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령산맥 감자 얘기 들어보셨어요? 거짓말 안보태고 애기 머리통만 했어요. 맛도 좋거니와 씨알이 하도 굵어서, 그걸 베개 삼아 낮잠을 자곤 했다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큰 부전령 감자를 평지에다 옮겨 심으면 이상하게도 보통 감자가 돼버린단 말이요.…" 몇 달 전 산으로 가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부전령산맥에 심으면 베개를 삼을 만큼 씨알이 굵던 감자가 생육조건이 더 좋은 평지에 내려와서 오히려 더 작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향이 함흥이라는 그 기사가 어릴 때 친척집에 가서 먹어도 보고, 어른들이 머리에 고이고 낮잠 자는 것도 봤다는 부전령 감자. 나는 그 이상한 감자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후론 부전령산맥(함흥과 북청, 장진·부전·구 풍산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을 뜻함)이나 그 일대 고원지대에서 감자를 수확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만 보이면 농부의 손과 감자의 굵기를 비교하며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리 선잠이라도 베개를 삼을 만큼 씨알 굵은 감자는 볼 수 없었다. 그 기사가 고향 그리운 마음에 어릴 적 기억을 부풀려 흰소리를 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석 달째 끊어 타고 있는 이 백두대간(북한에서는 부전령산맥) 일대가 한반도 제일의 화전지대였음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분은 이미 환갑을 넘겼다했으니, 그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어릴 때였으면 일제 때고, 그때는 부전령산맥 일대의 산들이 화전(火田)으로 몸살을 앓을 때였다. 부식토가 충분히 쌓인 산기슭 흙에, 그 자리에서 자란 나무들까지 불질러 태운 재까지 거름 삼아 감자를 심었으니, 그 비옥한 땅심을 섭취하고 자란 감자 씨알이 베개를 삼을 만큼 굵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함흥-신흥을 거쳐, 성천강 지류를 거슬러 오르는 67번 지방도로 옆에도 무수한 감자밭이 있었다. 추측컨대, 그 택시기사가 찾아갔던 친척집이란 부전령산맥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며 살던 화전민(火田民)이 아니었을까. 화전민이란 평야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삼림에 불을 지르고 마련한 땅에 감자 귀리 옥수수 등을 심으며 연명하던 사람들이다. 같은 땅에 2-3년 동안 감자 귀리 옥수수 등을 심어먹다가 땅심(地力)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초목들을 태우고, 그곳 땅심이 다하면 또 새로운 산림을 태우고, 옮겨다니며 농사 짓기를 되풀이하던 표농(漂農), 즉 일종의 유랑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분들이 일군 화전들이 대부분 붙박이 경작지로 변해서, 같은 땅에 수십 년을 같은 작물을 재배하니 땅심이 떨어져서 감자 씨알이 작아져 버린 것이 아닐까. 자연 그대로의 부식토와 나무 재를 거름으로 키운 감자의 굵기와 맛이, 금비(金肥)를 먹고 자란 요즘 감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을 것은 당연하다.
불개미재에 올라서니 오전 5시 15분. 일출 직전이다. 그러나 바다쪽 하늘엔 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찬란한 일출은 기대 밖이다. 여름의 절정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고원지대의 날씨는 가을 같아서 걷기에는 좋다. 잣나무 숲을 돌아나가는 길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햇살이 퍼지기 전에 좀 더 걸어두려고 1,790.2m봉 정점을 향해 비탈길을 오른다. 100여m쯤 걸어가니 삼수평과 작은명태골을 잇는 옛길 소로가 나타났다. 자동차길이 뚫리기 전에는 옛 풍산 지방 사람과 함흥 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바다와 내륙의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친척집 잔치 나들이도 하였을 것이다. 길 오른쪽에 외딴집이 한 채 능선을 등진 채 동해 쪽으로 가슴을 열어놓고 앉았다. 내려가서 길도 물어보고 물도 얻어 마시고 이곳 산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지만, 남은 길을 생각하면 출발부터 옆길로 샐 여유가 없다.
1,790.2m봉 비탈을 오르며 뒤돌아보는 길. 숨가쁘게 치오르던 산비탈까지 감자밭은 따라와서 하얀 꽃송이들을 내밀고 있다. 7월의 여명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감자꽃들. 휘어지고 굽어 돌기를 수백 번은 더하는 것 같던 계곡 길 거슬러 오르며 무수히 마주쳤던 바로 그 빛이다. 산모퉁이 돌 때마다 하늘에선 별빛이 희미해지는데, 땅에서는 오히려 초롱초롱한 감자꽃들이 별꽃처럼 돋아, 가난한 선조들의 삶에 내 마음을 연결시키고 애잔하게 흔들리게 하던 바로 그 빛이다. 산비탈 귀리밭과 옥수수 잎새들이 펼쳐놓은 초록빛 생명력을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떠올려주던 바로 그 빛. 허공 가운데서 흔들리던 잎새 사이에서 꽃이 피면 땅속의 열매들이 영글었다는 신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감자만은 아껴 두었다가,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땅에 심어놓고 하얀 꽃이 피기를 학수고대했을 사람들. 한 포기의 감자라도 늘려 심기 위해 씨눈이 붙은 숫자만큼 감자를 쪼개어, 상처 난 쪽을 재에 굴려서 저 산비탈에 심곤 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 길을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저 귀한 꽃밭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 땅을 사랑하듯이 저 산비탈 밭들도 수십 년 전 화전민들의 불길에 사라진 나무대신 저 감자들을 껴안고 키워, 해마다 꽃을 피우며 수많은 목숨들을 살아가게 했으리.
1,790.2m봉 서북쪽 비탈도 온통 밭이다. 설악산 대청봉보다 높은 산마루에서 옥수수 잎새들이 물결친다. 자연이 키운 나무들도 아름답지만, 사람이 정성 들여 가꾼 곡식들의 모습도 더 없이 아름답다. 해발 1,800m 가까운 고지대. 북위 40도 30분을 넘어선 북쪽이어서 그런지, 이곳 옥수수들은 이제야 어린 열매를 매달기 시작한다. 산마루 감자꽃들은 아직 꽃봉오리 속에서 꿈에 부푼 모습이다.
한반도를 한 그루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장 높고 추운 곳에 천지를 열어놓은 백두산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가장 가 닿고 싶어하는 정신의 꽃송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꽃이란, 모든 식물들이 가장 높은 가지 위에 피우는, 최고의 희망에 다름 아니다. 또 꽃이란, 모든 식물들이 뿌리로부터 가장 먼 곳, 가장 바람이 많이 닿는 곳, 가장 높은 하늘 가운데 가장 귀한 열매를 두고 싶어하는 몸짓, 그것에 다름 아니다. 육신의 뿌리인 고향을 먼 곳에 두고, 정신의 꽃송이인 백두산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의 몸짓 또한, 가장 바람이 많이 닿는 우듬지 끝에 꽃송이를 매달고 싶어하는 식물들의 그것처럼, 고생스러우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열매를 소원하는 정신의 몸짓이라고 자부해본다.
1,826.5m봉을 넘어 금패령으로 가는 능선에서도 감자와 옥수수들이 자라고 있다. 바람이 덜 닿는 비탈에는 귀리를 심었다. 귀리들은 제법 씨알이 굵어져서 노리끼하게 익어가고 있다. 귀리는 밀 같기도 하고 보리 같기도 해서 귀밀이라고도 부른다. 귀리는 원산지가 중앙아시아의 아르메니아 지방이라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때 몽고병사들이 말먹이로 가져온 것을 재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귀리는 들보리이다. 제비와 참새가 잘 먹기 때문에 연맥(燕麥)·작맥(雀麥)이라고 하며, 또 광맥( 麥)·이맥(耳麥)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고, <아언각비(雅言覺非)>라는 책에는 '연맥은 작맥 또는 영당맥(鈴 麥)이라고도 하고, 방언으로는 구우리(瞿于里:귀리)이다. 사람들이 시를 지을 때 많이들 구맥(瞿麥)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나라의 이문(吏文)에는 영당맥을 이맥(耳麥)이라고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고 설명하고 있다.
'귀리'란 이름은 '구우리'란 방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맥'이나 '작맥'으로 부르는 것보다 '귀리'란 이름이 우리 귀에는 훨씬 다정하다. <신수본초>라는 책에 '귀리는 곳곳에서 생산된다. 폐허나 들, 수풀 속에서도 자란다. 잎은 밀과 비슷하나 연약하다.'고 했듯, '귀리'는 가난한 집안에서도 건강하게 자라 효도하는 자식처럼 냉습한 기후나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의 산지에서 주로 가꾸게 되었다고 한다. 보리도 아니고 밀도 아닌 것이, 쌀과 맛이 비슷해서 감자와 섞어서 밥을 짓거나 떡을 쪄서 먹기도 했다. 이 산비탈 박토에서도 투정 않고 잘 자라고 때맞춰 열매맺어, 저 가난하던 절대빈곤의 시절. 수많은 생명들을 기아로부터 구한 것이다.
귀리밭에 정신이 팔려 대간 마루턱을 놓치고 감자 밭둑을 멀리 돌아 다시 능선으로 올라섰다. 불개미재에서 통팔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압록강 지류인 황수원강 줄기와 거의 나란히 북동진한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꿈틀거리는 강줄기. 금패령을 가로질러 배재산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더 잘 보인다. 금패령 고도는 설악산 중청봉의 높이와 같은 1,676m다. 그러나 평균고도 1,400m 가까운 고원지대의 능선을 걷고 있어서 그런지, 중청봉 일대에서 느끼던 바람과 고도감은 사라지고, 어느 평야의 고갯마루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금패령은 자동차가 없던 시절 함흥이나 풍산 쪽에서 걸어 오르면 험준하기 짝이 없는 고개였다. 금패령은 한자로 '禁牌嶺'이라 쓰는데, 그 이유가 전설로 전해내려 온다. '옛날 어느 암행어사가 북쪽 국경지대를 순시하고 남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폐포파립으로 혼자 이 고개를 넘다가 기진맥진하여 고갯마루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마침 산나물을 캐러왔던 아랫마을 아낙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젖을 짜 먹여 소생시켰다 한다. 그 아낙 덕분에 목숨을 건진 어사는 그 고을 사또에게 자초지종을 알려 산 어귀에 있는 직소(直沼)와 송어를 잡는 채어책(採魚柵)과 면(綿)을 내려 은혜를 갚고, 자신이 쓰러졌던 고개는 함부로 다니기 힘든 고개이므로 통행금지 팻말을 세웠기 때문에, '금패령'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가고픈 산하 북한의 땅이름, 참고).' 그러나 이 지역이 고구려, 한, 여진, 발해, 고려, 원, 조선 등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던 곳임을 생각하면, 이 고개는 통행증 즉 패찰이 없으면 넘어 다닐 수 없던 고개, 즉 일종의 감시초소가 있던 '금패령'이 아니었겠나 싶다.
금패령을 지나 배재산으로 향하는 능선에서 나는 비로소 산을 느낀다. 이 산은 험상궂은 바위들을 내밀어 사람들의 개간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것 같다. 배재산 정상은 남쪽으로 불쑥 튀어나가 앉았고 경사가 심해서 점심 먹은 기운이 다 빠져 버렸지만, 정상에는 바람에 땀을 말리며 천산대산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을 바라보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산대산은 배재산보다 높지만 산세가 두툼한 육산이어서 곳곳이 개간되어 밭으로 변해 버렸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동굴들이 있다지만 능선을 고집해야하는 우리들의 길에는 해당되지 않는 구경거리. 배재산에서 천산대산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신흥(구 함흥)과 덕성(구 북청)의 경계가 된다.
1,889.8m봉 쌍봉을 지나 1.5km쯤 내려온 안부에 주저앉은 시간 오후 7시. 해가 지려면 1시간 반은 더 남았지만, 앞으로 닷새는 더 걸어야 하므로 체력을 비축하기로 한다. 오늘 우리가 만난 수많은 밭 가운데 산비탈 아닌 곳이 있었던가. 별 아래 침낭을 두르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이 높은 고원까지 밀려와 산림을 태우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 긴 겨울과 짧은 여름을 인내하며 목숨끈을 붙잡고 살아가던 사람들. 그 시절이 그들은 과연 누구였었나. 가진 자들의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해, 혹은 과도한 부역과 세금을 피해서, 일제 때는 식민치하의 압제와 탈취를 견디다 못해, 산 속을 떠돌며 연명하던 불쌍한 유랑민들. 그들로 인한 산림 피해는 자심했다 하고, 해방전인 1936년에는 화전민의 숫자가 무려 1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전이 가장 성행한 때는 1910년대 말로서 한해와 수해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산간으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었고, 2차대전 발발 후에도 화전이 성행했다(한국지지, 참고). 그 가운데 80%가 함경남도·평안북도·강원도의 산악지대에 분포했다고 하니,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이 불쌍한 선민들을 유랑민으로 만들고 우리의 산을 더욱 헐벗게 하였던 것이다.
이씨조선의 국시는 '농자천하지대본'이었다지만, 소작농들은 허리 펼 날이 없었고, 36년을 이 땅을 지배한 일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었지만 이 땅의 유기그릇과 송진까지 탈취해 가던 치사한 도둑들이 아니었던가. 수많은 양민들을 연해주나 북간도까지 떠밀어 집시농으로 전락시키지 않았던가. 스스로 끊을 수 없는 목숨 하나를 붙들고 이 한랭한 고원지대까지 떠밀려왔을 화전민들. 소도 말도 마차도 없이 고원을 떠돌았을 집시 농민들. 그들은 과연 오늘의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나. 그 시절 화전민들의 유적지와 다름없는 수많은 비탈밭들을 거쳐와서 잠이 쿨쿨 온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기자(箕子)가 이 땅에 조선(箕子朝鮮)이란 나라를 세울 때, 평양성 남문 밖에 정전(井田)을 만들었는데, 그 밭 가운데는 기자정(箕子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한다. 밭 가운데 우물을 둘 정도로 계획적이고 과학적인 영농법을 알고 있었던 선조들이었지만, 그 후손들은 이 고원의 삼림을 태우며 농사를 지어야했다. 인구의 팽창도 원인이었겠지만, 외세의 침탈이 가장 큰 몫을 했다.
삼림을 태워 농사를 짓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영농법이다. 몇 년 전인가, 인도네시아에서 화전민들이 지른 산불 때문에 동남아 상공이 검은 연무에 뒤덮인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6년도부터 화전을 금하고 화전민들을 이주시키고, 화전지대 중 20%는 새로 조림을 했지만, 대부분의 화전은 숙전(熟田)으로 변해, 금대봉-매봉산 주위나, 대관령 일대에서 보는 것처럼 고랭지채소들을 재배한다. 이곳 고원지대의 밭들도 원래는 화전이었으나 숙전으로 변한 경우이다.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운곡잡기(雲谷雜記)에 말하기를 "원수(沅水·중국 호남성을 흘러 동정호로 들어가는 강)와 상수(湘水·공서성에서 발원하여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강) 사이에는 산이 많아 농가에서 조[栗]를 심는 일이 많다. 산언덕에서 임목을 베어 뉘고 불을 놓아 태운 뒤에 그것이 재가 되면 즉시 조의 종자를 뿌린다. 이렇게 하면 수확이 반드시 배(倍)가 된다. 이것을 도경화종(刀耕火種·칼로 나무를 베고 불을 놓아 태운 뒤에 파종한다는 뜻)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산군(山郡)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는데 이것을 화전(火田)이라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화전의 역사도 중국의 그것처럼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먹이를 향해 기어가는 불개미들의 행렬을 오래 지켜본 적이 있다. 67번 지방도로를 따라 불개미재로 올라오던 우리들의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불개미재 마루턱을 등지고 금패령을 향해 밭과 밭 사이를 걸어오던 우리들의 모습 또한 그랬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귀리수염을 쓰다듬으며 통팔령으로 내려서는 내 모습이 또한 그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먹이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정신의 지주인 백두산을 찾아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2,000m를 넘는 희사봉에서도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새가 울고 있었다. 식물이 살고 동물이 살 수 있는 높이라면 아무리 높은 곳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딘들 어떠랴, 비록 겨울이 길고 여름 짧은 땅. 이 짧은 여름 햇빛 속에서도 꽃피우고 열매맺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나무껍질 지붕 아래 판자벽을 쌓고도 새끼들 배 곯리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솥단지와 이부자리, 괭이와 도끼 한 자루만 있다면 어느 산 속인들 두려우랴. 그렇게 살아왔을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때맞춰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백두산을 향해 걷고 있는 우리들의 몸짓은 사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배가 부른 뒤에야 정신을 돌보게 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임을 생각한다. 우리는 참 좋은 시절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긍정과 함께!
[제22구간], 고원(高原)의 집시, 화전민(火田民)들을 생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