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무 한 그루씩이라면
제24구간 후치령∼추동산∼엄방골령∼두운봉∼희사봉∼조가령
이 향 지
풍산과 북청의 경계. 후치령은 역사가 깊은 고개다. 함경남도 동해안 함흥이나 북청에서, 압록강변 삼수·갑산이나, 혜산 등지를 왕래하려면 후치령을 통하는 것보다 가깝고 쉬운 길은 없다. 식민지시절 백두산을 오가는 사람들도 후치령을 넘었다. 함흥 이남에서 백두산으로 가려면, 북청에서 후치령을 넘어 풍산-갑산-삼수-혜산을 거쳐 허항령을 넘어가는 압록강변 길이, 북청-이원-마천령을 넘어 회령-무산-대홍단으로 우회하는 두만강변 길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횡단로이자 백두산의 목덜미라 할 허항령과 후치령 사이에는, 조가령-화동령-최가령-북설령 등 동서로 횡단하는 고갯길이 몇 개 더 있지만, 후치령 이북의 백두대간 산세는 더욱 우람하고 뿌리가 넓게 퍼져 있어서, 더 이상의 편한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동차나 기차 같은 탈것들의 길은, 이 거대한 산맥의 날카로운 어깨와 두둑한 발등을 피해서 멀찍이 우회하여 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백두대간을 타고 오지 않았더라면 '서울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에 내려, 함경선으로 바꿔 타고 함흥에 내려, 자동차로 바꿔 타고 북청을 거쳐 후치령을 넘어 백두산으로'가는 길을 따랐을 것이다. 한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인 지리산에서 동북쪽 끝자락인 백두산까지 탈것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갈 경우, 백두대간보다 거리가 짧고 빠른 코스는 없다. 그러나, 삼림이 우거지고 맹수가 우글거리던 시절의 원시적인 장비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길이, 또한 백두대간이다.
후치령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덕분이 아닐까. "북청에서 100리를 달려와서 뾰족하니 수면장(秀面壯)한 남산(南山)이란 일봉(一峰)을 접어들면 직동(直洞·곧은 골)이란 꽤 큰 시가가 나서고, 예서부터 유명한 후치령로(厚峙嶺路)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버쩍 달구어진 기관(汽罐)을 식혀가지고 상직동(上直洞)을 향하여 곡곡절절(曲谷折折)한 대판로(大坂路)를 색여 올라가는데, 원체 준급(峻急)한 구배(勾配)를 휘임휘임 드러낸 길이라 뺑뺑 돌아서 상직동을 도로 와보게 됨이 몇 번이지, …중턱쯤 되는 '明堂덕이'를 지나서, 다시 얼마 만에야 간신히 마루턱에를 오르니 '四千四百五十尺'이라한 표목(標木)이 서있고, 채화(彩畵)한 선상(仙像)을 봉안하고 국사당(國師堂)이라고 일컸는 일사우(一祠宇)가 영상(嶺上)에 진좌하였는데, 지나다니는 차부(車夫)의 숭앙이 대단하다.…" 최남선이 자동차를 타고 이 고개를 넘어간 것은 1926년 7월 26일. 그날로부터 73년 열흘을 더해야하는 오늘의 후치령에는, 민초들의 숭앙을 받던 국사당도 차부들도 보이지 않는다.
지루한 마른 장마 끝에 큰비를 몰고 왔던 태풍은 이곳 고원지대까지도 할퀴고 간 모양.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있고 산기슭 여기저기엔 붉은 살이 드러났다. 여름 아침 햇살은 살아남은 나뭇잎 위에서 더욱 반짝인다. 일찍 잠깬 새들은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날고, 그악스런 매미소리는 오늘 낮도 땀께나 흘리게 더울 것이라는 걸 예고한다.
후치령 북쪽은 풍산 땅이다. "후치령은 올음 뿐이오 나려감은 거의 없다 할 만치 마루턱에 올라서서는 민민히 약간 내려가는 듯하다가 그만 둔다. 령(嶺) 이쪽은 풍산인데 풍산의 지계(地界)는 사방으로서 다 이렇게 올라오게 되는 약 4千尺의 고지(高地)로 이르기를 '하늘에서 내려오면 첫 동네'라는 곳이니 남방(南方)으로 말하면 지리산의 운봉(雲峰)에 비할 곳이다.(백두산근참기)"
후치령 마루턱을 등지고 10분쯤 오르니 첫 번째 봉우리. 두 번째 봉우리까지는 높직한 둑방 위를 걷는 것 같다. 20-30m 높이의 언덕 아래는 식민지 시절 '厚峙大路'라 부르던 자동차 길이 대간과 거의 나란히 지나간다. 첫 번째 봉우리와 두 번째 봉우리 안부에 오니 상직동에서 올라온 후치령 옛길이 있다. 자동차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도 마소도 쏟아질 듯 가파른 저 옛길 소로를 따라 오르내렸다.
이번 구간은 시작 부분이 특히 굴곡이 심하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봉우리 하나 하나씩을 짚어가며 넘어야 한다. 지도 위에서 보면 삐뚤빼뚤 벌여선 모습이 냇물 속의 징검돌 같은데, 일년 중 가장 덥다는 8월 중순에 먹을 것 입을 것 잔뜩 담은 배낭까지 짊어지고, 한 봉우리 한 봉우리 짚으며 넘어가야 하는 현실은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이 일대는 서울 도심의 기온이 30℃를 웃돌고 연일 열대야가 계속되는 상황일 때도, 1년 중 가장 덥다는 8월 평균 기온이 20℃ 정도밖에 안 되는 고원지대. 후치령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낙하산을 타고 도착한 기분이라고, 지상 최고의 피서지로 초대되었다고 희희낙낙 했지만, 햇살이 슬슬 공기를 달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땀방울이 솟는다.
다섯 번째 봉우리에 서니 오전 7시 5분. 등고선이 가리키는 고도는 1,570m. 기압 조정을 하지 않은 탓인지 고도계 눈금은 20m를 상회하고 있다. 1,570에 고도계 눈금을 맞추고, 지도와 가야할 방향을 맞춰보고, 물 한 모금 마신다. 까마득한 골짜기 아래는 북청 땅이다. 가파른 봉우리 사이로 남대천 줄기가 은비늘을 뒤척인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도 어느 높직한 산등성이에서 북청의 아름다움을 굽어보았던가. '이 지역이 옛날에 적의 땅에 빠졌던 것을 선왕께서 다시 개척하셨네. 민호(民戶)가 많다보니 갖은 풍속들이 섞여있고 지세가 장하여 큰 인재가 나온다. 길은 푸른 바다를 향하여 꾸불어졌고 산은 말갈 땅으로 좇아 뻗어 나왔다. 짧은 옷 입고 사나운 범을 쏘는 것 보며 해[歲]가 저물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동국여지승람)'했다.
1,570m봉은 '소밭골' 등성이. 서북쪽 고원에서 바라보면 봉우리라기보다는 드넓은 초원 속의 작은 언덕 같은 곳. 여섯 번째 봉우리로 건너가는 안부에서는 소로가 두 가닥으로 나뉜다. 왼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후치령 마루턱과 연결된다. 1,620m. 여섯 번째 봉우리에 서니 호수가 하나 보인다. 황수원강 상류를 막아 만든 내중리저수지다. 내 눈 아래 움푹 파인 협곡을 끌고 저수지로 향하는 냇물은 사득천인데, 예전엔 파산천( 山川)이라 불렀다. 사득천 물줄기와 비스듬하게 흐르는 도로의 한 귀퉁이가 보인다. 밋밋한 비탈을 좀더 올라와서 후치령을 넘게될 저 길은, 1930년 8월 백두산에 올랐던 민산 안재홍이 '백두산등척기'에서 "…'배상개덕'을 지나 파발리에 내리니 고래(古來)의 역촌(驛村)으로 시가(市街) 제법 번창하며, 다시 비탈을 올라 어느덧 령(嶺)의 절정에 닿으니 즉 후치(厚峙)라, 1366미(米) 높이로 졸본고원(卒本高原)에서 북청 평야에 내리는 최종(最終)의 고령(高嶺)이니 북에서 오기는 높은 상 싶지 않고 서남으로 2천미(米) 가까운 들어 엉킨 층봉루장(層峰壘 )은 오히려 준령을 위압하는 감이 있다."고 그려 보인바 있다. 모든 땅이 골고루 높은 고원의 언덕에서 보면 물길도 사람의 길도 급한 마음을 버리고 완만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안재홍은 이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상기시키려고 '개마'라는 지명 대신 '졸본'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이 구간 내내 우리를 따를 대간 서쪽과 북쪽의 물길은 압록강의 지류인 허천강의 지류들이다. 황수원저수지 내중리저수지 사초평저수지 등을 안고 있는 황수원강은 풍서군 가림리 부근에서 웅이강과 합류하여 허천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허천강은 혜산시 강구동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대동수경(大東水經)에 '그(압록강) 한줄기가 북청부 북서쪽에 있는 후치령(厚治嶺)에서 나와서 곧게 북으로 백여리를 흐르다가 왼쪽으로 향령(香嶺) 이북의 여러 골짜기 물들과 합한 다음에 북으로 갑산부 서쪽을 지나 허천(虛川)이 되며 또 서쪽으로 구부러졌다가 북으로 꺾어져 혜산보에 이르러서 서남에서 백산의 물과 합한다.'했는데, 산줄기 강줄기는 이 땅의 이목구비가 완성되던 그때 그대로인데, 시절과 인심 따라 강 이름 산 이름만 바뀌고, '川'이 '江'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치령의 한자 표기 또한 '峙'도 '治'도 아니고,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고문헌들에 적힌 '致'여야 맞지만, 대충 맞으면 넘어가는 것이 우리네 인심 아니던가.
볼 것 많고 사연 많은 구간이라 내 걸음이 너무 느렸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에 좀 더 걸어두자던 계획이 아이스케키처럼 녹아 버렸다. 일행들은 어느덧 추동산 정상에서 야호를 외치는데 내 몸은 1,559m 봉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옛 풍산땅 지목척골과 북청땅 동작동을 연결하는 소로는 안부가 아니라 산등성이에 있는데, 길만 만나면 뿌리부터 캐어보려는 나의 노력 때문에 더욱 걸음이 늦다. 백두대간을 횡단하는 수많은 고갯길을 횡단하며, 만난 큰길, 작은 길. 가는 길은 잔대나 도라지쯤 되고, 굵은 길은 더덕이나 산삼쯤 될까.
1,559m봉에서 추동산까지는 제법 나무가 우거졌다.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고 나무그늘을 걸으며 듣는 매미소리도 가을 바람처럼 청량하다. 추동산 정상에서는 점심을 먹었다. 바로 눈 아래 물빛 푸른 호수는 내중리저수지. 풍덩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치고 싶지만, 그림 속의 물. 추동산 남쪽 비탈은 경동지괴의 영향으로 역시 가파르다. 그 가파른 비탈에서 자라는 농작물들이 안타깝다. 나무가 있어야 할 곳에서 감자와 귀리가 자라니, 조금만 큰비가 내려도 산의 가슴이 파이고 사람들의 삶터가 뒤집히는 게 아닐까. 내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무 한 그루씩이라면, 며칠을 헤매어서라도 저 앙상한 비탈을 푸른 숲으로 덮으련만, 거대한 자연에 비해 작고 작은 나의 국토 사랑은 여름 한 철 매미소리처럼 내 발등만 적신다. 만가지 곡식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익히는 태양도 사물의 이면은 그림자로 남겨두는 법. 스스로 위로하며 걸어갈 수밖에.
가자! 가자! 재촉하는 일행들을 따라 가래골령을 가로질러간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종주하기 위하여 횡단해야하는 소로들은 부지기수. 그 작은 길 하나 하나마다에 역사가 스미고 저마다의 사연이 얽혀 있음을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엄방골령에 도착하니 물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려고 한다. 첫날부터 욕심 부려 너무 많이 걸었나.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고, 물 있는 곳을 찾아간다. 땀에 젖은 옷들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는다. 서로 자기 짐 속의 반찬을 먼저 먹어치우자고 성화들이지만, 변질되기 쉬운 것부터 소비하는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짐은 공평하게 분배해서 지고 가기로 했다. 밤이 언제 깊었는지, 총총한 별빛 믿고 노숙을 한다. 남은 음식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배낭을 한군데로 모아놓고, 풀벌레 소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낮에는 땀흘리고 밤에는 솜이불을 덮고 잔다는 고원지대의 밤. 새벽 추위가 깨울 때까지 깊은 잠을 잤다.
8월 7일 해뜨기 전에 엄방골령을 등졌다. 독동령-두운봉-장동령까지는 모퉁이 하나 돌아설 때마다 긴장이 되는 길이다. 서로 보조를 맞추며 오손도손 진행한 덕분에 장동령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대간 동쪽에 민가가 몇 채 모여 있고, 능선 가까이에 우물이 있어서 아침 해먹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밤에는 추워서 떨고 해가 나면 더워서 땀을 줄줄 흘린다. 일교차는 심하지만, 고도차가 심하지 않아서 길이 꺾어지는 지점에서만 조심을 하면, 한 여름 산행이지만 가을이나 봄 산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1,505m봉 서쪽 산록은 드넓은 초원. 양떼들의 방목장이다. 자유롭게 흩어져서 풀을 뜯는 양떼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양은 털이 깊은 동물이지만 선선한 고원의 날씨 덕분에 더위를 모르고 잘 자라는 것 같다. 1,505m봉에서 희사봉 오르는 길이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든다. 고도 250m를 높이는데 1시간 반이 소모되었다. 날씨도 어제보다 덥고 물도 먼 곳에 있으니, 오늘은 욕심부리지 말고 촌덕까지만 가기로 한다.
촌덕은 희사봉 북쪽, 황강골 상류에 있는 외딴 마을이다. 민박을 알아보러 내려갔던 이도윤씨와 김봉관씨가 물통만 가득 채워가지고 올라왔다. 1km이상을 내려가야 마을이 있는데, 내일 아침에 올라오느라 고생하느니 아예 야영을 하자는 것이다. 마을이 아예 멀었더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텐데, 가까운 곳에 민가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에 의뢰심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촌덕 등성이에 둘러앉아 소줏잔을 꺾는 재미. 나는 넓적한 바위 위에 침낭을 두르고 누웠다. 낮 동안 태양이 달궈놓은 온기. 온돌바닥에라도 누운 것 같다.
셋째 날 아침은 좀 더 일찍 일어났다. 촌덕 등성이에서 조가령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뚝방 같이 높직하지만, 천천히 고도를 낮추는 길이고 빤히 보이는 길이지만 지능선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해 뜰 무렵엔 변전소 옆을 지났고, 조가령에 내려서니 오전 8시. 서쪽 계곡으로 내려가서 물을 찾았다.
[제24구간],내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무 한 그루씩이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