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장마! 걱정하며 떠들었지만, 밤사이 비가 조금 내린 것뿐. 하늘은 도로 청명해졌다. 통팔령에서 삼봉으로 오르는 산비탈. 등산화가 스쳐서 잠을 깬 풀잎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이슬들을 턴다. 저 물방울 몇 움큼으로는 저 큰 나무들 타는 목을 적시기엔 역부족일터. 올 여름 장마는 남쪽에만 비를 뿌리다 끝날 모양이다. 갑자기 불어난 황토물에 사람이 떠내려가고 집과 농작물이 침수되었다고 야단들인데, 중부 이북은 오히려 물 걱정을 할 정도로 저수지 수위가 낮아졌다. 중국 대륙에서 발달한 고기압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비구름을 가로막고 있어서, 이곳 북쪽 산야의 초목들도 산비탈 밭에서 싹을 틔운 농작물들도 우리처럼 목이 타는 모습이다. 지난 겨울엔 눈조차 거의 내리지 않았다. 여름철 단골인 장마비마저 남쪽에만 몰려 아우성을 치니, 백두대간을 타는 우리도 물 걱정이 가장 큰 걱정이다.
평지보다 시원한 고원지대를 지나가고 있지만, 한낮의 기온은 섭씨 20도를 웃돈다. 나무가 없는 능선이나 농경지 사이를 지날 때는 햇볕이 제법 따갑다. 그래서 우리는 숨이 턱에 닿을 만큼 빠른 행보를 삼가고, 쉬지 않고 천천히 걷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오르막길에서는 소나무잎을 뜯어서 질근질근 씹으며 간다. 소나무잎을 씹으면 갈증이 가시고 머릿속이 상큼해지기 때문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 야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비가 시원히 내리지를 않기 때문에 계곡의 물이 줄어, 물을 찾아 오르내리는 길도 그만큼 멀어진다. 누군가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물 한 동이씩을 져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대동강물을 막아놓고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대동강물을 떠다주고 수고비를 받은 것 아닌가. 1920년대 서울의 명물처럼 되었던 북청물장수도 마찬가지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 북청 물장수. // 물에 젖은 꿈이 /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 북청 물장수.//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란 시로, 1924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게재되었던 것이다. 북청 사람들은 향학열이 높고 부지런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3.1운동 때도 수많은 사람이 만세를 불렀다지 않은가. 서울로 이주한 북청 사람들은 물지게를 지며 자식들 공부를 시켰고, 고향사람들끼리 도계를 만들어 서로 도우며 지냈다한다.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능선은 분단 전까지만 해도 함경남도 풍산군과 북청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였다. 한신대 총장을 지낸 조향록씨의 회고담을 보면, 분단전의 북청군 산골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북청군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백두산이 동남으로 뻗어 나오다가 동해 푸른 바다를 저 멀리 내다보면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솟은 북수백산, 그 동남 기슭에 자리 잡고 앉은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아직도 화전민 때를 벗지 못한 농사꾼 십여 호가 농토를 갈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난한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은 본래 북청 지방이나 또 저 멀리 평안도 등지에서 비옥한 땅을 가지고 농사짓던 사람들인데, 집안 어른들 중에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을 따라나선 식구들이거나 일가친척들이었다. 그때는 아직도 이 지역이 산간벽지여서 평평한 산지는 개간하면 누구의 땅도 없이 감자농사라도 지어먹고 살 수 있었을 때다. 해발 1,200m 높이의 산지에서 농사라 해도 그저 귀밀 감자밖에 심지 못했다. 말하자면 일본놈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백두산 둘레 깊은 산속에 숨어 그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이른 봄이면 산이란 산은 온통 진달래꽃 분홍빛으로 물들고, 여름이면 머루 들쭉 산딸기 등 야생과일이 무진장 열려서 우리는 마음껏 따먹고 자랐다. 한 여름에도 모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시원한 곳이었다.…(한국문원 간, '분단50년 북한을 가다'에서 발췌)'
조향록씨의 회고담 중 북수백산은 백두대간 북쪽 풍산군과 부전군 경계에 있는 산이니 북청군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백두대간 마루금까지 긋기 어려울 정도로 평평한 고원지대, 능선을 걸으면서 보면 북수백산까지 북청의 산으로 오인할 만큼 가깝고 우뚝하게 보인다.
북청은 원래 청주라 불렀으나, 충청도에 있는 청주와 이름이 같다하여 북청주라 불렀고, 북청주가 북청으로 변한 것이다. 고려사(권 제12, 지리3)에 있는 '북청주부(北靑州府)·오래 여진의 점거한 바로 구성(九城) 때에 명호는 상세하지 않으나, 뒤에 원(元)에 함몰하여 삼산(三散)이라 칭하였고, 공민왕 5년에 구강(舊疆)을 수복하여 안북천호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고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만호부(萬戶府)를 삼았다.'는 내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머루 들쭉 산딸기를 무진장으로 따먹을 수 있던 시절, 아이였던 분들이 파파 할아버지가 되도록 고향 길은 막혀있다. 나는 5만분의 1로 축소된 지도 위를 걸으며, 그분들의 애환을 가늠하며 함께 안타까워 할 수 있을 뿐.
삼봉 정상은 두리두리해서 1,986.6m라는 고도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압록강 지류를 거슬러 올라온 바람에 머리카락 드날리며 멀리 동해를 내다보는 맛은, 계곡물에 머리감고 산딸기를 따먹는 맛에 견줄만하다.
삼봉에서 쌍봉까지는 한달음에 건널 만큼 가까워 보였지만, 걸어보니 그게 아니다. 언덕 같은 봉우리 셋이 요리조리 정상을 돌려놓으며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것 같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 북쪽 지능선으로 빠질 것을 염려해서 가로질러 왔는데, 정상에 올라보니 그 봉우리 하나를 건너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용수동령에서는 오래 쉬며 수통들을 채웠다. 좀 힘들어도 보밭골까지 가서 텐트를 치기로 했다. 물통 주변에 이슬이 맺혀서 이도윤씨 배낭에서는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아까운 물을 다 흘린다고 배낭 아랫도리를 툭툭 치다보니 등과 엉덩이까지 척척하게 젖었다. 아, 저렇게 하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구나. 등에서 찬물이 뚝뚝 흐르는 맛에 저렇게 쉬지 않고 달리는구나. 심일랑씨와 김찬황씨가 "그 물통 여기서부터는 내가 지고 가마"고 잡아당겨도 "기왕에 졌으니 끝까지 지고 가야지예" 능청을 부릴 수 있는 거구나.
보밭골과 우리 사이에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남았을 때까지 평지 같은 능선을 헤치고 왔다. 쉬지 않고 걸었다. 서쪽 하늘에선 노을이 타고, 언덕 너머에서 개짓는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녹초가 되어 털썩 주저앉았다. 저녁은 물통 지고 온 사람이 앉히고, 나는 새털구름 사이에서 별이 돋을 때까지 풀밭에 누워 있었다.
개짓는 소리에 일어나니 새벽이다. 아직 별이 지기 전인데, 바다쪽에서는 붉은 기운이 번지고 있다. 커피와 비스킷으로 점고를 마치고, 아침밥은 남산봉을 넘어가서 먹기로 한다. 남산봉은 '남산+봉'이다. 그냥 남산이라고 쓴 지도도 있었지만, 본고의 기본지도 표기를 따랐다. 보밭골 고개를 지나가는데 허연 물체가 하나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엔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많이 보던 녀석이다. 아니다. 저 녀석은 사진에서 보던 풍산개다. 쯔쯔 소리내며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등에 짐을 잔뜩 진 우리 모습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모양이다. 함부로 짓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는 모습이 믿음직하기 짝이 없다.
남쪽에 진돗개가 있듯이 북쪽에는 풍산개가 있다. '풍산개는 흰털이 빽빽해서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다. 눈 코 발톱이 검은 것이 특징이다. 북만주의 고드리개와 닮은 점이 많다. 이 개는 오랫동안 다른 지방과 접촉 없이 풍산 주민들에 의해 사육되어왔는데, 그 성품이 용맹하고 인내력이 강하여 맹수사냥에 가장 알맞다. 이러한 성품은 이곳에 사냥하러온 사냥꾼 외에는 몰랐으나 일제 강점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일반에게 알려졌다. 러시아의 사냥꾼들도 호랑이 곰 산돼지 등의 사냥에 풍산개를 이용해보고 그 용감성을 극구 찬양하였다.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집안에서 자지 않고 밖에서 집을 지킨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 했으니, 저 녀석도 용감한 골키퍼처럼 우리가 지나갈 길목을 막고 우리 형색을 살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도윤씨가 누군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쯔쯔 소리를 내며 다가가서는 어느 틈에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후치령까지는 다 걸을 수 없는 길이다. 마지막 밤은 사람 사는 집에서 보내기로 하고 동자동골로 내려왔다. 달랑 두 가구가 마주보고 있는 농가에서, 땀도 씻고 감자도 쪄먹으며 사람 그리운 마음을 풀었다.
안덕비령 부근에도 도처에 감자밭 옥수수밭이다. 날렵한 사람들은 호프를 심기도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아직도 감자를 더 많이 심는 것 같다. 감자와 옥수수가 없으면 어떻게 이 산골 살림을 꾸려왔을까. 가난하면서도 인정만은 풋풋하여 우리 배낭에는 저녁까지 먹을 찐 감자가 따끈따끈하게 들어있다.
대간 능선의 북쪽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황수원강 지류들, 동자동골-보밭골-보박골-인필동골-대매양동골-중양동골-병분골. 대간 능선의 남쪽 비탈은 북청의 중심부를 적시며 동해로 흘러드는 남대천 지류들, 거서천-통팔령천-저산밭골-용상골-구룡산골. 등성이 하나 넘어설 때마다 능선이 구부러지고 꼭꼭 숨어있는 골짜기의 이름이 바뀌는 길. 그러나 우리는 닷새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처럼, 뙤약볕이 쏟아지기 전에 후치령 포장도로를 밟는다.
[제23구간], 풍산개와 북청 물장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