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오산 정상에 앉아 있으면 온갖 소리가 다 들린다. 100년 전의 바람소리, 천년 전의 물소리, 오늘 아침의 새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산우들의 목소리. 말없는 것들은 들쭉나무들. 사람이 심었는지 자연이 심었는지 세세히 알 수 없지만, 작고 작은 가지마다 까맣게 익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뽀얀 분이 피도록 잘 익힌 들쭉열매, 쉽게 잃어버릴까 봐 그랬을까, 무수한 잔가지로 울타리를 둘렀다. 말없는 것들은 보호본능이 강하다. 바람 속에서 뼈가 굳은 잔가지들은 억세다. 그만큼 생명력도 강하다. 이 산이 펄펄 끓는 불덩어리였을 때, 이 나무들은 없었다. 이 땅이 차가운 눈과 얼음에 덮일 때 이 나무들도 같이 덮일 것이다. 눈과 얼음 속에서 긴 겨울을 나고 짧은 여름 동안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힐 수 있는 백두산 나무들의 힘. 그 사실을 경이롭게 지켜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선오산 일대의 들쭉밭이다.
선오산(鮮奧山·1,985.9m)은 이름 그대로 조선[鮮]의 오지[奧]에 치우쳐 있는 산. 이름은 산이지만,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 줄기에 바짝 붙어있는 덕(德)땅이다. 압록강변에서 올려다보면 아슬한 암벽이 보일 뿐이겠지만, 선오산 정상 부위는 넓고 평평하다. 여기서 가까운 보천 일대는 예전부터 기후와 토양이 앵속이나 마를 재배하기 좋은 곳이어서, 특용작물 원예단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서는 그런 것은 볼 수 없고, 들쭉나무가 대단위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들쭉 열매들은 사람 손으로 한 알씩 따서 들쭉술과 들쭉쥬스(단물)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열매를 따러오지 않았다. 우리는 빈 산에서 큰 들쭉밭을 보고, 이따금 그 열매를 몇 알씩 따서 목을 축이며 간다.
1,953m봉은 지도 위에서나 구별이 될 뿐, 현장에서는 가늠하기가 어려운 봉우리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평지다. 대연지봉으로 오르는 비탈이 하얀 능선을 열어놓고 손짓하는 것이 보일 때 북쪽으로 방향을 수정하면 된다. 몇m를 벗어났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이 지점을 지나가는 지 우리는 모른다. 안중국기자가 Gps로 맞춰보고, 우리가 방금 지나온 곳이 그곳인줄을 알았다. 1,953m봉 언저리를 통과해서 20분쯤 걸었을까, 길은 어느새 오름 길로 변하고, 발 밑의 흙들은 부석(泡石)으로 변했다.
부석은 거품돌이라고도 불리는 화산재다. 손안에 넣고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부서진다. 그러나 비에 다져지고 바람에 시달리면서 자리를 잡은 부석땅은 꽤 딱딱하다. 다 같은 부석지대라도 양지쪽에는 잎사귀와 가지가 억센 식물들이 표면을 빽빽하게 덮고 있다. 멀리서 보면 초원 같은데, 막상 걸어보니 바닥이 딱딱해서 보통 산을 걸을 때보다 훨씬 힘이 든다. 그런 부석들 틈에서 두메양귀비, 비로용담 같은 것들이 꽃을 피웠다. 이 높은 곳에서도 벌은 날고, 바람은 찾아와서 꽃을 흔든다. 아래쪽에서 올려다 볼 때는 저 황량한 곳에 과연 생물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백두산 자생식물들의 생명력이란 눈이 부실 정도다.
비탈은 갈수록 경사가 높아진다. 1시간쯤 걸으니, 우리가 걷는 능선 오른쪽에 깊은 협곡하나가 다가왔다. 내려다보니 아찔한데, 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계절 강이지만, 저 계곡은 비가 내릴 때마다 대연지봉(大 指峰·2,359.5m) 남동릉 물을 두만강 원류로 실어 나르는 수로다. 2,271m이 가까워지자 비탈은 더욱 급해지고, 내 속도는 더욱 떨어진다. 걸음이 빠른 사람들은 이미 대연지봉에 올랐다. 나는 선두보다 30분 정도 늦게 올랐지만, 허항령에서부터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걸어 오르는 덕분에 고소증은 못 느끼고 있다.
대연지봉에 올라서니 오전 11시. 신무성 쪽으로 돌아온 일행들을 만나려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약속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2.5km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이젠 들쭉을 만나도 따지 않을 거다. 두메양귀비를 보아도 주저앉아서 눈맞추지 않을 거다. 누가 그랬던가. 저것도 아편이니 설사 나고 배 아플 때 뜯어먹으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배만 더 아팠다. 설사만 더 났다. 나는 아무래도 백두산 풀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비하면 콩나물처럼 비리비리한 체질이다. 그러나 나는 콩나물처럼 비리비리한 체질을 끌고 쉬지 않고 걸어서 백두산까지 왔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연지봉에서 2,261m봉 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바로 장백산맥이다. 대연지봉 동북쪽에 토라진 듯 봉긋한 봉우리가 2,261m봉인데, 저 봉우리의 동남릉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두만강의 원류이다. 지금은 장군봉으로 가는 도중이므로, 물길을 찾아 내려가 볼 수는 없지만, 지도를 보면 두만강의 원류인 신무수가 저 봉우리에서 시작한다. 백두산 등산로는 저 봉우리 동북쪽으로 이어진다. 신무성 쪽으로 돌아오는 우리 일행들이 그 길로 왔을 것이다. 혹시 그들이 보일까하고 고개를 뽑아보지만, 산등성이가 가리고 있어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연지'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하나 더 있다. 선오산 동북쪽에 있는 것이 소연지봉(소연지봉·2,123m)이다. 다른 봉우리들은 이름도 바뀌고 글자도 바뀌고 했지만, 백두산 정상 부근의 봉우리들은 그대로다. '북으로 약화(略畵)같이 윤곽이 단순한 대각봉을 바라고, 남으로 백사(白沙)를 글어모아 소북하게 맨든 듯한 소연지봉(小 指峰)을 건너다보면서, 길이 백정단묘(白淨端妙)한 원추형일고봉(圓錐形一高峰) 밑으로 났으니, 이 산이 유명한 연지봉( 指峰)이요…(최남선, '백두산근참기')' 나는 지금 그 유명한 연지봉, 그 둥그스럼한 봉우리의 정상부에서 내려와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대연지봉에서 2,385m봉까지는 고생하지 않고 건너왔다. 중간에 솟은 암릉이 눈길을 끌었지만, 잠깐 바라보면서 지나왔다. 2,385m봉에 올라서자 나머지는 내리막길이다. 한 달음에 내려와 보니, 길이 있다. 아하, 이것이 길이구나. 허항령을 떠난 지 사흘만에 진짜 길을 한 번 밟아 본다. 웅기중기 둘러서거나 모여 앉아서 웃고있는 일행들. 화산재 비탈을 느릿느릿 올라온 우리 모습과 온돌방에서 자고 올라온 일행들과는 행색부터 다르다. 무거운 짐은 모두 마을에 맡겨두고 왔기 때문에 더 홀가분한 차림들이다. 이제 33인이 다 모였다. 이제 30분 정도만 올라가면 장군봉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백두산은 모든 사람이 숭앙하는 산이지만, 그 예전 이 산으로 오르는 길은 더욱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산 이름 또한 전설처럼 많았다. '백산(白山)은 동북쪽 모든 산의 시조이다. "산해경에 이르기를, 하늘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은 불함(不咸)이니 숙신씨(肅愼氏·옛날에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살던 민족, 또는 그 나라. 고구려 서천왕때 그 일부가 복속되었으며 광개토왕 8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나라에 있었다." …백산에는 여덟 개의 이름이 있으니, 불함(不咸)·개마(蓋馬)·도태(徒太)·백산(白山)·태백(太白)·장백(長白)·백두(白頭)·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이다.(정약용, '아방강역고')'
산 하나에 이처럼 수많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산이 특이하고 우뚝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연지봉을 지나면서부터 백두대간 분수령의 동쪽 수원(水源)이 두만강 수계에서 송화강 수계로 바뀐다. 대연지봉∼2,261m봉∼2,112m봉 등으로 이어지는 장백산맥이 송화강의 원류인 5도백하(五道白河)와 두만강 수원을 가름하는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중국 발음으로 '우도바이허'라 불리는 5도백하가, 1712년(숙종38년) 청나라 측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 상에 기록된 '東爲土門' 즉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그 '土門'강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영토는 두만강 본류의 강심(江心) 이남으로 축소되었다. 두 강 사이의 땅이랄 수 있는 '간도(間島)'는 청나라와 우리 사이에 오랫동안 설왕설래가 있던 땅이다. '토문'과 '두만'이 같은 강이라는 청나라 측과, 전혀 다른 강이라는 우리 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오랫동안 해결을 보지 못하던 차에, 우리의 국력이 쇠약한 틈을 타서 끼어 든 일제가 1909년 일·청 사이에 맺은 '간도협약'에 의해 청나라 것으로 규정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선조들이 애써 개간해서 살아온 드넓은 땅이 일제의 대륙진출의 교두보가 된 '남만주철도부설권'과 교환되고 만 것이다. 그 길고 분통 터지는 사연들을 다 어찌 말할까? '압록-토문'분수령과 옛 등산로가 겹쳐지는 어딘가에 그때 세운 정계비가 있었다는데, 일제 때 없어지고 말았다하며,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는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다.
'연지봉에서 얼마를 들어가면 두두룩한 긴 등성이가 동(東)으로 향하야 뻗었는데, 뭉우리 돌을 십백(十百)으로 모은 무덕이가 수십보씩의 간격으로 그 우에 벌려나갔음을 보니 이르기를 피아경계의 표식으로 축조하였던 것이라 한다. 돌에 풍우의 자국이 깊고 이끼가 겹겹이 앉아서 우리의 보기에는 단이삼백년전의 물건 같지 아니하나, 이르기를 목극등감계(穆克登勘界)때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이 돌무더기를 건너서면 펑퍼짐한 일고원이 내달으면서 거울같은 작은 늡이 별가티헤어져있고 뒤에는 군데군데 설퇴(雪堆)를 감춘 둥싯한 연봉이 병장(屛障)을 이루고, 좌우로는 어깨가 쳐져서 낭떠러지를 이루었다. 수렁같은 땅을 절벅거리고 배꼽점에 다다라보니 조고만 일비(一碑)가 얼른 눈에 들어오는데, 원체 작게 생겼으므로, 아마 지로표(脂路表)같은 무엇인가하고 살펴본즉 놀라울손 이것이 수백년래 한청갈등의 주인공이신 유명한 정계비그것이요 국경을 표시하는 소중한 물건이며, 그런즉 이 등성이는 압록토문양강(鴨綠土門兩江)의 발원점을 한손에 휘어잡은 분수령이란 그것이요, 그 덜미에 보이는 산은 백두산상봉의 외륜을 지은 일연록임을 알 것이다. …이끼를 부비며 읽어보니, (최남선, "백두산근참기")'
오라(지금의 길림성 지역)총관 목극등이 혜산에서부터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와서, 물길을 살펴보고 경계비를 세웠으니, 그 해는 1712년 그 내용은 이러했다. '대청(大淸) 오라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 군관 이의복·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김경문' 그때 우리측 대표 접반사 박권은 늙고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산에 오르지도 않고, 일개 군졸과 통역관만 딸려보냈다. 한 시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의 양심과 최선의 결과에 따라 좌우된다.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린 경우가 어찌 이 일 뿐일까?
얼마쯤 더 가자 길은 북쪽을 향해 뻗어가고, 우리는 길을 벗어나 화산재 비탈로 올라선다. 하얀 잔등을 비스듬히 열어놓은 산등성이를 따라 장군봉으로 향하는 내 발 밑에는 수천 년 비바람도 다 날려보내지 못한 화산재가 깊이 쌓였다. 멀리서보면 초록빛 풀밭 같지만, 가까이 와보면 발이 빠지는 화산재 비탈. 수천 년 계속된 비바람도 이 산에 쌓인 재를 다 날리지는 못했다. 바람보다 강하고 빗방울보다 끈끈한 무엇인가가 이 비탈을 덮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풀이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풀뿌리들이 그 푸석한 돌들을 깊이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저쪽 언덕에서 건너다보던 이끼 같은 푸른빛. 바로 그것이었다. 작고 작은 풀꽃들이 이 푸석푸석한 돌틈에 뿌리를 박고 화려한 꽃을 피워 벌을 부르는 모습은 경이 그 자체이다. 이 높은 곳까지 꿀을 찾아 날아온 꼬마벌의 날갯짓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이 거대한 산의 주인공들은 저 작고 작은 생명체들이다. 나는 저 작은 것들이 주는 위안을 벗삼아 이 길을 걸어왔고, 그 종점을 향해 마지막 힘을 모으고 있다.
이 마지막 등성이를 톺아 오르면 푸르고 푸른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군봉 정상에 서면 천문봉이나 와호봉 쪽에서 볼 때보다 천지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듣기에 압록강은 천지에서 서쪽으로 터져 나가 솟귀( 耳당이)모양으로 흘러나간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 보건대 사면으로 석벽이 깎아질러 다만 북쪽 한곳에 조그마한 골목이 트여 있을 뿐으로 이는 흑룡강의 근원이 되는 어구라고 한다. 역시 언덕이 높기 때문에 물이 흐르지 못한다. 대개 압록강은 분계령 서쪽에 따로 흘러 내려갔으리라 본다. 바라보면 몇 줄기 물 없는 계곡이 산 아래에서 서쪽으로 빠져나가 아득하니 그것이 어느 강의 근원이 되었는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무릇 백두산에서 나가는 물은 다 스며 흘러 혹은 백리 혹은 40∼50리 가서야 지면으로 나와 흐르게 된다.(朴琮, '백두산유록')' 조선 시대 선비 중,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사람 중, 가장 담담하게 회포를 남긴 사람은 박종이다.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의 백두산을 그려 보일 날이 내게도 왔으면 좋겠다.
발아래 땅만 보며 얼마쯤 걸어왔을까? 피부에 닿는 바람이 다르다. 일행들이 둘러서서 박수를 친다. 제일 늦게 오르는 나를 위하여? 장군봉! 장군봉을 향해 걸어온 지 18개월 만에 듣는 박수소리! 아, 나는 드디어 도착했구나! 나는 차마, 눈을 뜨고 산의 얼굴을 둘러볼 수가 없다. 나는 차마, 눈을 뜨고 천지를 내려다 볼 수가 없다. 나는 차마, 눈을 뜨고 하늘을 볼 수가 없다. 나를 둘러싼 일행들의 얼굴도 그렁그렁한 아지랑이 속에 있다. '기쁨'이나 '감격'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이겠지만, 나는 차마, 입을 열어 스스로 기쁨을 말할 수 없다. 오직 엎드려,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산에 절하고 길에 절할 뿐….
"나는 왔다! 드디어!" 33인 중 누군가가 내 마음에 잠가둔 말을 대신 읽어 바람에 띄우고 있다. 이 황량한 산머리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꿈틀꿈틀 이어지는 1,572km의 산길이 일시에 일어서며 화답을 한다. 우리의 발 밑에서 하나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허리에 박힌 철조망을 걷어낼 때까지, 나는 이 산정에 있겠다!
[제33구간], 아, 나는 드디어 도착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