되어 서해로 간다.
반세기 전 초가지붕 위로 나물박을 따러 올라갔던 그날처럼,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백두산. 수많은 갈림길, 물을 구하기 어려운 능선의 연속. 초가지붕 위든, 산줄기 분수령이든, 지붕의 이름으로 생긴 지형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개마고원이 한반도의 지붕으로 불릴 정도로 독특한 지형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H. 라우텐자흐 著, '코레아'에서 읽을 수 있는데, 요약해보면 '화산이 폭발할 때 흘러내린 쇄빙설'들이 쌓여서 발달한 용암대지라는 것이다. '개마고원은 남동쪽에 놓인 함경산맥(백두대간;필자 주)으로 갈수록 점차 고도가 높아지면서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지역까지 전개된다. 개마고원은 백두산 지역의 현무암지대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에서는 지지적으로 이 지역의 일부에 속하는 낭림산맥에 의해 평북지역과 분리된다. …개마고원도 북부 동해안지방과 같이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그 길이는 거의 400km에 달하고, 북서-남동방향의 폭은 최대 160km이며, 그 면적은 약 30,000㎢이다. (H. 라우텐자흐 著, '코레아')'
현대지도에 의거하여 개마고원의 위치를 규정해보면, '백두대간 마대산 부근의 (청북·청남)분기점에서부터 소마대령∼마대령∼동백산∼한태령∼낭림산(남한에서는 소백산)∼설한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즉 낭림산맥의 동쪽지역'이자, '(청북·청남)정맥분기점∼마대산∼황초령∼고대산∼부전령∼백역산∼금패령∼희사봉 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부전령산맥)의 북쪽지역'이자, '두류산∼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마천령산맥)의 서쪽지역'이자, '압록강 상류의 남쪽지역'에 형성된 고원지대를 통 털어 말하는 것이 된다. 현재는 장진고원·부전고원·개마고원·백두고원 등으로 세분해서 부르고 있지만, 이 모두는 개마고원이라는 큰 이름에 포함되는 것이다.
개마고원의 '개마(蓋馬)'라는 어원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자세히 밝혀놓았다. "옛날 내각에 있을 때 몇몇 학자들과 함께 지지(地志)를 의논한 일이 있는데, 그때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백두산으로 보았다. 즉 '개마'의 첫 음(音)이 '해(奚)'와 서로 가깝고 우리말에 '백(白)'은 '해'다. 또 '마(馬)'가 '마니(摩尼)'요, '두(頭)'도 또한 '마니(摩尼)'다. 따라서 '개마'는 '해마니(奚摩尼)'요, '해마니'는 '백두(白頭·하얀머리)'다. 또 '서개마(西蓋馬)'는 백두의 서쪽에 다른 하나의 큰산이 백두와 함께 웅장함을 다투기 때문에 서개마라 말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약용의 해석은 '개마'의 어원은 자세히 밝혔으나,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에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한 내용과는 다소 다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옥저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고, 동옥저의 경계는 함흥·정평·홍원이 낭림산 이동(以東)이며 황초령·부전령 두 령(嶺)의 이남이다. 북옥저의 경계는 북청·이원·단천이 장백산을 한계로 하였고, 남옥저의 경계는 영흥·고원·문천·덕원·안변이 철령을 한계로 하여 그 서쪽이 곧 일산(검산?)이며 대간과 연달았다.…'하였으니, 자료마다 의문이 남는다. 지형을 지도로 옮겨서 보여주지 못하고 문자로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개마대산'이 지금의 백두산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개마대산은 지금의 낭림산(남한에서는 소백산)∼동백산 일대를 말하는 것 같다. '백산' 즉 '하얀머리'산이란 어원도 같기 때문이다.
개마대산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에 '개마국'이란 국명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개마국(蓋馬國) :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압록강연변에 있었던 부족국가의 하나. 환인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와 공존하다가 서기26년(대무신왕9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다. 개마국의 위치에 대하여 '해동역사', '지리고'에서는 삼갑(三甲)이라 하여 백두산 이남의 개마산 일대를 말하고 있으며, 이병도는 압록강상류의 어느 지역에 해당되리라고 보았다.' 이 책의 설명 또한 그 위치를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삼갑(三甲)'을 삼수·갑산으로 보면 개마고원 일대가 된다. 또 '백두산 이남의 개마산'이란 내용에서 개마산이 백두산이 아니라는 사실이 반증된 셈이다.
땅덩어리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인물·말발굽·나라이름들이 드나들었던가. 함경도는 '본래 숙신국(肅愼國) 땅이다. 한(韓)·진(晉)에서는 읍루( 婁)라 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물길(物吉)이라 하였고, 수(隨)·당(唐)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고, 발해(渤海)·송(宋)·원(元)에서는 여진(女眞)이라고 하였다. 한무제(漢武帝) 원봉4년에 현도군을 두었다. …. 뒤에 옥저국 땅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
함경도에서도 '함흥 이북은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사나우며 기후가 춥고 토지도 메말라 곡식은 조[栗]와 보리뿐이며, 벼는 적고 면화(綿花)도 없다. 지방 사람이 개가죽을 입고 추위를 막으며 굶주림을 견디는 것은 여진족과 똑같다. 산에는 잘[貂皮·'貂'는 '담비초'자. '잘' 즉 '초'는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 모양은 족제비 비슷하고 털빛은 황갈색임. 가죽이 귀하여 옛날에 그 꼬리(貂尾)로 시중(侍中) 등의 벼슬아치들의 관(冠)에 달아 장식하였음;필자주]과 인삼이 많이 난다. 백성은 '잘'과 '인삼'으로 남쪽 장사꾼의 무명과 바꾸어야만 비로소 바지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살림이 넉넉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
모두들 어떻게 살아왔을까? 생바우-오봉-고대산-백암산-부전령-백역산-명당봉-금패령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남쪽 지역은 신흥군이다. 일제 강점기에 함흥으로부터 분리 신설된 신흥 지방에는 여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부른 민요들이 많다. '애원성', '물방아찧기가 나는 싫어', '삼삼이 노래', '성주풀이', '삼베타령', '호미타령', '집짓기노래', '각시노래' 등이 그것인데, 그중 '삼베타령'의 가사는 절대빈곤의 시대를 살다간 선대 여인들의 슬픔과 체념이 녹아있어서 따라 부르다 보면 콧날이 시큰거린다. "노다가 죽어도 원이라는 / 이 삼을 삼다가 죽으면 나는 어이하리오 / 흥 응 응 에헤야 / 세월아 봄철아 가지를 말아라 / 알뜰한 여자가 다 늙어간다 / 흥 응 응 에헤야 / 모란봉 고지에는 안개가 도는 데 / 우리네 여자들은 삼삼기나 합시다 / 흥 응 응 에헤야"
개마고원 용마루룰 타고 사흘을 걸어 불개미령을 지척에 두고 있다. 1,865m봉 능선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돌아보는 길-. 발은 부르트고 몸에서는 소금기가 버석거린다. 어떻게 걸어왔을까?
이번 구간의 부전령∼(구)부전령 구간은, 황초령∼황초령 구간과는 달리 오름 길이 꽤 가파랐다. 능선이 휘어 도는 지점을 놓치고 길 없는 곳에서 나뭇가지들과 씨름을 하느니, 1,562.7m봉까지 아예 길을 따라 올라왔다. 1,562.7m봉에서 (구)부전령으로 내려설 때도 밭으로 가는 길을 피해서 능선을 타야했다. 조금 내려오니 다시 길이 있었다. 송전선 아래를 지나서 마루턱으로 내려선 뒤 다시 오름길로 들어섰다. 백역산 정상은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정상 직전부터는 아무리 걸어도 숨만 가쁘고 길이 줄어들지 않아 뒤로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백역산(白亦山·1,855.5m) 정상에서 느끼는 바람은 시원하다못해 추웠다. 고도 1855.5m면 설악산 대청봉보다 높은데, 고원지대에 솟은 산이어서 그런지, 평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명당봉까지 올라가면 물 있는 곳이 멀어지기 때문에 1,830m봉 서쪽 계곡으로 내려가서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기도 했다. 감자를 물리도록 먹었지만, 뜨거운 감자를 먹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산을 앞두고 돌아보는 길은 모든 곳이 다 추억의 땅이다. 사람·바위·나무·길·비탈밭 감자 한 톨의 헌신에 이르기까지, 문자로 기록할 수 없는 향기며 소리들. 그것들을 한 번 더 용마루 위로 불러모으며, 이 산맥 무수히 넘나들었을 아련한 역사의 말발굽 소리 듣는다.
[제21구간],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의 용마루를 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