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구간 : 외무재령∼금강산 비로봉∼온정령 구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이 향 지
금강내기바람이 잠잠해지고, 석 달쯤 지나면 초롱꽃이 핀다. 눈과 바람에 부대끼던 바위틈에서 보랏빛 꽃등을 밝혀드는 금강초롱꽃. 대낮에도 보랏빛 등불을 밝혀들고 금강산은 기다린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을―. 마흔 여덟 번의 가을이 붉게 익어 낙엽이 되었다. 봄마다 펼쳐졌던 진달래꽃 융단은 기다림에 지쳐서 흙이 되었다. 금강산은 또 다시 가파른 바위틈에 금강초롱을 매단다. 길이 없어서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꽃등을 준비한다.
자양리 민가에서 이른 아침을 얻어먹고, 외무재령으로 올랐다. 아주마이 그 먼길을 어찌 가려고 그러오? 함경도 말씨가 섞인 농부 내외는 나를 걱정했지만,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구경하면서 가지요.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새들은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어 제 종족을 부른다. 생명 세계의 질서는 이렇게 이어지고 또 지켜져 가는 것이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가 우거진 숲은 능선과 능선 사이에 진초록 융단을 펼쳤고, 별빛이 구르던 초록 융단 위에서 아침 햇살은 기지개를 켠다. 내 머리 위 소나무 잎새를 금속처럼 반짝이게 하는 아침의 빛. 바람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귀에 속삭인다. 오늘은 무척 더울 거야.
우마차로에서 북쪽으로 100m쯤 내려서니 소로가 있다. 도로를 만드느라 언덕이 생겨서 조금 더 돌았다. 우마차로는 산허리를 파며 지나가지만, 오래된 산길은 고갯마루에 작은 십자로를 만들었다. 이 십자로 안부가 외무재령이다. '외무재'는 '바깥무재'라고도 하고 '바깥무재고개'라고 겹쳐 부르기도 한다. 외무재령에서 5km쯤 북상한 곳에 있는 고개가 '수점' 곧 '내무재'다. 백마봉∼차일봉∼천화봉을 넘어 3시간쯤 가면 내무재령에 닿을 것이다. 외무재령 동쪽 비탈의 물은 원앙동쪽으로 내려가 환희현 부근에서 남강의 원류와 합수하고, 외무재령 서쪽 비탈의 물은 자양리∼수구동으로 흘러 장안사터 아래쪽에서 만폭동·백탑동 물을 합하고, 동금강천을 이루다가 금강천으로 흘러들어 북한강이 된다.
외무재령에서 백마봉을 향해 오르는 능선 길은 박제된 새의 날개 등처럼 구부러졌다. 지도 위에 그려진 대간 능선은 잃어버린 날개를 생각하게 하지만, 현실 속의 길은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들이 빽빽하게 어우러져서 바다 쪽도 내륙 쪽도 보이지 않는 수해(樹海) 속이다. 그래도 길은 있다. 짐승도 다니고 약초꾼도 다니는 길. 길 쪽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배낭 옆구리를 긁기도 하고 잡아 다리기도 하는 길. 때때로 물 속을 걸으며 헤엄을 배우는 아이처럼 팔을 저어 나뭇가지를 젖히며 전진해야 하는 길. 기이한 바위와 계곡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런 길을 걷지 않는다. 길이 끝난 곳에서부터 산이 시작된다고 우정 길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산꾼들이나, "아이구 이 나뭇가지가 사람 치네!" 껄껄 웃으며 좋아할 길이다. 나무를 지나…, 나무를 지나…, 무수한 만남과 작별을 지나서…, 느릿느릿 오르는 사이에 발 밑의 흙이 정든다.
1시간쯤 오르니 답답하게 시야를 가리던 나무들이 키를 낮추고, 백마봉 동봉(1,510m봉)이 동쪽으로 비켜 앉는다. 왼쪽에 솟은 봉우리는 백마봉 정상이다. 백마봉(白馬峰·1,510m)은 금강산 남단을 지키는 거봉이다. 두 암봉 사이에 난 잘룩이를 통과해서 다시 대간 능선으로 올라섰다. 차일봉쪽에서 내려온 길이 백마봉으로 이어진다. 나무와 바위를 붙들고 올라서니, 꿈에 그리던 내금강이 속내를 드러낸다. 무수한 봉우리들 사이로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능허봉∼영랑봉∼비로봉∼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각양각색의 봉우리들을 끌어안은채 아지랑이같은 기운에 감싸여 있다. 영원동은 바로 발 아래 있다. 영원동에는 장안사(長安寺) 말사인 영원사가 있었다.
'영원동의 승경은 이미 그 절반은 백탑동에서 보았지만 그 변화하는 모습은 더욱 무궁하다. 폭포는 성난 듯하고, 못(潭)은 기뻐하는 것 같고, 여울물은 슬퍼하는 듯, 모양이 바뀌면서 서로 의지해 있다. 샘의 모양이 여러 번 변하면서 묵중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부귀에 가깝고, 웅장하고 사나운 것은 용맹스러운 것에 가깝고, 가냘프고 교묘한 것은 재주 있는 것에 가깝고, 뾰족하고 조촐한 것은 각박한 것에 가까워서 서로가 경치를 자랑한다. 돌의 모습도 여러 번 변하니, 보는 사람의 생각도 또한 여기 따라서 옮겨진다. 또 여러 봉우리들이 날기도 하고, 춤추고 일어서고, 엎드린 것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신비로움을 느낄 뿐이더니, 미륵봉(영원암 남쪽에 솟은 봉우리로 시왕,판관,사자,동자,죄인,미륵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함:필자)을 보고서는 소리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푸른빛이 얼룩진 데에 흰빛이 섞여 하늘 높이 치솟아 끝이 없어 올려다보다가 기운이 빠질 지경이다. 조화의 힘이 돌 하나에도 이렇게 크단 말인가? 이것을 만들 때 풀무는 누가 마련했고, 화로는 어디에다 걸었으며, 몇 달 몇 해나 걸려서 공사를 이루었는가?<이상수(李象秀·1820-1882)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이민수번역·월간산 '85년 6월호>'
백마봉 정상에서 서쪽으로 어깨를 낮추는 능선 끝에는 십왕봉이 솟았다. 십왕봉은 한자로 '十王峰'이라 쓰고 '시왕봉'으로 읽는데 요즘은 그러지도 않는 모양이다. 영원동 계곡 건너엔 지장봉(1,381m)이 솟았다. 지장봉 너머는 백탑동이다. 들쭉날쭉하는 암봉 사이로 숨은 듯 드러나는 물줄기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금강산은 야누스다! 백마봉에서 장군성까지 이르는 대간능선은 좌석림(左石林) 우수림(右樹林)을 끼고 이어진다. 백마봉에서 차일봉을 향해 걸어가는 길의 왼쪽은 풍우에 씻긴 바위들이 천태만상으로 일어 서 있는 내금강이고, 오른 쪽(동쪽)은 나무가 울창한 삼림지대다.
1,444m봉을 지나 조금 가니 영원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저 길을 타고 서쪽으로 5km쯤 걸어 내금강으로 들어가면 그 유명한 명경대와 황류담이 있다. 명경대는 바위가 꼭 커다란 돛처럼 생겼다. 그 아래는 거울 같은 연못이 그 돛그림자를 안고 영원을 건너는 중이다.
백마봉에서 차일봉에 이르는 대간 능선의 오른쪽은 만경골이다. 용천동∼반야대∼선담(船潭)을 거쳐온 험로가 미륵봉(1538m·내금강의 미륵봉과 구별하기 위해 외미륵봉이라 부름)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짙은 숲이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미륵봉 정상에는 몇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험하기는 해도 능선을 타고 차일봉 쪽으로 올 수도 있다한다. 그러나 만경동∼미륵봉을 탐승하는 사람들은 유점사쪽에서 올라왔다 미륵봉에서 되내려가는 코스를 택한다. 만경골 상단부의 지형이 그만큼 험하다는 이야기다. 그 험한 골짜기를 파며 남강의 원류 한 가닥이 흘러가며 외금강의 명물인 선담(船潭)을 만들었다.
배처럼 생긴 선담을 지나, 반야대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유점사터가 있다. 느릅나무 모양에 53불(佛) 모셨더라는 유점사(楡岾寺)는 금강산 4대 명찰의 하나였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금강산에는 괴상한 이야기가 많지만 유점사가 가장 두드러진다. 구지(舊志)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부처가 세상을 떠난 후에 문수대사가 금으로 53개의 불상을 만들어서 종(鐘)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웠다. 이 종이 월씨국(月氏國)에 도착하자 그 나라 왕 혁치(赫치)가 받들어 모셨더니 그 대궐에 갑자기 화재가 났다. 왕이 두려워하여 다시 바다에 띄웠더니 여러 나라를 지나서 금강산 동쪽 안창현 포구에 닿았다. 고성 태수 노춘이 이 말을 듣고 달려가니, 종은 이미 언덕으로 올라와서 저절로 어데론가 가버렸다.…문수대사는 여승으로 변하여 길을 가리켜 주고, 흰 개를 앞세워 인도하게 했다. 목이 몹시 말라서 땅을 팠더니 샘이 솟아났고, 어디선지 노루가 나타나서 길을 안내하더니 갑자기 종소리가 들린다. 기뻐하여 앞으로 찾아가니, 종은 느릅나무 가지에 걸려있고, 부처들은 못 위에 흩어져 있었다.…(그래서 세운 절이 유점사고) 지금에 말하는 게방, 문수촌, 이유암, 구령(개잔령), 노춘정, 장항(노루메기), 환희령이 그 종이 유점사터를 찾아 지나간 지역 이름이다… 대체로 이름 난 산에는 중이 반드시 말을 만들고 과장해서 기이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신비스럽게 꾸몄다. …이런 말들을 믿는다면 이는 촌구석 노파가 될 것이오, 또 이런 것을 가지고 다툰다면 답답한 선비가 될 것이며, 이를 전한 자는 일을 좋아한 자이고, 이것을 기록한 자는 괴상한 것을 쓰는 것 뿐이다(이상수 '동행산수기')'
차일봉(遮日峰·1,529.2m) 오르느라 목이 다 탔다. 차일봉은 덩치가 큰 육산이다. 동쪽 숲이 더 짙다. 정상에는 송곳같은 바위가 하나 솟아있는데, 멀리서 보면 고깔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이고, 잔치 때 차일(遮日)을 치기 위해 세워놓은 지주(支柱)처럼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일봉은 안문봉이라고도 불렀던 모양이다.
성해응(1760-1839)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수점(水岾)은 바로 외산(外山)이며, 고성과 경계를 이룬다. 이허대를 거쳐서 계곡을 따라 20리쯤 올라가면, 만나게 된다. (수점은) 곧 안문봉(雁門峰)의 가지이다'하였고, 또 조선조 순조∼고조 때의 문신이던 이상수(李象秀·1820-1882)는 치밀한 고증과 탁월한 묘사력을 보여준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에서 내금강 백운대에서 봉우리들의 배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두 줄로 된 쇠줄을 잡고 올라가니, 기총령이요, 수백보가 긴 담처럼 우뚝 솟아있는 것은 백운대로서 사방의 전망이 매우 좋다. 여기서 동쪽은 안문봉(雁門峰)·일출봉·월출봉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향로봉, 남쪽으로는 혈망봉, 북쪽으로는 가섭봉이 보인다.'했다.
천화봉을 지나서 내무재령으로 내려섰다. '이 고개에 서면 서쪽으로 총총히 푸른 봉우리와 삐죽삐죽한 석봉(石峰) 사이로 입을 딱 벌린 듯 훤하게 트인 만폭동이 굽어보이고, 북으로는 비로봉이 하늘을 감싸 안은 듯 하고, 동으로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빽빽히 서있는 곳에 자줏빛 기운이 알맞게 섞인 편편한 골짜기를 내려다보게 되었다.(이만부(1664-1732)의 '地行錄'·이창섭번역)'
내무재령 동쪽 골짜기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내무재령 마루에서 동쪽으로 1km쯤 내려가면 차일봉 동북릉과 천화봉에서 내려온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이 계곡물은 성문동∼만상동∼송림동을 거쳐 백천천으로 흘러든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물이 없겠지만, 아무튼 백천천의 최 상류인 그 계곡을 건너면 바로 앞 동쪽에 또 하나의 언덕이 막아서는데, 거리 100m에 고도 50m정도를 높이게 되는 조그만 언덕(개념도에 ⓓ로 표시한 지점)이다. 그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효운동계곡의 상단부로 들어서게 된다. 이 계곡이 남강의 원류가 시작되는 곳이다. 2km쯤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지계곡이 곧 남강의 원류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왼쪽에 칠보대로 오르는 길이 있고, 1.5km쯤 더 내려가면 역시 왼쪽에 은선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은선대에 오르면 십이폭포가 마주 보이는데, 열 두개의 폭포가 흰 비단이 흩어지는 듯 날아내린다고 한다. 다시 1km쯤 더 내려가면 유점사 전설과 얽혀있는 구룡소가 있고, 1km쯤 더 내려가면 만경골 물과 합수하여 남강을 이루게 된다. 내무재령 부근의 능선은 은밀한 부분을 겹겹으로 감싸는 것도 같고, 기러기가 하늘로 솟구칠 때의 날개 모양을 닮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내수점 또는 안문령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내무재령에서 일출봉 오르는 사이에 두 번을 쉬었다. 해는 어느새 머리 위에 떴다. 땀은 흐르고 목은 마르고 다리는 아프지만 눈과 마음은 한없이 즐거워한다. 오르면서 보면 채하봉 능선이 너무 아름답고, 돌아앉으면 내금강의 절경이 유혹한다. 내가 가야할 비로봉은 바위와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찬 비탈 너머에 둔중한 머리를 솟구쳤다. 시선을 동쪽으로 던지면 바다를 찾아 내려간 하늘 한 끝이 바다와 한 몸을 이루었다. 등뒤에선 내가 걸어온 외길이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넘어서 출렁거린다.
일출봉에서 200여m 오르면 월출봉이다. 하나의 봉우리에 두 개의 이름을 붙인 듯 가깝다. 해뜨는 곳이 곧 달뜨는 곳인데,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에 두 개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음양(陰陽)을 한 꾸러미에 묶으려드는 인간사 본연의 소산이다. 이를 반증하듯 월출봉에서는 '이성계발원사리구'란 유물이 출토되었다('유물'란 참고).
장군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동쪽을 가린 암봉들을 비켜서 이어진다. 비로봉 남쪽 가슴팍은 흙 한 줌 없는 절벽인데 건너다보니 한없이 아름답다. 비로봉 정상에서는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타고 중향성 동쪽을 거쳐 만폭동으로 내려갈 수가 있다. '금사다리 은사다리'란 금제(金梯) 은제(銀梯)라고도 부르지만, 금이나 은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걸쳐놓은 것이 아니라, 후둘후둘 다리가 떨리는 사다리를 타는 것처럼 좁고 가파른 길이 흙 한 줌 풀 한 포기 없는 너덜지대를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수직의 절리가 탁월한 '흑운모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인데, 흑운모가 섞인 돌은 빛의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이 변하는데, 금사다리 은사다리 부르는 비로봉 남쪽 기슭은 아침 해가 비칠 때는 은빛이 나고 석양이 비칠 때는 금빛으로 변한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은 곳곳에 돌계단을 다듬어 놓아서 가파르긴 해도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내금강 만폭동∼금사다리은사다리∼비로봉∼아홉소골∼외금강 옥류동 코스는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길이며 대표적인 탐승코스이기도 하다.
조선조 말의 풍류시인이었던 풍암산인 유병준(兪炳準)은 '금강산일기'에서 한일합방 4년 후인 1914년 음력 4월에 내금강에서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타고 비로봉에 올랐다. '마하연으로부터 소광암을 거쳐 산골짜기를 뚫고 들어가는데, …산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길이 없으면 산을 버리고 시내로 쫓아간다. 시내를 따라 몇 발자국 가다가 물이 나타나면 언덕으로 오른다. 지팡이를 왼손으로 쥐었다 오른손으로 옮겨 쥐기에 손이 매우 바쁘다. 이 돌 저 돌 옮겨 밟자니 발도 매우 바쁘다. 가다가 길을 잃으면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돌을 포개서 표해놓은 것을 보고 길을 찾는다. 절벽을 만나면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고 건너간다. 봉우리 밑에 이르자 흙이나 모래라고는 한 줌도 없고 오직 돌덩어리만이 첩첩이 쌓여서 마치 알을 포개놓고 과실을 포개놓은 것과 같다. 그 빛이 누런 것을 금제(金梯)라 하고, 빛이 흰 것은 은제(銀梯)라고 한다. 돌 하나를 껴안고 돌아서 앞발이 한 걸음 올라가면 또 딴 돌 하나를 껴안고 뒷발이 한 발자국 올라간다. 이렇게 올라가 보니, 철쭉꽃 봉오리와 측백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봉우리 뒤에는 딴 풀이나 나무는 없고 산에 가득한 것이 오직 측백만이 있는데, 그것도 바람에 시달려서 키가 한 길도 자라지 못한 채 마치 등나무나 칡처럼 덩굴이 번져서 땅 위를 덮고 있다. 동해는 망망해서 하늘인지 물인지 분간 할 수가 없고, 눈 앞에 있는 여러 봉우리는 마치 개미집과도 같다(이민수번역, '월간산' 84년 9월호).'
그때로부터 백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내 눈앞의 금강산 길목들은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비로봉에 올라서니 오후 1시. 외무재령 떠난 지 6시간 만이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봉이다. 바위에 무늬가 있는데 오랫동안 산 기운과 안개로 아롱지게 섞이고 어려 눈빛과 같다. 산 이름을 개골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동국여지승람).'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로봉의 남쪽과 동쪽은 갖가지 모양의 암봉들이 창검을 치켜든 병사들처럼 옹립하고 있다. 그러나 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능선의 서쪽과 북쪽은 부드러운 흙이 덮고 있는 평원이다. 비로고대(毘盧高臺)라 부르는 이 평원에는 한라산 정상부나 설악산 대청봉의 서북쪽 기슭처럼, 땅을 기며 자라는 '고산성 상록 침엽관목'들이 뒤덮고 있다. 추위에도 잘 견디고 해풍에도 강하며 건조기에도 견딜 수 있는 눈향나무 눈잣나무 눈측백들이다.
내 몸은 바위 그늘에 배낭을 내려놓고 소금과 깨소금에 버무려 뭉친 주먹밥을 먹는데, 마음은 금사다리은사다리를 타고 중향성 구경을 다녀왔다. '중향성(衆香城)을 보게 되자 무릎을 치면서 탄식한다. 조물주가 이토록 기이한 것을 좋아한단 말인가? 멀리서 바라볼 때는 마치 아침 해가 처음 올라오는 것 같아서 빛이 서리에 비쳐서 환하게 보이더니,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껍질을 벗긴 마늘쪽을 책상 위에 벌여 세운 것 같다. 바위가 층층으로 높다랗게 서있는데, 한 주먹 흙도 없고, 한 치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산마루로부터 깊은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뿐이다. 맑은 가을날 밤에 침상을 끌어안고 그 안에 들어가 자다가 새벽이 되어 갑자기 깨면 별들만이 반짝여 몸이 은하수에 와있는 것 같아, 견우성이 요새 어떠한가 묻고 싶어진다. 이럴 때 신선의 옷을 입고 피리를 불면서 그 꼭대기에 오르면 채색 구름이 나를 감싸고 가리라(동행산수기)'
비로봉 정상으로부터 밋밋한 능선길을 1km쯤 걸어오니 비로봉 숙박소 앞이다. 조금 더 가니 구성동과 옥녀봉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 비탈로 내려가면, 폭포와 담(潭)의 집합처이기도 한 옥류동으로 통한다. 비로봉 동릉에서 시작한 옥류동 물은 아홉소골∼상팔담∼비사문∼구룡연∼비봉폭포∼금강문을 거쳐 신계천이 된다. 신계천은 양송리 동쪽에서 남강의 원류를 만나 동해로 들어간다. 옥류동계곡 상단부인 아홉소골은 양쪽이 꽉 막히고 좁은 골짜기 안이어서 답답하지만, 비사문을 지날 무렵부터는 시야도 트이고, 특히 비룡대에 엎드려서 상팔담(上八潭)을 내려다보면 장관이라고 한다. '구룡폭포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므로 이 마음을 헤아려서 개척해 놓은 것이 구정봉으로 오르는 구룡대 코스이다. …안전 사다리 14개를 기어오르면 상팔담 전망대인 구룡대에 오르게 된다. 그 거리는 700m밖에 안되지만 너무도 가팔라서 튼튼한 심장을 가지지 않고서는 주저하는 곳이다. …구룡대에서 100m가량 더 올라가면 절벽 위에 턱이 진 바위가 있는데 …너무나 위태롭고 아찔하여서 서거나 앉을 수도 없을 정도여서 엎드려서 턱만 내놓고 상팔담의 전모를 굽어볼 수 있다(우종수 '금강산가이드', 수문출판사)
외금강의 계곡들이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난코스였기에 접근이 어려웠고, 예전 사람들의 금강산 예찬도 내금강과 해금강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금강의 산들은 대개 이름이 없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모든 봉우리가 더욱 빼어나고 아름답다. …산수가 이름을 얻는 것은 귀하고 권세 있는 사대부의 힘을 빌어야 하는 법인데, 서울에서 온 자들이 내금강을 보다가 기운이 다 빠져서 고개를 넘어 외금강에 와서는 흔히 바쁘게 지나치고 만다. 내금강의 파륜이니 석응이니 하는 것들은 하나의 조각 돌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봉우리 축에 들겠는가? …옥류동으로 가니 맑은 광채가 남의 눈을 뺏고 기이한 폭포는 진주담을 아우로 삼을 만큼 장관이다. 앙지대를 지나면 금강문에 이르는데, 캄캄한 구멍 속을 숨울 죽이고 나가게 된다. 석벽에 꽂아놓은 쇠말뚝은 심장이 약한 자를 구제해주며 혹은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게 해 놓았다. 엎드려서 올라가고 쭈그리고 내려오는 등 갖가지 형태를 나타나게 된다. 운금폭에서 더 가니, 금은폭이 있고, 그 다음은 비봉폭이다. 백길이나 되는 절벽이 아득히 하늘에 닿았는데 거기에서 달려 내리는 물이 몹시 가늘게 내려오다가 갑자기 안으로 욱어든 곳을 만나 하늘에서 떨어지던 물이 의지할 곳을 잃고 실처럼 갈라져 스스로 감기려 할 때, 가벼운 바람이 옆에서 불어오면 구슬 안개가 되어 날아 흩어지는데 그 기묘함을 형용할 수가 없다. 또 가노라면 무봉폭이요, 거기서 더 가면 구성대다. 구성대에서 보면 두 봉우리가 마주서서 말안장과 같은데, 그 사이로 물이 흘러넘쳐 50길이나 높이 떨어진다. 그 밑의 못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으니 이것이 구룡연이다. … 한번 실족하면 못 속으로 들어가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이상수 동행산수기).'
그러나 이제 신계천 상류 일대에는 신계·앙지(회상다리)·만경·금수·옥류교 등의 줄다리를 철다리를 교체하는 등 안전시설이 마련되었다.
비로봉숙박소 삼거리에서 조금 더 가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 무덤이 있다.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숨어들어 바위굴에서 사계절 베옷을 걸치고 지내다 죽었다는 비운의 왕자. 비로고대 삼거리에 있는 묘가 정말 그의 묘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일제 말기에는 도벌꾼이 이 묘까지 뒤졌다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옥녀봉은 동양미인처럼 윤곽이 부드러운 암봉이다. 건너다보면 지척인데, 백두대간은 낚시바늘처럼 휘어져서 한쪽 끝을 옥녀봉에 걸어놓았다. 날씨가 맑은 덕분에 목표물을 빤히 건너다보면서 걸어간다. 왼쪽은 드넓은 평원이고 오른쪽은 가파른 계곡이다. 100m쯤 내려가니 십자로 안부가 있고 길은 다시 밋밋한 언덕으로 기어오른다. 바다쪽을 내려다보니 장전만은 천혜의 항만이다. 아무리 거친 동해의 물결도 저 좁은 물 목으로 들어오면 유순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옥녀봉을 지나서 상등봉을 향해간다. 골짜기 건너편에 펼쳐진 관음연봉이 오후의 태양을 받아 홍조를 띄고 있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보면 하늘에서 폭포가 내려오는 듯 하다는 봉우리들이다. 꿈틀거리기는 해도 능선이 뚜렷한 곳에서는 길 잃을 염려가 없는데, 고성군쪽 가는골과 금강군쪽 가는골이 밋밋한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엇갈리는 1006m고개 부근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어쩌는 수가 없다. 삼선암터 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들었다 되돌아왔던 것이다. 관음연봉이 가지를 치는 상등봉 능선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직선 거리 1km도 안되는 곳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봉우리를 곱절도 넘게 돌아서 가려니, 배낭도 두 배로 무거워지고, 다리도 두 배로 투덜거린다. 또 상등봉고개에는 구성동과 온정천을 연결하는 소로가 지나간다. 지름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15분쯤 올라가니 상등봉이다.
상등봉 일대에는 중석광산이 많았다. 1910년에 한일합방을 강행한 일제는 1937년 말부터, '금강산 개발'이란 명목으로 금강산에 매장된 중석(텅스텐)을 채굴했던 것이다. 중석은 2차대전 수행에 필요한 중요한 군수물자였던 것이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물러가던 1945년 무렵에는 상등봉 일대에 10개가 넘는 갱구가 뚫려 있었다. 그 당시 중석 1kg이 2000원을 호가 할 정도여서, 금강산 일대에는 도벌꾼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중석의 광맥은 차돌 속에 박혀있어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지는 않고는 캘 수 없다고 하는데, 도벌은 주로 도망치기 좋은 밤을 틈타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밤마다 펑펑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에, 산은 얼마나 놀라고 바위들은 얼마나 흔들렸을까?
상등봉 서쪽 봉우리에 올라서니 해는 이미 기울었다. 붉으레한 잔명 속에서 만물상의 기암들은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한다. 이제 북쪽으로 길머리를 돌려 1km쯤 내려가면 온정령이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땅속에는 미로처럼 갱도가 얽혀 있다는 상등봉 능선이 내 발 아래 있다. 나는 1시간 이상을 그 껍질 위를 걷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한 송이 꽃으로 비유되어온 금강산. 말못할 속앓이를 간직하고도 가파른 바위틈에 금강초롱을 매달아, 대낮에도 어두운 마음들을 밝혀주는 산. 남이 쓴 글과 남이 찍어온 사진 속에서 제멋대로 나부끼는 편린들에 불과하던 금강산이, 한 송이 꽃처럼 통합을 이루어 내 가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오늘 하루 해뜰 무렵부터 지치도록 걸어온 금강산. 이제부터는 네가 내 가슴 안의 능선길을 걸어서 넘어라. 개골! 풍악! 지달! 금강! 세상에 회자되는 이름으로서의 산이 아니라, 흙과 나무·바위와 새·신비와 상처를 안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산의 걸음을 걸어, 나에게로 오라!
제3구간,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